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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힘이 실리는 삶 살아야”[에큐 기획 인터뷰 ②] 이정배 교수
박준호 기자 | 승인 2016.03.04 15:51
이정배 교수. ⓒ에큐메니안

지난 2월 16일. 방학이라 한산한 감리교신학대학교에 모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청년, 중년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행사가 열리는 강당으로 향했다. 몇몇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기도 했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이곳저곳에서는 행사 순서에 나갈 특송을 연습하거나, 악수하며 안부를 묻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 시끌벅적했다.

그때 한 사람이 행사장에 도착하자, 일순 행사장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그와 인사하기 위해 다가섰고, 서로 오랫동안 응시하며, 때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며 그렇게 악수를 나눴다. 이정배 교수의 30년 감신대 마지막 날의 모습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정배 교수는 교수로서 30년, 학생 시절 까지 포함하면 도합 42년을 감신대에서 보냈다. 중간에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 시절을 제외하고도 그의 인생의 대부분은 ‘감신대’였다. 그가 은퇴식에서 ‘감신’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혀 눈물을 쏟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4년 6개월의 교수 정년을 남겨두고, 은퇴식을 가졌다. 학내 사태가 정상화가 되지 않을 경우 사직하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런 그에게 제자들은 은퇴식이 아닌 선생을 세상에 보내는 출정식을 마련하며, 아직 그의 발걸음이 쉬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교수 이정배가 아닌, 선생, 신학자 이정배가 된 것이다. ‘온전히’ 신학자가 된 그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 것일까?

본지는 은퇴식이 있기 일주일 전 이정배교수를 만나 지난 삶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1. 2월 16일 은퇴식 겸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있다. 심경을 말해 달라.

아직 정식으로 은퇴하려면 4년 반의 시간이 남았지만, 일찍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교수 생활을 남들 한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1년 전, 스스로 후학들을 위해서 자리를 내주는 것이 여러모로 도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또 학교 밖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완하며 해나가야 일도 있다고 생각하며 송순재 교수와 함께 의기투합해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평소 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감신대 학생들인데, 세월호 참사가 나자 학생들이 세종대왕상에 올라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본 교계의 현실은 아주 차가웠다. 물론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학생들을 아주 나쁘게 평가했고, 빨갱이 자식을 키웠다고 그들의 부모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감리교에서 목회하는 것은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하면서 뿔뿔이 흩어지려고 했다.

‘안되겠다. 누군가는 지켜줘야 할 선생이 되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마음이 나를 붙잡았고, 당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명을 받아 지금 그만두는 것은 세월호 선장과 같다고 해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 마음에 응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끝까지 이 마음을 붙들고, 누군가는 학생들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2. 하지만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중간에 이렇게 학교를 떠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와서 끝가지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학교의 여러 상황들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이정배 교수와 송순재 교수는 작년 10월, 각종 사태로 얼룩진 감신대가 정상화 되지 않으면 사퇴할 것을 공헌한 바 있다) 학생들과 약속을 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괴롭다. 제일 미안한 것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은퇴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은퇴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을 세상으로 파송하기 위해서 이 모임을 준비한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학생들이 뜻이 무엇인지 잘 헤아리겠다.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나도 “세상이 교구다”라는 다짐으로 살겠다. 떠나는 자리가 아니라, 새롭게 출발하는 자리로 의미화 하고 싶다.

지난 2월 16일(화) 감신대 중강당에서 열린 이정배 교수 은퇴식. 많은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에큐메니안

3. 최근 감리교 내부에서 동성애를 찬성 옹호하는 목회자에 대한 처벌법이 생겼다. 이런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성애 문제에 대해 누구나 확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개신교는 자기 자신을 내면적으로 성찰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몰락해 가는 현실을 자꾸 외부의 적을 만들고 희생양을 만들어서 끊임없이 타자를 부정함으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못난 짓이다.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타자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 동성애 문제가 그렇다. 동성애, 이슬람을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몰락해가는 정체성을 지켜보려고 하는 노력이 안타깝고, 가련하다. 동성애 자체를 놓고,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하는 시대이다. 

동성애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를 두고 질문하는 태도도 문제가 많다.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동성애자가 된 원인들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동성애자가 되거나, 후천적으로 개발이 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동성애의 경향성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후천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동성애를 정죄하는 행위는 그리스도 정신에 맞지 않는다. 동성애를 부정하다보면 동성애자를 배려할 수 없는 입장을 가지게 된다. 

4. 신학자로 30년을 살아왔다. 그동안 이정배를 이끌었던 신학은 무엇인가?

처음 바젤로 유학 갔을 때, 변선환 박사께서 우리 부부(이은선 교수)에게 본인들은 불교, 기독교의 관계를 공부했으니, 우리는 윤성범 선생의 정신적인 맥을 이어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공부하고 오라고 권유받았다. 그래서 유교적 신학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돌아오면서 관심이 다양해지고 산만해졌는데, 부인인 이은선 교수는 이것을 끝까지 살려냈다.

그런 관심들이 1988년 JPIC가 한국에서 열리면서 응용이 되기 시작했다. 폰 봐이제커(물리학자,<시간이 촉박하다(Die Zeit draengt)>로 JPIC에 발의했다)의 책 번역을 하게 됐는데, 그는 책을 통해 ‘빈부문제의 불균형’, ‘핵무기의 과다보유’, ‘자연생태계의 파괴’, 이 3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한 기독교의 구원은 아직 멀었다 고 말했다. 비로소 이때 현실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책만 가지고 씨름하다가 현실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그러다 보니 JPIC의 문제는 서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공부한 유교적 신학과 서구적 신학을 종합하면 새로운 한국적 생명신학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생태학적인 이론들을 동양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면 새로운 토착화 신학이 되는 것이다. 예전부터 토착화 신학안에 생태학적 이란 개념이 없었지만, 이제는 토착화라는 말속에 생태문제와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과제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그 다음 단계는 서양의 과학이었다. 서구의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니 서양과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새롭게 전개되는 과학이 신학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으로 전개됐다. 현대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중심주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과학에 대한 공부가 결국엔 한국적 생명신학을 더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학문적 관심의 단계는 ‘민중신학’으로

그 이후 생각의 발전은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은 늘 나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하지만 신학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두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민중신학의 근간이라고 하는 사상적인 흐름부터 관심하게 됐다. 그 처음이 동학과 함석헌이었다.

이 둘에 대한 공부는 민중신학적인 바탕과 근거를 알려고 들어갔던 세계였다. 막상 그 세계에 들어가니 한국적 생명신학이라는 그 틀을 더 확장 시키고, 그 틀을 민중지향성을 가지고 전개할 수 있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배움은 다석 유영모로 이어졌다.        

일본에는 교토학파가 있듯이 한국에는 다석학파의 기독교 이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유영모와 함석헌을 나누는 것은 잘못한 것이다. 이들을 한데 묶어 한국 고유의 다석학파의 신학으로 엮어내야 한다. 나는 다석학파의 기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들을 개인으로 묶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나로 묶어야 한다.

다석학파의 기독교가 마지막 단계였다. 그 틀에서 ‘종교 간의 대화’, ‘한국적 생명신학’, ‘아시아적 신학’도 연구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화두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수행의 문제’, ‘자속과 대속의 문제’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100% 자속도 없고, 100% 대속도 없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길을 가다가 길이 되라” 라는 것이다. 처음에 길은 내가 만든 길이 아니다. 그 길이 있다는 것은 대속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다가 나도 그 길이 되는 것은 자속이다. 대속과 자속은 둘이 아니다.

신앙의 그리스도가 있기에 역사적인 예수가 중요한 것이다. 신앙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역사적 예수는 과거의 위대한 인물밖에 안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토착화 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역사적 예수를 오늘 동양의 틀 속에서 다시 ‘케리그마’해야한다. 서양에서 케리그마 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화 되기 이전의 역사적인 예수를 오늘 우리들의 사상의 구조 속에서 다시 케리그마화 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적 신학이다. 여기서 민중신학, 한국적 생명신학도 나올 수 있다.

ⓒ에큐메니안

‘세월호 이후의 신학’

세월호참사는 나를 길거리로 내 몰았던 사건이었다. 나는 세월호를 이 땅의 ‘아우슈비츠’라고 말한다. 세월호에 대한 진실이 규명되지 않고는 대한민국은 한발자국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기독교의 힘은 팩트에 대한 접근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불교의 ‘화쟁론’이 팩트에 대한 관심이 아닌 팩트에 의해 생겨난 오피니언들을 가지고 화쟁을 시키려고 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4월 16일 아이들이 바다 속에 있는데, 당시 교회는 ‘사셨네 사셨네 예수다시 사셨네’라는 부활절 노래를 불러야 했다. 교리로 설명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당시 배 안에서 하나님을 불렀던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교리로 설명 할 수 있겠는가? 아우슈비츠처럼 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돼버렸다. 그 다음 기독교가 보여준 일련의 태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되돌아 본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다. 히틀러 시대의 정황과 박근혜 시대의 정황을 연결시켜보니, 정치 경제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오버랩되는 경우가 많다. 형태가 다르지만 ‘파시즘’이 그렇다. 아우슈비츠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정부에 동조 했다는 것. 지금 한국도 기독교가 정부에 동조하고 있다.

히틀러 시대의 기독교인을 동원해서 유태인들을 죽였지만 결국 죽은 것은 기독교라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신학의 첫 번째 명제이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로 인해 기독교도 죽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은 유대중심으로, 바울도 헬라적이 아닌 유대적으로 다시 살려냈다. 이처럼 세월호 이후의 신학도 달라져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세 가지의 ‘오직’ 교리가 철저하게 재구성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점 내가 자유롭게 된 것이 그 신학을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과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신학자로서 어떤 연구를 할 것인가?

2010년에 들어오면서 2010년부터 2020년까지의 10년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다. 2013년 WCC,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2019년 3.1절 100주년. 이것을 어떻게 잘 이끌어서 기독교가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2013년 WCC는 허망하게 끝났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우리 끼리만의 ‘돈 잔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2017년 종교개혁 500년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이를 위한 3가지의움직임이 눈에 띈다. 첫째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독일 뷔텐베르크의 대학과 여관을 점령해서 2017년 10월을 종교개혁 성지에서 보낼 그룹. 둘째는 루터, 칼빈의 뜻을 기리는 동시에 종교개혁가들의 저서들을 의미화하고 공헌을 기리는 그룹. 세 번째는 종교개혁 신학의 3대원리를 넘어서자고 주장하는 그룹이다.(이정배 교수는 자신을 세 번째 그룹이라고 칭했다)

2017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의 3대 원리의 비판과 함께 작은 교회론이라고 하는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 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의미화 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 또한 교회자체가 자본주의화된 구조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답을 얻어나가고 싶다.

이것이 잘되면 2019년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좋은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 현재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 안에서만 에큐메니칼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여러 종교들이 함께 모여 자기종교를 들여다보고, 더 큰 틀에서 종교를 논의하는 진정한 에큐메니칼 ‘담론’이 만들어져야 한다. 상징적인 의미로 각 지역마다 33인이라고 하는 종교모임이 만들어져서, 좋은 담론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선언문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명 ‘3.1철학’이라고 말하는데, 왜 ‘자기 아(我)’가 아닌 ‘자기 오(吾)’로 썼는가? ‘자기 아(我)’라고 하는 것은 손에 창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하지만 ‘자기 오(吾)’를 썼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일부러 피한 것이다. 그 안에는 세계평화주의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3.1 독립선언문에 있는 가치들을 신학화는 것이 중요하다.

머릿속에 있는 구상은 여러 종교단체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3.1 독립선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동학으로부터의 도움이다. 당시 2천만 인구 중에 동학인이 3백만일 정도로 동학의 교세가 컸다. 그때 동학인 손병희가 당시 거름 오천원을 이승훈한테 주었다. 동학에서 그 돈을 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독교는 부채를 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2019년에는 이 부채를 갚는 무엇인가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은 일명 ‘통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모든 종교인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역사가 있었던 만큼 그 빚을 100년 후인 2019년 기독교가 통일운동으로 갚아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2019년까지 잘 가야 한다. 

6. 제자들이었던 학생들과 이 땅의 많은 신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신학을 공부한지 42년, 가르친 지 30년이 됐다. 화가 나는 것은 신학이 이렇게 힘이 없나? 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신학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교회에서 신학을 불필요한 것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처럼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어지는 것도 어렵고, 신학 안에서도 자기들만의 밥벌이 하는 언어가 돼버렸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번 감신대 학내 사태를 겪으며, 학생들은 소위 성공했다는 학교 이사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는 과정 중에 이사들이 약속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법을 사면서까지 거짓말하는 행태를 보자, 학생들이 “목사님 우리들에게 거짓말하는 그 입으로 어떻게 교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으세요? 성공한 목사들은 다 이렇습니까?”라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말을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평생 그것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말숨’을 잃어버렸다. 거짓말하는 우리가 되었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위한 말, 밥 먹고 살기 위한 말을 해버렸고, 세상과 교회가 싫어하는 쓸데없는 말을 해왔다.

말로서 세상을 흔들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말에 힘이 있어야 한다. 말에 힘이 있으려면 그 말에 우리의 삶이 실려야 한다. 우리가 전문가인 것을 어떻게 인정해 주느냐는 내가 신학을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전문가가 되는 것이고, 내말에 힘이 있는 것이다. 말에 힘이 실리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래야 기독교가 산다.

박준호 기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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