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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행복<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 예함의집) | 승인 2016.03.15 10:47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서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15.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마19:13-15; 새번역)

Then some children were brought to Him so that He might lay His hands on them and pray; and the disciples rebuked them. 14.But Jesus said, "Let the children alone, and do not hinder them from coming to Me; f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such as these." 15.After laying His hands on them, He departed from there.(Matthew19:13-15; NASB)

(1)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책인데요. 두 가지 사관史觀이 공존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왕조사관과 민중사관이 그것입니다.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 편에 서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면, 왕의 권력 밑에서 고통을 당하는 민중 편에 서서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예언자이지요.  

기원전 1000년 경, 초기 이스라엘지파 동맹(amphyktionie)이 쇠퇴하고 다윗 군주국가로 이행되면서 이스라엘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금으로 양분화 되지요. 왕을 중심으로 군인, 행정관료, 고위 성직자들이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면, 그들 밑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민중이 피지배계급을 이루고 있었지요.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제사장들이 대변하고 있었다면, 피압박 민중의 편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 종교집단이 있었는데요. 예언자들은 권력층을 향해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하였고, 민중을 향해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를 선포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가 말라기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중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했던(538년) 이후에 등장한 예언자였는데요. 말라기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민중을 괴롭히는 예루살렘성전의 성직자집단에 대해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로 4백 여 년 동안을 신약-구약성경 중간기라고 부르는데요. 이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더 이상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1세기 구약성경 예언자 전통이 세례자 요한으로 이어지는데요. 요한은 유다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며 바람의 아들처럼 살다간 갔어요. 그는 요단강 주변에서 회개운동을 펼쳤는데요. 갈릴리, 유다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까지 그의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회개의 징표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어요.

(2)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왕은 안티파스였는데요. 헤롯의 아들이었던 그는 유대민중이 소요를 일으킬까 우려하여 요한의 회개운동을 원천 봉쇄하기에 이릅니다. 요한을 잡아 처형하지요.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등장하지요.  

루카스 크라나흐 作 <헤롯 안티파스의 놀람>

예언자 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했던 광야의 소리(野聲)가 본문에서 두 마디로 요약되어 있어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닥쳐왔다.”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와 바실레이아(basileia)입니다. ‘메타노이아에테’는 ‘생각을 바꾸라’는 메타노이아의 명령형인데요. 우리 말 성경에는 ‘회개하라’로 번역되었지만, 그리스어에서 직역하면‘한 생각을 바꾸어라.’또는‘돌아서라’가 되지요. 

‘바실레이아’는 우리 말 성경에 ‘나라(nation)’ 또는 ‘왕국(kingdom)’으로 번역되었는데요. ‘통치(reign)’ 또는 ‘주권(sovereignty)’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를 중심으로 한 로마의 제국통치에 대립되는 개념인데요. 자유와 정의를 근간으로 하는 하느님의 직접통치를 일컫는 말이지요.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 곧 모든 인간이 골고루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새 세상’을 일컬어 바실레이아라고 할 수 있지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닥쳐왔다.” 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인데요. 생각(noesis)을 바꾸는 것과 세상(oikumene)을 바꾸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면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위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라고 했는데요.(마6:9-13/눅11:2-4)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점에서 하늘나라나 지상나라는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당신의 뜻에 따라 창조하셨는데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창조질서, 곧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이나 그 분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자연을 통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물을 각기 따로 지으시지 않았어요. 개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창조하고요.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시되, 유기적인 통일체로 지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한 개체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요. 항상 다른 것과 나아가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때로는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연의 마음을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충청도 부여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저녁밥만 먹고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집 뒤에 있는 야트막한 동산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의 별들을 세곤 했습니다.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파노라마를 보면 괜히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내가 별이 되어 떠 있는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기도 했는데요. 아마 나와 별 사이에 서로 감응되는 연결점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헌데, 도시생활을 하면서부터 내 시선은 땅에 갇히고 말았어요. 하늘과 별을 잃고 말았어요.  

직장에서 은퇴하기 1년 전에 나는 히말라야를 3주 동안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요.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하루 종일 달려 밤 12시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은 지쳐 파김치가 된 상태였고요. 고산병으로 두통이 극심하여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침대에 누워있을 수도 없었어요. 간신히 기어서 밖으로 나갔어요. 땅바닥에 들어 누우니 하늘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하늘에 그렇게 많은 별들이 있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해운대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았어요. 히말라야의 밤하늘에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별바다는 실로 장엄함과 신비 그 자체였어요. 내가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행복했습니다. 

(3)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데요. 헌데 막상 무엇이 행복인가 하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지요. 산다는 것은 관계 맺는다는 것인데요. 따라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행복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지요. 

헌데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가요? 행복은 관계개념보다 소유개념이 되었습니다. 질(質)이 아닌 양(量)의 개념이 되었어요. 남과 비교하여 우위를 차지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서 존재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통념적 가치에요. 

왜 사육된 가축은 전염병에 취약할까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이지요. 가공된 사료를 먹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살기 때문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기 전에 자연의 일부이지요. 인간은 자연이고 자연은 인간입니다.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나면 구조적으로 건강할 수 없도록 창조주는 인간의 DNA를 프로그래밍화시켜 놓았어요. 헌데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도시문명은 어떤가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았어요. 생태파괴는 인간이 자기 몸을 자해(自害)하는 행위이지요. 고향을 상실한 인간은 스트레스와 각종 현대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지요. 가공된 인스턴트 음식의 과잉섭취 그리고 운동부족 또한 인간을 병들게 하는 요인이지요. 

물적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소유와 경쟁에서 존재의 우월감을 찾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통념입니다. 이와 같이 현대인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 의해 사육된 좀비와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어요. 인간은 바라고 구하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어요. 이러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금강경에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이 나옵니다.(제5분, <여리실견분>) ‘이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것이 아니다!’를  깨닫는 것인데요. 한 생각을 바꿀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갇혀 평생 동안 추구해왔던 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리의 세계에 눈 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천국이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셨어요.(막1:15)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을 바꾸어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는 것이 메타노이아(metanoia)입니다. 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결코 행복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나 석가모니의 공통된 생각이었어요. 

(4)
행복은 근심걱정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은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느낌으로 나오는데요. 느낌은 현재 상태이지요. 지금 이 순간 기분 좋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상쾌했나요? 행복한 것입니다. 아침밥을 맛있게 드셨나요? 행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니 기분이 좋은가요?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헤아려 보세요. 그리고 “지금 그것 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세요. 삶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일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어요. 손이 없다면, 발이 없다면, 눈이 없다면, 어떨까요? <예함의 집> 요양원이 없다면, 휠체어가 없다면,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없다면, 요리사 선생님이 없다면, 어떨까요? 손발이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예함의 집이 있어서 여러분이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잘 보살펴드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행복은 멀리에서 찾지 마세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어떤가요? 눈이 멀어서 이를 보지 못해요. 내 곁에 보물을 쌓아놓고, 엉뚱한 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늘 불평하고, 남 탓하고, 남과 비교하여 내가 불행하구나,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에 갇혀 살지요. 행복도 내가 만들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남 탓하거나 환경 탓 할 일이 아니지요. 내 탓입니다. 

행복한 사람을 만나보면 어떤가요? 우선 얼굴표정이 밝습니다. 얼굴이 환하고 밝지요. 얼굴에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 웃는가요?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어른들의 경우 평균 하루에 5-6번 웃는다고 해요. 아이들은요? 하루 4백번에서 6백번 정도 웃는다고 해요. 아주 사소한 것을 보아도 감동하고 웃습니다. 

어른들은 왜 웃음이 없나요? 웃을 일이 없어서이지요. 왜 웃을 일이 없나요? 걱정근심이 많아서이지요. 우리가 늘 안고 사는 걱정에 대한 통계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가운데 44%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기나라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요. 그는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생각 때문에 늘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우杞憂’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어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가운데 44%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30%는 지나간 일로 걱정한다고 해요. 과거는 이미 내 손을 떠났습니다. 걱정하고 후회해보았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로 걱정하는 것은 죽은 자식 거시기 만지는 격입니다.    

사소한 일로 걱정하는 경우가 22%라고 해요. 제가 살았던 부산 아파트 옆에 유명한 칼국수 집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데요. 헌데 입구 간판에 ‘안동칼국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인에게 물어보았어요. ‘안동칼국수가 맞지 않은가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어요. ‘아닙니다. 다릅니다.’‘어떻게 다른가요?’‘안동칼국수는 안동밀가루로 만든 것이고요. 안동칼국시는 안동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른가요?’ ‘밀가루는 봉투에 담은 것이고요.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은 것입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른가요?’ ‘봉투는 가게에서 팔고요. 봉다리는 점방에서 팔지요.’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살면서 이와 같이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부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얼굴 붉히는 일들이 22% 정도 된다고 해요. 

우리가 아무리 걱정해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요. 4% 정도 된다고 해요. 예를 들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내 속으로 난 자식을 바꿀 수 있나요? 없지요. “부모를 바꿀 수 있나요?” 없습니다. 제 키가 160cm인데요. 키는 바꿀 수 없지만, 키에 대한 생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제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신장이 180cm되는 사람이 큰 것이지요. 걱정한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지요.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종류이든, 걱정근심은 그 자체가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지요.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을 갖고 사서 걱정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모든 걱정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걱정근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데 행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지요. 제게는 행복을 얻는 좌우명이 있어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꾼다.” “할 수 없는 일은 하려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인생은 주어지는 대로 살고, 일은 계획을 세워 한다.”    

(5)
하루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께 왔어요. 손을 얹고 기도해주기를 바래서였지요.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어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데요. 어른에 비해서 어린아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잘 웃는다는 것이지요. 어른들의 경우 하루 평균 5,6번 웃을까 말까 하는데요. 어린아이들은 5,6백번 웃는다고 해요. 웃음이 하늘나라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많이 웃는 사람은 그만큼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음과 행복은 비례합니다. 행복하려면 웃어야 하고요. 많이 웃기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이는 모두 두 자리 숫자일 것입니다. 앞에 있는 숫자를 떼어 내보세요. 몇 살이 되나요? 65살이면, 다섯 살이 되지요. 그러면 웃을 일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해질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작은 일에 쉽게 감탄합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감탄은 줄어들고 한탄이 늘어나게 되어 있어요. 다섯 살 된 기분으로 살면, 세상 걱정으로 무거워진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바보 가운데는 암환자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이 헐렁해져서 스트레스를 안 받기 때문이지요. 성격이 완벽한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됩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성인병에 노출될 확률이 높지요. 

얼굴은 얼이 사는 집이라는 뜻인데요. 얼이 무엇인가? 혼, 정신입니다.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표정이 밝고 잘 웃지요. 매사에 긍정적이지요. 마음이 걱정근심에 싸여있으면 표정이 어둡지요.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제 웃나요? 웃겨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지요. 헌데 웃음을 하나의 운동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억지로 웃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지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하듯이, 웃음 운동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그냥 사랑하듯이, 그냥 웃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웃을 때는 크게, 길게, 배로 웃어야 합니다. 심폐기능이 강화되고요. 장(腸) 운동이 활발해집니다. 자주 웃으면 체온이 1도 이상 올라가고요. 면역력이 다섯 배 정도 증가한다고 해요. 걱정 근심을 털어버리는 데는 웃음이 효과적입니다. 우울증에 웃음은 특효약입니다.   

사람의 대뇌는 진짜웃음과 억지웃음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해요. 레몬을 머릿속에 떠 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이듯이, 억지로라도 웃으면 대뇌는 몸에 유익한 호르몬을 분비한다고 합니다. 행복하면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생활화하면 행복하게 됩니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웃음은 보약입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웃음은 특효약이지요. 웃음의 생활화 운동을 통해서 걱정근심에서 해방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 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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