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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가? : 알파고의 등장과 원영이의 죽음<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18> : 『논어17권』양화편
이은선 | 승인 2016.03.17 12:56

<명구>「陽貨篇 21」: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塊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양화편 21」: 재아문 삼년지상 기이구의. 군자삼년불위례 예필괴 삼년불위락 악필붕.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자왈 식부도 의부금 어여안호. 왈 안. 여안즉위지. 부군자지거상 식지불감 문악불락 거처불안 고불위야. 금여안즉위지. 재아출 자왈 여지불인야. 자생삼년 연후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상야. 여야유삼년지애어기부모호.

<해석> 재아가 (3년 상喪에 대해서) 여쭈었다. “3년 상은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禮)를 차리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3년 동안 악(樂)을 다루지 않으면 악은 반드시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1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새 곡식이 나오고, 불씨 만드는 나무도 철마다 바꾸는데 1년 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길, “(3년이 되기 전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어도 네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대답하기를, “편안합니다.”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해라. 대개 군자는 상 중에는 좋은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집에 거처해도 편안하지 않다. 지금 너는 편안하다니 그렇게 해라.” 재아가 나가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재아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사람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겨우 벗어난다. 그래서 3년 상을 지내는 것은 천하에 통하는 것이다. 재아도 자기 부모에게서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겠느냐?”

<성찰> 지난 번 「계씨편」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성인(成人)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항상 잊지 말고, 그치지 말고 행해야 하는 ‘9가지의 생각(九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양화편」에서는 그러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과연 인간다운(仁) 공동체, 기계나 동물의 세계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 인간적 함께 함의 세상이 어떤 토대와 근거 위에서 가능해진다고 보시는지에 대한 공자의 말을 듣고자 한다. 

이 편의 제목이 된 양화(陽貨)는 계씨의 가신(家臣)이었지만 반란을 일으켰고, 7절에 나오는 진(晉)나라의 필힐(佛肹)도 역시 불의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공자가 이들의 초청에도 응하려 하자 제자들과 옥신각신 한다. 공자는 당시의 난세에 자신의 길이 계속 외면되자 스스로를  마치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기만 하고 쓰임(먹힘)을 받지 못하는(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모양새로 비유하면서 그 처지를 한없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번에 표제문으로 택한 21절에 나오는 재아(宰我, B. C.515-?)는 공자의 제자로서 구변이 좋고 말솜씨가 있었다고 한다. <논어> 5권「공야편」에서는 낮잠을 자다가 그 게으름을 꾸중받기도 한다. 그런 재아가 공자에게 부모가 돌아가신 후 치르는 3년 상을 1년 상으로 고쳐야 한다고 건의한다. 3년은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대는데, 그 3년 동안 군자가 예악(禮樂)을 돌보지 않는다면, 즉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직업현장에서 떠나있거나, 기독교 목회자의 경우로 말하면 목회의 일을 사직하거나 휴직을 하고 물러나 있으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공자는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최소한 3년간은 보듬고 돌보아야 그가 겨우 부모 품을 떠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그렇게 우리도 부모에게 온전히 3년을 드리는 것은 마땅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신다. 그러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제자를 두고 “불인(不仁)하다”, 즉 ‘인간답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그런 “재아도 자기 부모한테서 3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겠느냐?”, 또는 “(그런데) 재아는 자기 부모한테서 3년 동안 사랑을 받은 것일까?(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포함된 의미도 많이 달라질 것이지만, 결국 우리 인간성의 출발에 대한 물음이다. 

최근 인류 사회는 그 경우수가 무한대에 가깝다는 바둑 세계랭킹 1위인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Alpha Go)와의 대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연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무엇인지, 인간의 고유성이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오히려 이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과 염려에 찬 질문들이 들끓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으로부터 2천5백여 년 전에 살았던 공자의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에게도 ‘인간답다(仁)’, 인간이란 무엇인가(人文) 라는 질문이 가장 핵심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3년 상은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지금은 3년은커녕 1년, 아니면 49일, 또는 5일이나 3일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상황도 속출한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보고자 한다. 우리가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시간과 관련해서이다. 요사이 우리는 부모가 연로해서 병이 들면, 특히 치매나 노인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병을 앓게 되면 그 부모를 가정 밖의 노인요양소로 보내는 일을 낯설지 보지 않는다. 또한 출산율 최저의 나라라는 지적을 듣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거의 태어나자마자 집밖의 공공 육아기관으로 보내진다. 공자의 말씀대로 하면 참으로 비인간적이고 불인한(不仁) 상황인데, 이것을 타개할 근거로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 또한 단지 시대착오적이거나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오늘날 소위 서구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그와 유사한 일을 이제 국가복지의 차원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면 적어도 그 부모 중 한 사람이 최소한 3년간은 유급으로 육아휴가를 받을 수 있게 하고,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나 또는 경력의 관리라는 명목으로 인간으로서 정말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오늘 우리 사회처럼 아이를 그렇게 일찌감치 집밖으로 떼어놓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국가와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여기에 더해서 전통적으로 孝의 나라라는 칭호대로 자신의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을 위해서 누구나 적어도 3년간은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그 일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외롭지 않게, 뼛속까지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가족의 손으로 친히 돌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우리 인간으로서의 마음과 성품이 훨씬 더 순화되고 고양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의 처지는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돌보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집밖으로 내어줄 때만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이제 보통사람들이 이 인간적인 일을 거의 손에서 놓고 사는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복지수준이다. 이런 나라에서 7살 원영이의 죽음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태어나서 적어도 3년간은 가까운 삶의 반경에서 긴밀하고 친절한 인간적인 보살핌과 배려를 받으면서 자라고, 몸으로서의 이 세상을 마감하는 시간에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에 의해서 애틋하고 정성어린 돌봄과 마중을 경험하는 일, 나는 이 일을 공자가 말한 부모 3년 상과 태어난 후 3년간의 부모 양육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인간적인 일들을  다시 회복할 때 지금 인공지능 ‘알파고(Alpha Go)’의 등장으로 우리 인류에게 매우 예민하게 다가오는 기계와의 건강한 공존이라는 거센 파도를 보다 용이하게 탈 수 있다고 여긴다. 

사실 우연히도 이번 편에 공자가 바둑과 장기 두는 일에 대해 언급한 언술이 나온다. 그는 말하기를, “온종일 배불리 먹고서 마음 쓸 곳이 없다면 딱한 일이다. 장기나 바둑이란 게 있지 않느냐? 그것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했다. 즉 공자에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일은 인간이 우선적으로 관심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차선의 일이고, 머리로 집중하여 계산하는 능력이나 추론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은 그에 따르면 인간 고유의 본분이 아니다. 

이 장에 공자의 유명한 말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서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라는 말이 나온다. 오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두고 사람들은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이라고 하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자연적(性) 인간’과 ‘도구적(習) 인간’의 경쟁이라는 말이 더 맞다. 즉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보완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구(바퀴, 증기기관차, 전기, 컴퓨터 등)를 만들어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확장해 온  것처럼, 그렇게 알파고의 등장은 새로운 기계와 습관(習)의 등장이고, 그래서 그 면에서 알파고가 이세돌(性)을 이기는 것은 결코 의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의 3년 상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을 본성을 기르는 일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본성은 인간 모두가 고루 담지하고 있는 인간성의 “씨앗(仁)”이고, “종자(穀種)”이다. 기계지능 알파고가 단지 과거의 지나간 것만을 통해서 존재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지만, 인간은 바로 그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no'할 수 있는 자기희생과 내어줌의 존재일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넘어서 상대와 함께 할 수 있는 연민과 책임의 존재이며, 앞으로의 새로운 경우수를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도로 확장할 수 있는 미래의 창조적 존재이다. 이세돌이 이번에 한 판을 이긴 것도 나는 이러한 인간 능력에 대한 집중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인내, 온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응원을 겸허히 받는 마음, 그리고 다시 자신의 현재를 뛰어넘는 놀라운 직관력과 창조력 등이다.

우리는 항상 인간이었고, 또한 항상 ‘초인간(transhuman)’이었다. 이 두 가지 경지의 통섭이 인간 규정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류의 대표주자로서 이번에 이 일을 뛰어나게 보여준 이세돌 구단,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우리 곁에 있으면서도 온갖 학대와 폭력으로 죽어간 원영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공동 삶의 미래를 채워갈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고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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