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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3) - 계속되는 함석헌의 『사상계』 예찬<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3.18 15:38

함석헌에 의하면 <사상계>는 4.19의 첫 불씨였고 장준하에 의하면 함석헌은 그 불씨를 일으키는데 첫 사람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4.19의 해석자’였다. <사상계>는 다른 잡지사나 신문들이 갖지 못한 일류 필진들을 갖추고 있었다. 탄탄한 학문에 꼿꼿한 기상, 어떤 통치체제에도 두려움 없이 맞서는 용기와 논리들은 실로 주변의 거의 모든 단체들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참 값비싼 <사상계>만의 자산이었다. 그 필진들 역시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들이 일신을 이루어 자유주의, 민주주의, 인간의 권리를 주창하는 시민대열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전 3.1 운동으로부터의 영향과 또 하나 <사상계>라는 교두보(橋頭堡)를 통해서였다. 함석헌은 <사상계>를 “거의 단 하나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하나같이 감히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이었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일명 ‘사상계 세대(思想界 世代)’ 들에겐 함석헌과 장준하가 새 역사, 특히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신장(伸張)을 위한 투쟁의 전우로 생사를 불문하는 생애를 살았다는 데 전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이승만의 독재정치, 박정희의 군부폭압통치에의 저항에 저들은 마치 쌍둥이처럼 붙어 엉켜 싸웠다. 

장준하가 함석헌을 만난 것, 함석헌이 장준하를 만난 것, 그것은 감히 하나님의 중제에 의해서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그렇듯 죽음 말고는 풀 수 없도록 묶어낸 것이 곧 4.19와 5.16이었다. 4.19는 저들을 함께 감사하며 춤추는 관계로, 5.16은 함께 분노하며 묶이면서, 갇히면서, 저항하는 관계로 세웠다. 고난과 영광의 현장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이야 말로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 그랬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실로 행복의 세월을 함께 살았다. 

함석헌의 말을 빈다면 함석헌 자신의 ‘자신 됨’의 상당부분이 <사상계>를 통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교수와 학생세대를 망라해 “4.19의 세력”을 키워낸 상당부분의 공로가 <사상계>에 있었다고 역설한다. “그것(4.19 세력, 필자 주)이 <사상계>라는 거의 단 하나의 길을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함석헌 전집17, 116쪽, 「4.19와 5.16」 한길사).

함석헌의 사상계에 대한 애정과 평가는 거의 예찬(禮讚)에 가까웠다. 특히 5.16 이후 박정희군인정치(朴正熙軍人政治) 15년여는 더욱 그랬다. <사상계>를 4.19의 모태로 보는 함석헌 에겐 이후 두 가지 소명이 주어진다. <사상계>를 지켜내는 일이 하나, 다른 하나가 “4.19의 의미”를 해석해 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5.16 군사 쿠데타의 수괴 박정희(朴正熙)와 그 아류(亞流)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사정권에의 저항으로 나타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그의 사당(私黨) 자유당이 무너지고,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주도 아래 7.29(1960) 총선을 통해 분명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들어선 장면(張勉) 정권은 그 출범 불과 10개월, 한국사 통한의 박정희 군사 반란으로 역사적인 비극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함석헌 장준하에겐 현상을 장악한 괴악한 무리들로부터 ‘당하는 온갖 비난들’을 마치 ‘하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수(甘受) 해온 그들에게 내린 은총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5.16 군사 반란이 함석헌에겐 “하늘의 은총”같은 것이었다고 하는가는 다음 장 「박정희의 군사 폭동 5.16」에서 말하기로 하고, 먼저 ‘혁명’으로서의 ‘4.19’를 부정하려하는 (사실에 있어서는 부정한) 박정희(朴正熙)의 군사정치권을 향한 함석헌의 항변(抗辯)을 듣기로 하자. 

4.19는 혁명이다

박정희는 역사에 번번이 반역하는 자였다. 맨손, 맨몸, 맨 맘으로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고 대민주국가(大民主國家)를 기필코 성취해닌 ‘혁명 4.19’를 박정희는 기어이 ‘의거’라 한다. 첫 번째 역사의 반역이다. 거꾸로 시민이, 인민이 (국민=國의民이 아닌), 하늘 가슴의 민중이 이루어 놓은 민주정부를 탱크로, 군화발로, 총칼로 전복한 천지불용(天地不容)의 범죄를 그는 혁명이라고 고집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역사의 반역이다. 
함석헌의 항변을 들어보라!

4.19혁명 당시

“4.19는 혁명이다. 4.19일, 그날 수유리에 갔더니 거기 큰 글자로 ‘4.19의거희생자추념’이라고 써 걸어 놓았다. 열세 돌이 되는(1973년 유신통치가 시작되는 해, 필자 주) 오늘까지 평소에 공(公)으로나, 사(私)로나 우리가 말할 때면 누구나 ‘4.19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이 공식적으로 기념식을 하는 오늘 이 자리에는 그렇게(의거라고) 써 붙였을까? 몰라서 그랬을까? 잊어버려서 그랬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모를 리가 없고 잊었을 리가 없다. 본래 첫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4.19를 어떻게 이름 할 것인가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정변이냐, 혁명이냐 하는.

역사에서는 그 사건자체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지나 간 후 그것을 어떻게 규정짓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거기에 역사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 동안 논란이 있은 후 혁명이라는데 낙찰이 됐다. 생각해보라. 4.19를 어떻게 혁명이라 아니할 수 있는가? 

욕심, 고집, 무쇠같이 속이는 탈을 쓰고 몰록(히브리어로 멜렉, 왕을 뜻함. 주로 어린아이들을 산체로 제물로 바쳤음-필자 주)처럼 버티고 서서 씨알의 피와 땀을 영원히 마시려던 독재자를 혼비백산하여 스스로 물러나 태평양 바다 속 외로운 섬에 울다 죽게 하였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네게 이성이 있느냐? 소인의 무리, 간사하고 악독한 당파, 지식, 기술을 악용하여 우상을 가운데 세워놓고 나라의 것을 도둑질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자던 자유당, 그 자유당을 단숨에 밀어 바위에 부딪히는 눈덩이처럼 부서져 거품으로 꺼져 버리게 하였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네게 양심이 있느냐? 마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들에게로, 대학생들에게서 교수들에게로, 교수들에게서 전 민중에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개인이 없어지고 한 덩어리가 되어 노한 바다처럼 뒤흔들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그렇지 않았다면 총탄을 쓰다 말고 항복했겠는가?
전체 민중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래 그 권력구조가 무너졌겠는가? 
무너진 후에 남은 것이 있었던가?
죄악의 세력이 밑동에서부터 꺾이지 않았나?
그런데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전 민중이 노했고, 일어났고, 이겼고, 기뻐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라면 그럼 도대체 혁명이란 어떤 것이냐?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면서도 역사적 민족의 대접을 못 받고, 중교, 도덕, 예술의 빛나는 문화를 창조했으면서도 문화 민족의 명예를 누리지 못하던 우리로 하여금 세계만방 앞에 우리도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분개할 줄 알고,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인 것을 증명하게 하여 전 날의 실패와 상처를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세계를 향해 어엿한 얼굴을 들 수 있게 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 학생 운동에 까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4.19인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라는 말이냐?
아, 이렇게 분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의거? 그렇다. 의거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스스로 그 역사를 밝히는 공인된 술어가 있지 않느냐? 폭동인가, 정변인가, 내란인가, 그렇지 않으면 혁명인가? 옛날 제(齊)나라에 최저라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 했을 때 그 사건을 ‘최저시기군(崔杵弑基君)’이라 직필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바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의 사관(史官)의 목숨 끊어져야 했던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글자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밝아지냐 흐려지냐가 문제다. 그것으로 씨알정신이 올라가는가, 내려가는가의 문제다. 

희생자라니? 그런 말을 어디에 쓰느냐? 죽음을 당했으니 희생자임이 틀림이 없으나 죽음이 어디 다 같은 죽음이냐? 밖엣 사람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적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어찌 밖엣 사람이며, 추념식을 하는데 그것이 어찌 사실 보고냐? 불쌍하다 생각해 그랬느냐? 네 마음 참 착하구나!

우리는 그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영으로 우리 속에 모신다. 그 이들은 산 씨알 속에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그 이들을 죽은 자로 대접했을 때 이 씨알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또 그만이냐? 이것은(혁명이 아닌 의거라 한 것 - 필자 주) 도리를 무시한 것이다. 하늘도, 진리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들어라. 4.19는 혁명이다.”

함석헌의 4.19 혁명론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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