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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4)<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3.25 10:35

4.19는 혁명이다

...“4.19는 개인이 없다. 첨부터 전체다. 전체 그 자체가 일으켰고, 전체 그 자체가 내밀었고, 전체 그 자체가 승리했다. 거기 나섰던 그 개인 개인에는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탑을 세워 기념하는 것은 그 개인의 공적을 나타내자는 것만이 아니다. 전체의 생명을 우리 속에 살려내기 위해서이다. 그 전체생명(4.19 영령들의, 필자 주)에 들지 못하면 모든 기념행사가 다 무의미 하다. 하물며 하나의 희생자를 대접을 함으로 알까? 다시 말한다.

4.19에 영웅주의는 없었다. 권력주의는 그 냄새조차 없다. 그러니, 영웅이 되려다 못됐다면, 또 혹은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 장군하나 되려면 만 명이나 졸병이 죽어 마른 뼈다귀가 되어야 한다고, 남 권력 잡는 일에 나갔다가 불행히 죽어버린 것이라면 참말 희생자겠지만 그런 지저분한 것 하나 없는 이 거룩한 사건에는 희생자라는 말은 도리어 모욕이다. 모욕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죽이는 행동이다.

기억하라, 4월은 부활의 달이란다.
4.19는 혁명이다!
4.19는 혁명이다!
천하의 씨알아, 씨알은 아니 죽는다. 죽을 수 없는 것이 씨알이다.
씨알아, 한 목소리로 외치자.
4.19는 혁명이다.
4.19는 영원한 씨알의 숨이다.
4.19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함석헌전집원본 17, p118-121, 1984 한길사)

함석헌에 의하면 4.19는 그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사건이었고, 위대한 역사의 구현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이 같은 위대한 역사를 살육하는 반민배(班民輩)들의 광란이 온다. 저 박정희(朴正熙)의 5.16이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5.16은 4.19를 살육한 것이다. 이 4.19의 살육집단인 <박정희의 5.16>에 대해선 <4.19와 제2공화국>이후에 말하기로 하자. 4.19는 한국사에 뿐만 아니라 세계민주사(世界民主史)에 영원히 기틀 금자탑이었다. 네 피를 흘리게 한 것이 아니라 내피, 스스로의 피를 흘림으로서,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죽자’함으로 그 독재정권을 제거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거룩한 제물(祭物)의 결과였다. 

의(義)의 피는 낡은 것들을 쓸어내는 신비한 힘을 들어낸다. 4월 18일 종로5가에서 데모를 마치고 돌아가는 거리에서 속칭 정치깡패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유혈사태가 발생하는데, 이 사태는 결정적인 4.19의 화근이 된다. 그래서 의의 피는 신비하다는 것이다. 이 정치폭력배들의 기습, 그래서 비쳐진 유혈사태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4.19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승만 정권은 그런대로 다시 버티어 갔을 것이다. 185명의 학생, 시민이 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에 총살되고, 1200여명의 시민, 학생이 중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가는가 하면 적고 큰 부상자가 5000여명,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사태가 가라앉는 듯 했었으니...

사진출처 : 정보공개센터

그런데 아니었다. 청와대 (당시 경무대) 앞의, 을지로 입구 내무부 앞의 그 총격, 총살 사건이 난지 정확하게 일주일 4월 25일, 다시 독재정권의 총칼에 항의하는 의외의 데모대(隊)가 종로통에 나타났다. 

정확히 258명의 각 대학에서 모여든 소위 ‘교수단’이었다. 교수단원들의 플랜카드가 물결쳤다. 그 플랜카드에 이승만의 철(鐵)의 정권으로도, 계엄군의 총검, 군화발로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대명>이 흐르고 있었다. 그 <역사의 대명>은 딱 한마디, 학생들이 흘린 피를 보답하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

다음날 4월 26일, 그것은 실로 놀라울 일이었다. 국민 학생들, 중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밀려나와 파도를 이루었다. 인파(人波)라 했든가?! 이제는 이승만도 별수가 없어졌다. 정권의 가장 확실한 보루로 확신했던 계엄군의 품(品)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놀라울 손, 그것은 이미 이승만의 사병이 아니었으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의식리에 무의식리에 이미 질식해가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해내는 천군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집단이 쳐 놓은 겹겹의 철선이 확실하게 잘려나갔다. 

이기붕의 사가(私家)가 시위대들에 둘러싸이면서 크고 작은 살림살이들이 들어내쳐지고, 이기붕은 그의 집을 빠져나가 포천지역주둔의 한 부대장에게 그의 신변보호를 요청했으나 단호한 거부를 당해야 했다. 어제까지의 세상이 이미 아니었다. 역사가 그 일보를 더하고 있었지만 이기붕은 미쳐 이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군부대를 다시 되돌아 나온 이기붕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역사는 그렇듯 매정하고 공정했다. 역사는 그를 죄의 본산으로 몰아넣었다. 그곳이 바로 경무대(景武臺)였다.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했던가?!
권력에 맛 들린 자에게 있어 그 권력은 생명보다 질긴 것이라 했는가!
이승만은 이런 와중에서도 계속 집권의 야욕에 그대로 취해있었다. 그것이 ‘재앙의 도(度)를 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권력에 미친 그가 알 수 있었겠는가?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승만은 난국수습(?)을 위해 외무부장관으로 허정(許政)을 불러들였고, 자신을 포함하는 정부통령선출의 3.15선거 자체의 무효화를 발표했지만 그것은 실로 일보 일보를 향해 진행하는 역사에의 무지의 소치였다. 계엄령도, 이기붕의 부대통령 당선자사임도, 3.15선거의 무효화도 이승만의 정권 보호에 전혀 무력한 것이었다. 이승만으로서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었다. 정권을 완전히 내어놓고 청와대를 떠난다 해도 그게 결코 길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이기붕의 전 가족이 지금 경무대에 들어 와있다. 정직히 말하면 피신해있는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와 이기붕 가족 (사진출처 : e-영상역사관)

이기붕이 지금 경무대에 들어 와있다는 것도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의 중압이 되고 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으로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의 판을 만들어 자신의 정권을 강화 유지케 하고, 중임제헌을 철폐, 영구집권의 판을 만들어 내던 때의 그렇게 고맙고 사랑스럽던(?) 그가 이렇게 부담스런 짐이 될 줄은 몰랐었다! 

미 대사관으로 부터 태도도 순식간에 달라지고 있었다. “정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성명(下野聲明)을 발표한다. 대학교수들의 가두시위 다음날이었다. 이승만의 하야, 자유당정권의 붕괴(崩壞)는 다시 한 번 위대한 역사의 증언을 확인시켜주고 갔다. 역사의 주인은 인민(人民, 국민이 아닌)이라는 것.

씨알(함석헌은 ‘민중’을 ‘씨알’이라 불렀다. 필자 주)을 통치하려 하는 권력은 예외 없이 민중철퇴에 의해 축출된다는 것. 참 정치는 민중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요,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민(民)을 주(主)라 하는 것임을...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한 수 시간 후 경무대 안에서는 또 하나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연발의 총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양자가 되어있던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李康石)이 쏘아대는 권총소리였다. 아버지, 어머니, 사내 동생을 총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집단 자살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와 망명, 거기서 죽었다. 4.19혁명에 의해서였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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