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 [머리말]

그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이렇게 설교집을 내자니 망설여집니다. 목사로서 설교해 온 지 20년이 되었지만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간절한 맘으로 준비했던 글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성경말씀이 제 맘에 맺혀놓은 작은 열매를 내놓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낙산교회를 담임한 기간에 했던 설교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고통스런 경험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들이 몇 차례 좌절되면서 깊은 낭패감을 맛보았고, 사회적으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가중 되어 가는 것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끝없이 추락하며 신앙의 거처를 잃은 듯이 보였습니다. 어두운 제 맘에 말씀의 빛이 비치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목사에게 설교준비는 힘든 작업입니다. 그 힘듦은 다른 무엇보다도 물음의 진실과 들음의 깊이를 최대한 밀고가야 하는 영혼의 고투에서 생겨납니다. 저의 경우에는,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며 최초의 메시지가 영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원문과 한글번역을 하나씩 대조해가며 다시 읽고, 주석서를 참고하여 메시지의 의미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 관점으로 쓴 글들을 읽으며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을 찾습니다. 이때 저는 [말씀의 향연,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를 사용했습니다. 12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한 본문을 4가지 다른 각도(신학, 목회, 주석, 설교)에서 조명해 줍니다.

위와 같은 준비과정은 우선 본문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을 관통하는 한 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입니다. 이 물음을 뒤집으면, ‘나는 무슨 관심을 갖고 성경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가?’라는 자기성찰적 질문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참된 증언’을 하려는 설교자의 갈증이 빚어낸 문제제기입니다. 최종적으로 설교는 이 문제제기에 대한 답으로서, 성경의 증언과 오늘의 상황을 잇는 말로 태어납니다.
설교자마다 처한 신앙공동체의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설교는 고유한 목소리를 갖습니다. 그런데 어떤 설교는 성경에 대한 오독과 변질된 해석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단지 기도와 묵상의 부족 때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신학의 부족이자, 사상의 나태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문자적 충실이 도리어 신학의 부재를 낳고, 청중의 욕망에 대한 충실이 사상의 나태를 용인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신학을 업으로 여기며 살아온 저의 학문적 편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의 전통이 다양한 만큼 설교의 메시지 또한 다양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전통 속에서 믿음의 긍지를 세우고, 그것을 키워가면서 세상을 향해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19살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기장’의 정신을 배우고 그 우물에서 솟는 생수를 마시며 자라났습니다. 따라서 저의 설교에는 기장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기장의 정신은 기독교인으로서의 긍지를 세울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길이었습니다.

제 신학의 집은 기장 정신이 깎아놓은 네 기둥이 떠받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믿음의 길을 내려는 장공 김재준의 개척정신입니다. 둘째는 역사와 민족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지르는 늦봄 문익환의 현실참여의 삶입니다. 셋째는 민중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민중의 곁을 지킴으로써 신앙의 진실을 밝히려는 심원 안병무의 민중신학입니다. 넷째는 한국의 다종교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 복음의 대승적 면모를 밝힌 숨밭 김경재의 포용적 영성입니다. 제 부끄러움은 이 가르침들을 따라 더욱 치열하게 살지 못한 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바닥에서부터 다시 복음의 참된 씨를 뿌려야 할 상황입니다. 저는 기장의 정신이 이 위기적 상황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 책을 내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책을 낼 계획은 없었습니다. 설교를 충실히 준비하자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매주일 설교를 팟캐스트로 내보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몇몇 분들은 그 방송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방송을 듣는 분 가운데 저와는 30년 지기 선배가 있습니다. 그는 문학도로서 한국교회의 비지성적, 반역사적 행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기장의 정신은 존중했습니다. 그가 이 책의 출판비용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사랑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출판을 준비하며 추천사를 부탁하기 위해 은사이신 박근원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격려해주시며, 앞으로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읽기 순서대로 설교집을 더 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큰 과제가 생겼습니다. 설교를 위해 참고 자료로 삼은 [말씀의 향연]이 ‘세계교회 공동 주일성서일과’(Revised Common Lectionary)에 따른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책을 읽는 동안 비슷한 꿈을 꾸었습니다. 말씀이 제 안에서 풍성하게 무르익도록 더욱 정진해야겠습니다.

이 글을 두어자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최윤태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두어 자’의 성경구절을 설교자가 안고 씨름하듯이, 이 글이 책벌레 두어자(蠹魚子)들에게 읽힐만한 가치가 있다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김희헌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