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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정치적 도착”(the political perversion of Korean Church)를 시작하며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교회개혁 담론투쟁 연재
박일준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 승인 2016.04.07 13:37

신학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반-정치적(anti-political)이다. 정치라는 것이 기존 제도의 틀 안에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이라면 신학은 정치에 기여한다. 하지만 신학의 정치에의 기여는 법 질서를 통해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의 기여는 갈등을 증폭하고 조장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배제되고 억압된 자들의 목소리를 편들기 때문이다. 신학은 갈등의 해결(solution)이 아니라, 해소(dissolution)을 도모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존 사유의 틀을 너머 새로운 사유를 도입할 것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들이 억압당하는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기존의 구조와 제도가 그들을 소수자(minority)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새로운 사유방식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신학은 언제나 ‘반-정치적’이다. 기존의 틀 안에서 해결방식을 도모하기 보다는 기존의 사유 방식의 틀 자체를 전복하여 갈등의 해소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하며, 형제님이라 불렀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하며 형제님과 자매님이라 불렀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예배하며 형제자매라 불렀다. 이는 당대 로마의 기존 질서 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 앞에서 귀족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모두 소중한 하나의 영혼임을 확신한다. 루터는 면죄부가 틀렸다고 외쳤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도가 나의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결국 기존 권력 질서 안에서 인맥과 재력이 풍성한 이에게 유리한 사회적 구조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더 유리할 수가 없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단독자(individual)일 수 밖에 없다. 신학이 말하는 정치는 바로 이 원칙을 고수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면죄부를 통해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 사회적인 생각의 틀을 뒤집어야 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란 사회 내 종교적 구조나 질서를 개혁하는 운동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체 사회 아니 전체 세계를 조망하는 사유의 틀 자체를 전복하는 운동이었다.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은 결코 이 생각을 무력으로 강요함으로써 시작되지 않았다. 운동이 확산되면서, 권력에 의존한 것은 맞지만, 애초 그것이 운동으로 결집되어갈때에는 적어도 권력의 힘을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태를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the powerless)의 눈으로 보려는 공감(empathy)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는 신학의 정치적 기여를 도착(perversion)으로 만들고 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이의 눈으로 사태와 세상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부하며 기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국가조찬기도회에 나가 대한민국의 권력자에게 보여주는 아첨, “세계 여성 정치인들 육중한 몸매인데 우리 대통령은 여성으로서 미를 ....”로 이어지는 미사여구는 도착된 정치적 아첨이지, 결코 신학의 정치적 발언이 아니었다. 그날 설교 제목이 “통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교회”였단다. 왜 한국 교회는 권력에 이토록 취약한(vulnerable) 조직으로 변질되고 말았는가? 이는 잘못된 물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착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교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라는 생각 그 자체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 국가조찬기도회 자리에 전혀 함께 하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렇게 권력-친화적인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가 그렇게 정치적 도착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회와 신학의 정치성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눈으로 사건과 세계를 바라보고,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대표해 주는 것도 정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교회의 정치성은 신학 본연의 정치가 아니라 그 정치성이 도착된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다. 종북세력 척결을 위해 결집하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정녕 기독교인들일 수 있을 것인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을 ‘종북’ ‘마귀’ ‘사탄’으로 악마화하고, 그들을 척결하자는 이들과 한국 교회가 함께 발맞추어가는 일이 정녕 정상은 아니다. 자신과 성적 지향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악마화시키는 일은 결코 기독교적인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도착된 정치가 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권력으로부터 억압받는 자들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품고 대변하는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정치는 사회적 약자를 짖밟고 억누르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는 정치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도착적’(perverse)인 것이다. 신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는 그들이 강요하는 사고방식을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사고방식에 물음표를 붙이는 방식으로 그들에 맞서야 한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자들을 위한 일이고, 그런 소수자들이 하느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신학적으로 소중하게 성찰하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 대한민국의 소위 보수적 교회라는 조직들은 정치적 우파를 대변하면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편에 서서 나아가는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역사를 일별하며, 여러 가지 진단들이 제시될 것이지만, 그런 제안들을 돌아보는 것이 본 연재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본 연재는 한국교회의 도착된 정치성을 본래적 정치성으로 회복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하나의 조직이나 기구는 유기체 기계와 같다. 이는 곧 그 기구가 자아와 주체의 동인들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동인’은 바로 정체성의 형성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적 경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본래부터 거기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 만년 유구한 역사의 단일한 백의민족’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민족주의적으로 단결시켜야 할 정치적 프로그램을 통해 창출된 가상의 개념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 민족은 결코 ‘단일 민족’이 아니다. 그래서 자아의 동인은 주체의 동인과 직각으로 혹은 사선으로 교차한다. 

라캉이 알려주듯, 주체란 언제나 타인의 주체이다. 여기서 타인이란 존재의 심리적 위치는 이중적이다. 나와 다른 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바로 나의 타자이다. 내가 나의 주체적 의지를 확인하고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나를 향한 응시에 내가 반응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대타자라는 이중적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한편으로 주변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대타자, 그래서 우리에게 기존 질서의 규범과 규칙들을 부여하는 대타자가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초월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로서, 각 인간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전적인 타자의 음성과 환상을 접할 때가 있다. 그 타자의 음성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주체는 결코 기존 질서의 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순응할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서 ‘나 이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주체란 자아의 동인들이 형성해 온 정체성의 경계를 침노해 들어오는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주체는, 파스칼의 도박처럼, 의지하고 결단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위해야 할 것에 대한 기존의 정당성(justification)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주체는 자아의 기존의 개념적 경계들을 끊임없이 해체한다. 그 해체 이후 자아의 동인들은 새롭게 정체성의 개념적 경계를 구성해 나아간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바로 이 해체와 재구성의 반복된 운동들이 형성한 무늬(pattern)이었다. 

우리는 신학의 본래적 정치적 무늬를 세울 수 있는가? 지금의 도착된 정치성을 넘어 본연의 정치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본 연재를 통해 이를 묻고 생각해 보고자 한다. 

박일준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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