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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 (6)<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4.08 13:27

한국현대사가(韓國現代史家)들의 과제, 제2공화국과 장준하의 재 이해

반역사적 세력이 현실을 장악했을 때의 사기(史記)는 거짓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장악한 현실을 어떻게 반역자적 이라고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건강한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친 역사적 세력이 현실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親)역사적 세력이란 오직 하나, 민주(民主)세력을 말한다. 민주세력에 의해 현실이 장악될 때만 참 역사는 기록될 수 있고,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민(民)이외에 천상천하의 어떤 세력에도 자신을 맡기는 법이 없다. 그래서 역사의 진화는 민(民), 오직 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유감스럽게도 우리들 대한민국(?)은 ‘민에 의한 현실’을 지녀본 적이 없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래, 70년이 다가오는 이제까지, 우리는 순수한 민(民)의 정부, 민중의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정말 망할 놈의 나라, 이미 망했어야 할 나라다. 

그런데 하늘은 이 망할 놈의 나라를 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이제까지 살려왔다. 그 이유,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유는 오직 하나, “민주주의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민주(民主)주의, 그것은 실로 우리에게 하늘이, 역사가, 뜻이 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과제였다. 민주주의 그것은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라! 그런데 한국 전사(全史)가 그랬지만 이 한국의 현대사야 말로 그 민주주의를 짓밟아온 역사였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이 ‘정치’라는 탈을 쓰고 굴러온 역사(?)였다. 그리고 그 주범의 자리에,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다.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朴正熙)!!

필자가 한국현대사가들의 과제로 <제2공화국과 장준하의 재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의 태초요 종말인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두고서이다.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1500만년의 인류진화사(人類進化史)가 바로 이 민(民)이 라는 것, 그 민이 역사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향해 걷고 뛰고 달려왔다면 과언일까? 민(民)을 다스리고 싶은 자들, 통치하고 싶은 자들은 그럴는지 모른다. 인류사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향해 진화해 왔다 하느냐고. 정치를 통치로 고집하는 것들은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이미 회심이 불가능한 천벌을 받을 것들이니까……. 이승만, 박정희 같은 것들 말이다. 

박정희가 말하는 제2공화국 그리고 장준하 

필자가 앞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칼, 총, 탱크를 가지고 순민정권(舜民政權)을 전복하고 군인통치를 시작한 박정희는 이 순민정권(舜民政權) 제 2공화국을 제거한 이유를 자신들의 소위 <혁명공약> 6개항에서 밝히고 있는데, 우선적으로 북괴의 적화통일 전략에의 대책 전무, 극에 달한 사회적 대혼란, 그리고 만연된 부정부패를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 같은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시급히 해결하고 본연의 자세로 복귀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박정희의 5.16, 5.16의 박정희야 말로 한국(韓國)사상(史上)의 지울 수 없는 천추의 죄악사 바로 그것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것이 무력(武力)행사(行事)였다는 것이다. 민(民)을 향하는 역사의 진화가 지향하는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공존(共存, Co-existence)이라는 것이다. 이 공존이란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도덕적인 제(諸) 종교들이 말하는 자비요, 인(仁)이요, 사랑이요 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종교는 유일신 종교가 아니다. 다름에도 공존하는 종교다. 다름에도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따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종교는 ‘유일’을 고집하지 않는다. 무기, 무력, 무공이란 뭐냐? ‘유일’의 주장이다. 나 같아야 한다. 내가 유일이다. 그래서 나 같지 않을 때, 내 편이 아닐 때 행하게 되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죽이는 것이다. 무력행사의 의도는 오직 하나, 내 말 듣지 않으면, 날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것이다. 1961년 5.16일 새벽, 한강교를 넘은 박정희 일단은 누가 뭐래도 ‘반항하는 자는 죽이라’는 살육부대였다. 5.16은 제2공화국을 살육하고 4.19를 살육했다. 그러나 역사는 불사(不死)성(性)이라, 불 퇴진이라, 반역사적 행위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에게 역사의 사자를 보냈다. 그가 바로 김재규(金載圭)였다. 

둘째, 순민(舜民)정권(政權)을 전복시킨 것이다. 필자는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을 일러 순민(舜民)정권(政權)이라한다. 민주주의란 국가, 혹은 국가 권력과의 사이에서 때로는 유혈의, 때로는 죽음의 투쟁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2공화국의 수립은 달랐다.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정권이었다. 관권의 탄압? 공무원들의 선거 개입? 부정선거? 그런 따위가 도대체 없었다. 그저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투표하고 돌아오는 길, 여기저기서 “내 한잔 살게, 한잔하고 가세 이렇게 좋은 날!”, 이것이 1960년 7월 29일 총선거 날의 모습이었다. 순민(舜民)의 날이 그러했다. 3분의 2의 의석이 순민(舜民)의 정당 민주당에 주어졌다. 국회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정책이 수립되었다. 우선 농촌의 대 진흥, 사회의 대 개발을 이끌어 낼 국토개발(國土開發)안(案), 국가 안보를 위한 반공법, 특히 공직사회의 개혁을 위한 공채제도(公採制度)의 혁신 같은 것들이 그랬다. 

이때, 준비된 사람 장준하(張俊河)가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때 장준하란 가정해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거의 완벽하게 준비 된 사람이었다. 만일 그때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아니었다면 한국현대사에 아주 분명하게 돌출기사로 기록될 정사(政事)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감히 이때의 장준하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장준하, 그는 한반도를 넘어 세계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다”고. 

필자의 이 같은 주장에 혹자는 ‘장준하가 무슨?’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슨 그런 과장이 있나?’할 이도 있을 것이다. 이때가 1961년, 1918년생인 장준하가 40을 갓 넘은 나이였으니, 과언이란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준하가 어떻게 준비되어 왔는가를 몰라 하는 말이다. 장준하가 그 나이에, 혹은 그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비통한 죽음을 당하는 날까지, 국정(國政)장악(掌握)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장준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이들 중엔 “장준하가 대통령을?”, “웃기는 소리지, 새파란 게 뭘 가지고…….”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장준하가 1967년 총선에 동대문을 구에서 옥중 당선을 한 후 젊은 초선위원으로 신민당의 감찰위원장으로 추대되는 때였다. 감찰위원장을 ‘내가해야겠다’며 나선 재선의원이 있었는데, 장준하를 비난하는 그의 말이 이랬다. 

“그 사람 그거, 이번에 감찰위원장 되면 다음엔 대통령 되겠다고 할거야…….” 그러나 군사 통치에 저항하던 시절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 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장준하를 위해서라면 (대통령 만드는 일. 필자 주) 무엇이던지 할 거야“했으니 장준하에 대한 평가는 대조적이었다. 더욱 희한한 것은 그는 그 비운을 당할 때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려졌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대통령으로 불리고 있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곤 이런 일이 있었다. 장준하가 필생의 힘을 기우려 야권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한 외국인이 찾아와 장준하에게 책 한권을 선물했다.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는 영문판책이었다. 이어서 내놓은 또 하나의 선물이 있었다. 사방 한자쯤이나 될까 한 종이상자였는데 손수 열어 안에 든 선물을 꺼내 놓았다. 

서구의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나들이에 즐겨 쓰는 꽤 고급기지로 느껴지는 검은 색 모자 였다. 빙긋이 웃으면서 그 모자를 장준하에게 들려준 그는 자신을 국무성 아시아국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만 소개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있을 거라 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자리를 떴다. 장준하가 비운의 삶을 다하고 떠난 후 여러 해 동안 그 아내 김희숙은 그 모자를 간수하며 이상한 감회에 젖곤 했다. 

그 선물 ‘대통령이 되는 길’과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즐겨 쓰는 모자와 장준하는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걸까? 

어쨌든 그 장준하가 제2공화국 정권의 주변에 섰다. 그는 어떤 체제나 구조에 쉽게 합류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생(生)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면 정권이 구상하는 국정전략 제1호 국토건설 작업을 진두지휘하게 된 장준하는 그의 그 고집 때문에 역시 ‘정권에 주변’에 선 것이다. 그는 국가를 개도하는 것 같은 대업은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했다. 철저하게 지원하는 민력의 결집을 통해, 자주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라 했다. 그런데도 장면 정권은 이 같은 장준하에게 삼고초려를 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장준하에겐 사실 고마운 정권이었다. 장준하의 요구를 다 들어 주겠다는 정권이었으니…….제2공화국의 싱크탱크들은 장준하의 열정과 조국애 그리고 그의 무욕을 믿고 있어서였다. 장준하는 드디어 <사상계>를 넌지시 비켜서 국토건설의 대임을 맡는다. 

조직 속에서 그의 상위란 본부장인 종리뿐이었다. 장준하가 제2공화국에 참여하면서 그 제2공화국에 격심하게 불어 닥친 것이 공체제도의 개혁에서 오는 격풍 이었다. 사실 장준하의 국토건설운동은 제2공화국의 공체제도 개혁과는 그 업무상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또 사실이 그랬다. 그런데 그 국토건설운동 속의 공직자 선발 방법이 제2공화국의 전 공직사회를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그 내용은 이랬다. 우선 장준하의 국토건설운동본부는 약 2000여명의 인물을 선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6개월간 이들을 훈련시켜 그 19%인 200여명의 선진을 골라 전국 농촌의 문제 지구에 파견 현장수학을 철저히 득한 3년쯤 후 각 지역의 군수로 파견, 세계적인 농본국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2000명, 혹은 200명 지도자 훈련생들의 선발 방법이 제2공화국의 공직사회를 뒤흔든 것이다. 일체의 학력, 학연, 지연 등을 무시하고 헌신성, 공공성, 도덕성을 중시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이 같은 인물을 찾아내는데 장준하에게는 수족 같은 동료들이 있었다. 기라성 같은 <사상계>의 필진 교수들, <사상계>의 ‘교수 사랑방’에 출입하는 실력을 갖춘 전문인들, 뿐만 아니라 전국각자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사상계>의 무수한 독자들이었다. 

“이 국토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이들이 앞으로 군수(郡守)가 될 사람들 이란다”는 소문이 광풍이 되어 공직사회를 뒤흔든 것이다. 방해세력이 없을 리 없었다. 
“장준하가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비난, 비평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태연했다. 그가 가진 것은 정권욕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그 같은 장준하도 탱크를 몰고 들어오는 박정희(朴正熙)는 어쩔 수가 없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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