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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 (7)<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4.22 14:35

기어이 장준하의 화(禍)를 부른, 함석헌의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

함석헌의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실은 7월호를 시중에 배포해 놓은 장준하는 결코 평안할 수가 없었다. 「5.16」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 그 글이 참으로 기이하게도 검열에도 걸리지 않고 자구하나 수정이 없이 그대로 실려 나갔으니 그 담(膽)의 사람 장준하로서도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중에도 위로가 되는 것은 ‘별도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나오지 않아도 좋소’하며 마지막이라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불러대며 목 놓아 밤이 다하도록 밤 술판을 벌렸던 동료들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음날 깔끔한 정장으로 출근해 준 것이었다.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무사할 리가 없어…….” 장준하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상계는 없어질 것이고 선생님과 나는 투옥을 피할 수가 없을 거고…….”

장준하는 사장석에 앉아 깊은 묵상에 들었다. 쉬 헤쳐 나가기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 마다 그가 취하는 자세였다. 거의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발간된 잡지 7월호를 시중에 배포하고 4,5일쯤 되는 날이었다. 혁명군(?)에서 나왔다는 군 작업복차림의 몸집 좋은 두 젊은이가 사상계를 찾아왔다.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한 자세에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놀랄 만큼 정중했다. 사장과 편집책임자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들이 부재중임을 확인한 혁명군부의 두 사람은 “내일 아침 일곱 시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사(社)에 나와 있도록 전해 달라”하고는 두말없이 돌아갔다.

사실을 보고 받은 장준하는 다음날 아침 취재부장 고성훈(高聖勳)을 불러 동행케 했다. 다시 찾아온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소속을 역시 아주 정중히 밝히는 것이었다. “선생님.” 두 사람의 장준하에 대한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저희들은 혁명군부(?)에서 나왔습니다. 명(命)에 의해 온 것이니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왜, 무엇 때문입니까?”

연행의 이유를 묻는 장준하에게 두 사람 혁명군(?)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저희들도 모릅니다.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연행의 이유조차 모른다는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요? 그럼 가야지.”

장준하 역시 군소리가 없었다. 장준하는 고성훈과 함께 혁명군부(?)가 보내온 검은 지프에 동승했다. 장준하가 그 혁명군(?)이라는 이들을 따라 내린 곳은 남산 밑 회현동의 한 민가형 건물로 거기 준비된 한 별실에 놓인 채 찾아주는 자 한 사람 없이 무려 3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자신을 연행해온 자들까지도 기다리라던가 따위의 한마디 말도 없이 나가버린 후 장준하는 그렇게 버려져 장장 그 세 시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싸워야했다. 

버려진 방은 천장, 바닥, 사면 벽이 진노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백열등의 조명과 광열로 달구어져 있었다 해야 옳을 것이었다. 수 시간이 지나면서 장준하는 고성훈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뭐라 위로를 해야겠는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성훈이 되레 자신을 격려해 오는 것이었다. 

“사장님, 저는 염려 마십시오. 저는 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장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호곡(號哭)하는 장준하

장준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퍼서도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역사가 명하는 의의 길을 옳 곧게 걸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였다. 그는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고 이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역사의 도상을 걸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의의 현장에서 당하는 수난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정화, 성화 시켜 주었는가를 절절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래서하는 호곡이었다.
 
“고형, 크게 고맙소…….”장준하는 고성훈의 두 손을 굳게 쥐어주었다.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전 자신을 연행해온 이들이 아닌 또 다른 군인복장의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오시오. 나를 따라오시오.” 장준하와 고성훈을 찾은 이 사람이 한 말은 딱 두 마디였다. 역시 검정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이 바로 저 민주혼(民主魂)으로 호곡을 금치 못하게 한 남산(南山)이라는 곳이었다.

장준하와 김종필

김종필과 박정희

남산, 거기 한 조사실에서 다시 기다리기를 한 시간 여, 다시 나타난 또 다른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제 곳으로 인도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한 달여 전 5.16군사반란의 주모자들로 조직된 소위 그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의 부장실이었다. 

아직 방주인은 없고 안내자의 지시로 장준하와 고성훈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를 한참 후 요란한 군화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 호위병을 거느린 방주인이 들어왔다. 장준하로서는 물론 초면이었지만 여러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익히 본 얼굴인지라 상대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역시 계급장이 없는 군 작업복차림의 그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그의 소위 중앙정보부는 조금 후엔 “여자를 남자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말고는 못할 것이 없다”는 기구가 된다. 그야말로 기형(奇形)이었다. 

김종필은 허리좌우에 두 자루의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를 지키는 것이 총 이었다. 대한민국의 합헌정부를 탈취한 5.16쿠데타에서 제1의 보호수단이 바로 그의 좌우에 찬 권총이었다.

“김종필, 아 김종필이라!”

장준하는 김종필을 생각하며 깊숙이 쓴 웃음을 지어야 했다. “김종필이라……!” 지금 장준하가 지니고 있는 국토개발본부 기획부장의 서류철에는 「예비역 육군중령 김종필의 이력서」가 들어있다. 4.19로 자유당독재가 종식되고, 7.29 선거를 거쳐 장면정권이 수립되면서 설립된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직을 맡아있을 때, 그 국토건설을 위한 요원모집에 접수된 이력서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장준하의 가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랬구나, 그 김종필…….” 그런데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 부장님, 여기…….” 부장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역시 계급 없는 복장의 한 군인이 들어와 두툼한 책 한권을 전달하고 들어간다. 김종필에게 전달된 이 책이 바로 5.16 군부반란세력에의 저항의 칼이 된 함석헌의 저 유명한 “5.16을 어떻게 볼까?”가 실린 <사상계> 7월호였다. 그 책은 흰 종이 표지로 입혀져 있고, 함석헌의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는 빨강, 파랑, 노란색 펜들로 거의 도배질이 되어있었다. 김종필은 그 책을 장준하 앞에 놓인 테이블에 내던졌다.

‘장 사장’, 그래도 호칭은 죄인 취급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일으킨 구국운동을 이렇게 악평할 수 있소?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도대체 ‘정신분열증 들린 영감쟁이’의 이따위 글을 어떤 저의로 당신잡지에 실은 거요? 어디 당신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이미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정상이 아닌 듯했다. 김종필의 책상에 놓인 두 자루의 권총은 두렵지도, 걱정스럽지도 않았지만 그 권총의 주인 김종필은 더할 수 없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그런데도 일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어투였다. ‘정신이상자’, ‘정신분열자’라는 과언이외는 의외로 낮은 음성에 격(格)마저 잃지 않았다. 

당시나 그 후에나 박정희의 유신 ,전두환의 군부치하에 “남산(南山)”으로 통칭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하면 받는 대우는 오직 한 가지 ‘개 취급’이었는데, 장준하의 함석헌에 대한 변론과 구국의 길 논(論)을 제지하지 않고 두시간여동안 귀담아 들은 김종필은 장준하마저 의외라 할 만큼 인간적이었다.

김종필은 마지막으로 장준하의 5.16혁명(?) 당국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고 했다. 장준하의 답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한시라도 바삐 과업을 완수하고 군대로 돌아가야합니다.” 그것은 함석헌이 그 글 “5.16을 어떻게 볼까?”에서 주창하는 말이기도 했다. 함석헌은 인류사(人類史)에 있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과가 “칼을 쓰는 것”이라 단언한다.

“그때는 (4.19, 필자 주) 맨 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은 (5.16, 필자 주) 칼을 뽑았다. 그때 믿은 것은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에 믿은 것은 총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엔 밤중에, 몰래 갑자기 됐다” 함석헌의 4.19와 5.16의 의미와 그 가치의 비교는 계속된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 달 아닌가?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과 비교할 수가 없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을 했다. 그러나 잎은 영원히 길어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和樂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 잊고 잊혀 져야 한다…….”

‘혁명은 민중(民衆)의 것이다’

함석헌은 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민중 없이 혁명은 없다고 선언한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민중의 전적찬성, 전적 참여 없는 혁명은 거짓이다……민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성의는 아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잘 길러도 그것이 참 사랑은 아니다……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거짓이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단 말이다. 그리고 민중을 오래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 그러므로 할 일을 마치는 대로 곧 정권을 민간인에게 물려주고 군 본연의 자리로 복귀 하겠다 선언한 것은 군인다운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함석헌이 무사 할 수만은 없었다. 「구국혁명세력」을 거스르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칼을 뽑아 들었고, 탱크를 몰아 나섰는데 그 거사를 통째로 거부해버린 늙은이, 교수도 박사도 신부목사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늙은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국가재건최고위원회」는 함석헌 단죄의 칼을 뽑아들었다.

이른바 ‘함석헌 처리의 건’이었다. 이 ‘함석헌 처리건’의 최고회의 사회자가 바로 그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을 포함해 7인 위원회, 역사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6명이 투표를 했다. 3:3, 결정권은 김종필의 것이었다. 이 늙은이를 어떡한다, 김종필의 한 표가 함석헌의 처형까지도 가능케 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김종필은 장준하가 남산을 다녀가며 남긴 말을 떠올렸다. 

“김 부장, 김 부장께 내 긴한 청이 하나 있소이다. 이 일로 누군가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내가 가게 해주시오. 만일 함석헌 선생이 투옥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김 부장과 이 사람 모두에게 두고두고 큰 부끄러움이 될 것이 외다”한 말이었다.

함석헌은 무사했다! 5.16 혁명(?)을 통째로 거부해버린 함석헌이 말이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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