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주홍글씨>에서 살펴본 나의 ‘환상 속의 그녀'

이 글은 평범한, 하지만 이상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과연 여자의 사랑이란 무엇일까?” 

남자에게, 아니 최소한 ‘나’라는 남자에게 여자란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어머니, 아내, 누나라는 특정화된 가족 말고, 남자가 ‘여자 혹은 여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대상들은 다가서기엔,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기엔, 혹은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이야기하기엔 힘들고 어려운 존재이다. 왜 그럴까? 왜 나라는 놈은 이처럼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걸까? 

내게는 여자라는 존재가 필요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필요가 무엇이든 간에, 늘 나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지만, 상대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대상이 나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들은 늘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나만 그녀들을 갈구했던 내 과거는 이처럼 나의 마음속에 여자를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로 각인시켜놓았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새삼 좋은 것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야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 것은 여자란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남자로서의 나’와 ‘여자로서의 그녀’ 사이의 이 어려운 간극은, 그래서 나를 긴긴 밤 홀로 고민하게 만들었던 그 부담과, 그 야속함과, 그 어려움은 사실 그녀가 나와 다르기에 내가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 도대체 뭐가? 이 글은 바로 이 그녀의 다름을 나름대로 포장하는 나의 환상 혹은 상상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로부터 출발한다.

1. 영화 주홍글씨,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는 일상의 사랑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여배우 이은주의 마지막 작품은 <주홍글씨>라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의미로 영화계에 회자되고 있다. 노출연기 때문에 여주인공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 것이라는 루머로부터 시작해서, 영화가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해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억측까지, 아무래도 <주홍글씨>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여주인공의 노출이나 이후의 자살 때문에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닌다. 

‘주홍글씨’라는 이름은 이미 19세기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너대니얼 호손의 첫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이것은 17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당시의 청교도적 윤리의식과 분위기를 전하는 사회, 종교적 색채의 문학작품이며, 이후 몇 번의 영화로 만들어져 미국에서 여자의 자유를 주장하는 상징적 소설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2004년 10월에 개봉했던 <주홍글씨>라는 영화는 엄청나게 난해한 내용으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 난해함은 한석규, 이은주, 엄지원, 성현아라는 당시의 거물급 배우들을 캐스팅하고도 큰 흥행을 기록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영화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살인이 일어나고, 치정이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현실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가끔 웅장한 반주에 맞춘 여주인공의 멋진 노래가 들리고, 그 이후에는 어김없이 이 여주인공의 정부인 한석규의 불만족스런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남주인공 한석규는 나름대로 성공한 남자이다. 꽤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경찰의 중간간부이며, 몇 가지 강력사건을 잘 해결함으로써 직업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 발생한 치정에 얽힌 사건을 해결해내고 특진하는 기쁨까지 맛보게 된다. 

이 남자가 승승장구하는 곳은 단순한 사회적 영역만이 아니다. 그는 여자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행복에 도달해있다. 우선 그에게는 아내(엄지원 분)가 있다. 그의 아내는 집안을 정돈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까지 나무랄 데 없는 정숙한(?) 여자이다. 그녀의 외모 역시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청순가련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자의 아내가 남자와 결혼한 이유가 일반 여인들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남자의 아내는 남자의 정부를 학창시절부터 연애의 대상으로 사랑해왔다. 다시 말해, 남자의 아내 엄지원과 남자의 정부 이은주는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인 사이였다. 그러나 정부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남자의 아내와의 관계를 힘들어하고 그녀와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나 남자의 아내는 남자의 정부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오히려 영원히 자기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정부의 이성애인이었던 남자(한석규)를 유혹하여 결혼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사실을 남자만 모르고 두 여자 모두는 알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물론 남자는 두 여인 사이의 동성애적 사랑 때문에 의외의 횡재를 한다. 청초한 아내와 섹시한 정부 둘 다 그의 차지였다. 사회적 성공을 거둔 그 남자는 아내와 정부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아니 마음껏 소유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약간 찝찝한 상황도 발생한다. 아내와 정부 모두가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상황이 부담되지만, 두 여자 중 누구도 놓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아이야 낳아 기르면 되는 것이고, 그 둘 모두 내가 건사(소유?)할 수 있다.” 그는 가장 행복한 남자이다. 세상의 도덕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그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럼으로써 두 여자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주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2. 사랑, 침몰하며 변하다! 

정부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남자는 경찰승진기념식을 마치자마자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목적지는 하필이면 인적이 거의 없는 해변가. 여기에 도착한 남자와 그의 정부는 둘 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그에게 장난을 건다. 

둘은 타고 온 자가용의 뒤 트렁크에 함께 누웠고, 여자는 남자 몰래 트렁크 문을 닫아버린다. 그런 후 그녀는 깔깔대며 웃어댄다. “이젠 우리 둘뿐이야. 겨우 이제야 당신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어!” 소유한 자는 늘 남자였다. 그러나 이제 여자가 남자를 소유하고자 한다.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하지만 좋은 놀이도 한 두 번이면 질리는 법이다. 둘이 갇혀버린 차 트렁크는 함께 누워있기에 너무나 비좁았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넘기던 두 사람의 상황은 이제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그래서 웬만해서는 사람이 오지 않는 지역의 해변이다. 도대체 전화기도 없고,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도 없는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고, 날은 어두워지고, 마침내 하루 이틀 지나가기 시작한다. 허기가 지고, 장소가 비좁아 함께 누워있기도 힘들다. 게다가 더워서 짜증은 계속 늘어만 간다. 한석규가 짜증에, 더위에 지쳐가면서 심한 말을 쏟아내는 반면, 그래도 이은주는 잘 참아내면서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쏟아낸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이 행복했다. 물론 남자에게는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부인이 있고 비록 자신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숨어 만나는 정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녀는 이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 때문에라도 그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까짓 짜증, 이까짓 허기, 이까짓 더위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 안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고, 그 아이의 아빠가 되는 남자가 바로 옆에 누어있다. 그 무엇도, 그 어떤 괴로움도 지금의 이 행복을 망칠 수 없다. 그녀는 행복하다. 행복감에 그녀는 남자에게 더욱 밀착해 들어간다.

“이렇게 우리아이까지 셋만 있으니까 좁아도 행복하잖아! 난 괜찮아.”

이에 비해 남자는 괴롭기만 하다. 좁은 공간에 여자와 함께 누워있으니 짜증은 더욱 심해졌다. 사랑하는 것은 우선 내가 편하고 나서 하게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결국 내가 안정이 되고 나야 좋은 것이다. 덥다. 답답하다. 배고프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커져만 간다.

“쫌 저리가. 좁은 공간에서 붙으니까 더 힘들잖아! 그만 좀 재잘거려 시끄럽다고!”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결국 여자는 차 트렁크 안에서 아이를 놓치고 만다. 그렇잖아도 조심해야만 하는 임신초기에 며칠을 굶고, 비좁은 곳에서 남자와 싸움을 벌이다 결국 하혈을 하면서 아이를 떠나보내고 만다. 그녀는 울부짖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 세상을 모두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그 아이가 떠났다. 하염없이 흘리는 하혈을 느끼면서 그녀는 울부짖고 절규한다.

이에 비해 남자는 그녀의 비명이 듣기 싫다. 그렇잖아도 굶었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그녀는 미친 맹수처럼 울부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배고픔에 결국 그녀가 흘린 하혈을 핥아먹는다. 자기의 아이를 놓치고 흘리는 그 하혈을 남자는 핥아먹는다.

미친 울부짖음이 끝나고 난 얼마 후,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남자가 가지고 있던 권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바로 그때 그토록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하던 남자는 그녀에게 빌기 시작한다. “제발 죽지마! 나를 두고 죽지마!” 그러나 여자는 말한다. “나 이제 그만 갈래. 이제 그만할래.” 한발의 총성이 들리고,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영화는 결국 남자가 구출되어 넋이 나간 상태로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옛 이야기들을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게다가 그 안에는 또 다른 남녀의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 동반된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바로 차 트렁크에 갇혀있던 남자 한석규와 여자 이은주의 사랑에 대한 태도변화이다.

3. 자기만을 위한 사랑이냐, 타자를 위한 사랑이냐? 

 

그러나 이 행복도 차 트렁크에 갇혀 자기 자신의 안전함이 흔들리자마자 함께 날아가 버리고 만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순간에 처하자마자 그렇게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나아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여자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사회 안에 있을 때, 이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주도적이고 그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아니 어쩌면 남자가 여자를 필요로 한 것은 자신의 힘을 더욱 돋보이게 해줄 증거가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여자가 필요했고 그래서 자신의 부인과 정부 모두가 자신 곁에 (그들은 고통스러울 지라도) 머물기 원했다. 

아니 남자는 지금 여기에 없는 아내를 더 생각하고 그의 정부에게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약을 올린다. 그래 가까이 있는 여자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 게다가 나의 안전함이 흔들리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지금 내에 지나치게 붙어있는 여자는 짐이고 고통일 뿐이다. 

남자의 정부는 아내와 자신이 동성 애인 사이였고, 남자의 아내가 사실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잠깐의 실망을 느낀 남자는 이내 자신을 찾는다. 저 멀리에 있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서 다시 나의 안정감을 되찾으면 여자는 다시 소유할 수 있으니까. 그저 지금 옆에 있는 여자가 짐스럽고 힘들뿐이다. 차라리 이 여자가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녀가 죽으면 안 된다. 죽이고 싶을 만큼 힘들고 밉지만, 그녀가 죽으면 나는 혼자 외롭고 게다가 시체를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상황보다 더 괴로울 수 있다. 나는 살아야만 한다. 살기 위해 이 여자는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 죽지 않게 하려면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한 사랑, 내가 살기 위한 사랑, 나의 만족과 필요를 위한 사랑. 여성들이여 아는가? 얼마나 남자들이 여성을 자체로 사랑하는 척 연기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만족만을 꿈꾸는지.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여자는 사랑의 중심이 자신에게 향해있지 않다. 물론 연애 초반에 행하는 남자의 감언이설에 여자들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아마 그녀들은 기가 막히게 자신이 자기 아닌 남자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될 것임을 아는 듯하다. 여자들은 쉽게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한국사회에서 재산이나 직업만으로 남성을 택하는 여성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사항은 아니다.

남자의 정부(이은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고통을 감내한다. 이미 사회에서도 이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해야 한다.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며, 자신은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정부이다. 그는 다른 여자가 더 중요하며, 자신은 시간이 남을 때 쾌락을 위해 만나는 그렇고 그런 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기에 멈출 수 없다.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성공이나, 나의 쾌락이 아니라, 그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의 행복이 있어야만 한다.

차 트렁크에 갇혀있는 여자에게 자기 자신의 고통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허기지고, 두렵고, 불편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있고, 그 남자의 아이가 자신 안에서 자라고 있기에 그녀는 모든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 고통이 오히려 그녀의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게 한다.

하지만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그리고 그 남자를 붙들 이유도, 붙들 수단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사랑과 목숨을 내려놓으려 한다. “이제 그만 갈래!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으니 이제 그만 갈래!” 사랑하는 타자가 모두 떠나자 여자는 자신의 현실적 고통과 맞닥뜨리고, 동시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스스로 떠난다.

물론 우리가 영화에서 확인한 ‘이기적 사랑을 소유한 남자’와 ‘타자적 사랑을 지닌 여자’라는 두 구도는 사랑전반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4. 하이데거의 실존과 레비나스 수동적 자아

남자는 어찌 보면 하이데거적 실존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투사하며 떳떳하게 몰락하는 영웅적 삶을 견뎌내는 자이다. 그에게는 자신과 일상 안에서 관계 맺는 그 어떤 존재자들도 죽음 앞에서 “쑥 빠져나가는” 무에 불과하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때려 부수면서도 자신의 일점인 ‘자기(Selbst)’를 확보하는 남자는, 그래서 자신을 희생할 수 없는 비겁한 실존이며, 이기적 사랑의 소유자이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적 실존과 대조되는 영역에는 레비나스의 수동적 자아가 있고, 우리는 여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거칠게 이야기해볼 수 있다. 

현상학적으로 레비나스가 고찰한 자아는 타자의 불가능성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 수동적 자아에 불과하다. 아니 어떻게 본다면, 자아란 것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자신을 때려 부수는 그런 일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엄청난 타자를 향해, 그가 무규정적 순간에 만나 환대할 수밖에 없는 그런 타자 앞에 무릎 꿇는 그런 자아만이 그때마다 가능할 뿐이며, 그렇게 수동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이다.

여자는 레비나스의 수동적 자아이다.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기란 없다. 그녀는 일차적으로 타자를 향유하면서 이용하지만, 일단 타자를 자체로 경험하고 사랑하는 순간 더 이상 자기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자신과 전적으로 다르면서 늘 몰이해의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섬뜩한 자이다. 따라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관없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 타자를 위해 사랑한다.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여자의 사랑은 이 타자를 위한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자는 타자를 만나기 전, 사랑의 대상에 대해 향유하면서 철저히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그것을 따지고 평가하다가도,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이 타자로 다가오는 순간, 바로 그 타자를 위한 사랑으로, 그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경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타자를 만나기 전에는 다른 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이기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진정한 타자를 만나 사랑하면 그 타자를 위해 자신을 무화시킬 수 있는 타자중심적인 것으로 변경된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다르다. 비겁한 남자, 끝까지 자신만을 위해 사랑하는 남자와 다르게 여자의 사랑은 타자 제대로 만나 그를 위해 행하는 사랑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유형적 차이를 모르고 자신의 욕심만을 따라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는 결코 사랑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의 환상 속의 그녀는 바로 이런 분이다. 나라는 놈팽이를 타자로서 만나주는 그런 여인, 나라는 문제 많은 남자를 타자로서 생각해주고 타자를 위한 사랑을 베풀어줄 그녀. 바로 그런 환상 속의 그녀를 통해 나 역시 타자 앞에 선 수동적 자아가 될 수 있기 위해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배운다.

여자의 사랑은 타자를 위한 사랑이다. 나의 환상 속의 그녀는 바로 이런 타자를 위한 무조건적 사랑을 지닌, 그리고 그 타자라는 곳에 내 이름을 집어넣어 주는 존재이다. 

<필자 소개> 이관표 연세대학교 및 동대학원의 신학과/철학과에서 공부한 후, 연세대학교에서 신학박사(조직신학)를, 독일 드레스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실천철학/윤리학)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와 연세대학교 신학과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부정성’과 그것을 통해 현실에서 나타나는 ‘초월’의 사건들을 현대의 철학, 신학, 종교학 등의 영역 안에서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현대에 신에 대해 말하기. 하이데거의 마지막 신과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 ｢토마스 렌취의 부정초월과 철학적 신학의 과제｣, ｢하이데거 사상에서의 역설과 그 종교철학적 의미｣, ｢E. 융엘의 신학적 죽음이해｣ 등이 있다.

이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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