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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낯선 채로 있기<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05.02 11:17

영국에 머문 지 삼 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영국살이’는 낯설다. 그 낯섦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필시 분주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우선은 영어가 그랬다. 영어로 보고, 듣고, 말하기는 온 일상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외국인 친구 만들기’가 그 다음이었다. ‘만들기’라는 언사에서도 드러나듯, 자연스러운 사귐이 아닌, 노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노동과도 같았던 사귐은 정신의 뿌리까지도 어지럽혔다. 이질적인 것을 양껏 수용하기 위해 했던 이러한 노력은 마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들입다 쳐 넣는 것 같았기에, 마음도 축나고 위장도 축났다. 런던의 부는 바람만큼이나 분주를 떨던 삶에 어찌 풍유(豐裕)가 있을 수 있겠나. 삶의 안정성은 간데 없어지고, 외로움만이 그 자리에 들어찼다. 결국에 남겨진 것은 ‘낯익음’이 아닌 분주함과 낯섦, 외로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문득 이질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를 관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학업 때문에 ‘영어로 보고 듣고 말하기’까지를 그만둘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낯선 것들을 수용하려던 옹근 의지를 모두 접었다. 다시 말해, 그저 낯선 것들을 낯선 상태 ‘그대로’ ‘거기에’ 가만 머무르게 할 것을 작정한 것이다. 먼저는, 다름을 수용하는 것을 정언적 명령이나 되는 것인 양 떠받들다가 이내 축나버린 내 자신이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상대주의는 결국 차이를 강화시키고, 약자를 그저 약자로 머물게 할 뿐이라는 바디우의 주장이 내 삶을 물들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보나 거꾸로 보나 영국 사회의 여실한 약자인 내가 차이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 자체가 ‘제 살 깎아먹기’ 밖에는 안되어 보였던 것이다. ‘낯설지 않은 척’하며 살 바에야 그냥 ‘낯선 채로 살기’를 마음 먹었던 것이다.

‘낯선 채로 살기’를 선택하고 나니, 삶은 점점 고요해졌다. 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읽고 쓰고 하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분주할 일도 없었다. ‘친구 만들기’를 위한 만남이 없으니 꼭 가야만 하는 곳이 따로 없었고, 가야 할 곳이 없으니, 잰걸음으로 이동할 이유 또한 없어졌다. 걸음이 느려지니 호흡도 느려지고, 호흡이 느려지니 생각도 느려졌다. 나는 이제 분주할 틈도 새도 없게 된 것이다. 간혹가다 ‘낯설지 않은 척’하는 삶에 나자빠질 때도 있었지만, ‘느릿한 삶’으로 이내 회귀할 만큼 ‘낯선 채로 살기’는 자연스러워져 갔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라는 한병철의 말을 바탕으로 하자면, 나는 이제 병과 몰락과 탈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채로 살기’는 실은 ‘저항으로서의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온전히 ‘낯선 이’로서 ‘그들’ 안에 존재할 것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약자가 아닌 척이 아닌, 그저 약자인 채로 ‘그들’ 안에서 사는 것이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것은 어차피 완전히! 불가능한 것인 데다 그러한 과정은 곧 ‘자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분주해질수록 외로워졌던 것이 그것의 반증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좋은 것(혹은 좋아 보이는 것)을 과단성 있게 포기해버리고 나면 전혀 다른 것들, 그러니까 아주 뜻밖의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낯섦 앞에서도 가장하지 않는 ‘진솔한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이질적인 것에 기꺼이 아파하는 ‘용감한 자기’ 또한 마주하게 된다. 과감한 자기 폐쇄로 인한 ‘주체적 자기’의 발견은 결코 쌉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즉, 얻는 것은 바로 ‘나’인 것이다. 내밀하고도 도발적인 ‘자기’와의 만남은 저항에 따르는 존재론적 포상이다. 분주한 통에 잃은 것만 같았던 ‘나’를 얻으니, 사람(은 물론 사물 역시)이 만들어낸 소외로 인한 외로움이 아닌 혼자만의 고독에 거하게 된다. 결국 ‘느릿한 삶’의 풍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래의 글은 한국에서 자그마치 38쇄를 기록한 책 ‘피로사회’의 한 대목이다. 내용은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비판하는 것의 일부인데, 한병철의 언어가 단정하지만 날카롭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이게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Figure 1'낯설게하기' 기법을 바탕으로 한 작업 by Alex Kisilevich

그의 말은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나는 낯설지 않으려 더욱 분주해 보았지만, 낯선 것에 더욱 얽매일 뿐이었고, 잔뜩 부자연스러워진 나를 조우할 뿐이었다. 그것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나. 고로 나의 실존을 괴롭히는 ‘그들’에게 치열한 이별을 고하였다. 현명해서가 아니다. 그 수 말고는 나를 그대로의 ‘나로서’ 살게 할 방도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나로서’ 마주하고 맞이하게 된 것을 밝히며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나의 존재의 심연을 가만 들여다 보다 보면 기어이 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겠다.

필자의 빈곤한 영성을 방패 삼아 하이데거의 권위를 빌려와 보자면, 그는 ‘Letters on Humanism’ 에서 존재의 진리에 입각해서만이 신성한 것의 본질은 사유될 수 있고, 이 신성한 것의 본질 속에서만이 ‘신’의 의미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즉, ‘존재’야 말로 ‘신’을 부르는 작업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그가 무신론자냐, 유신론자냐라는 논쟁은 잠시 내팽개쳐 둔 채 말이다.) 존재의 숲을 거닐다- 감추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물러나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낯선, 바로 그 ‘낯선 신’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 말이다.

칼 라너 역시 ‘The 'Commandment' of Love in Relation to the Other Commandment’ 에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선다고 말하며, 참다운 사랑은 자신의 본질을 먼저 수용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자기’ 혹은 ‘실존’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앞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Figure 2 르네 마그리트의 '개인적 가치'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던져주며, 대립과 저항 혹은 당혹감 등과 같은 감정을 자극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혹은 ‘자기 물음 (self – reflection)’의 기회를 많이도 반납하며 살아왔다. 대신에 지나치리만큼 ‘하나님’ 혹은 ‘하나님과의 만남’ 만을 강조해 왔다. 목사는 성도에게, 성도는 자녀에게, 이어 교회 담장 너머에 존재하는 ‘비성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의 ‘급속 만남’만을 부지기수로 재촉하여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급하게 만났거나, 물음 없이 만난 신은 낯설기가 그지 없을 터인데, 너도나도 앞다투어 신을 만나다 보니 “당신은 나에게 누구입니까?”라는 기본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질 수가 없다. 저항 없이 그저 수용하기를 강요 받았던 우리는 낯선 신과 친밀해질 기회를 잃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서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의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즉, ‘낯선 신’ 앞에서 ‘낯섦을 느끼고 있는 나’를 인식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밝힌, ‘낯설지 않은 척’ 사는 삶일 뿐이요, 진솔하고도 주체적인 ‘자기’를 자발적으로 지양하며 살아가는 꼴이 되고 만다. 슬프게도 나도 없고, 신도 없는데, 분주함과 공허함만이 그득그득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회에도 영어학원처럼 속성 반이 존재한다. 4주 혹은 8주면 신을 만나고, 6개월이면 신의 존재와 그에 따른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목표로 하는 교회는 ‘양육 프로그램’의 준비로 늘 분주하고, ‘많은 양’의 예배로 고요할 틈이 없다. 낯섦, 이질성과 같은 것을 느낄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전략이라면 전략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들이닥친 ‘차이’ 앞에서 ‘저항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자기 폐쇄를 통해 획득한 ‘주체적 자기’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알싸하게 친절한 ‘그들’은 ‘절대 선의 하나님’을 몰아쳐 들이대기에, 도무지 피할 길이 없다.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결론은 ‘나가떨어지거나, ‘그들’에게 붙거나’인 경우가 많다. ‘내뱉거나, 받아 먹거나’ 라고 말한다면 다소 냉소적이려나.  

교회에는 많은 자극과 즉각적인 응답들이 널려 있지만, 고독할 겨를은 없다. 어린이에서부터 성인, 나아가 목회자에게도 그러한 말미는 사치이거나 아예 주어지지가 않는다. 우리의 교회가 입을 다물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생각할 여유를 품을 수 있다면 참말로 좋겠다. ‘낯선 나’를 바라보고, 가만히 신을 기다리는 시간 말이다. 교회 안에 부절히 흐르고 있는 ‘사랑’마저도 강요되지 않은 상태 곧, 텅- 하고 비어 있어 고독하고도 낯선 그 상태가 절절해진다. 예수의 기적도, 부활도, 하나님나라 마저도 감추어져 있는(없는 것이 아닌, 감추어져 있거나 멀어져 있는) 상태를, 그러니까 거의 멈추어져 있는 바로 그 상태를 갈망해 보는 것이다. 신이 바로 저기 혹은 여기에 와 있는데, 급할 것이 뭐 있겠나. 낯설면 낯선 채로 있게,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는 연습과 그에 따르는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글을 닫으며 시대의 스승인 장공의 말을 되새겨본다.  

“인간 실존의 심층에 접근하면 할수록, 신학적 주제가 말하려는 하나님, 성령, 구원, 속죄, 중생, 부활 등 중요한 신학의 중심 명제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 - 김재준 ‘하느님의 의와 인간의 삶’ 중에서 

<필자 소개>

김정원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 석사 졸업.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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