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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와 경천애인(敬天愛人)<김명수 칼럼>
김명수 (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6.05.09 15:04

율법학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28-31)

(1)
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충청남도 부여 홍산면 조현리 식송부락에서 태어났는데요. 10가구 정도의 작은 산촌마을이었는데요. 논 4마지기에 7식구가 매달려 살아야했지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식구들은 새로운 살 길을 찾아 도회지로 나가셨어요. 시골집에는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세 식구가 살았어요. 두 분께서는 언제나 아침 일찍이 들에 나가셔서 밭일을 하셨고요. 저녁 해질녘에야 집에 들어오시곤 했어요. 

저는 언제나 혼자 지내야 했어요. 어머니가 고구마 한 개를 삶아 솥에 넣어두면, 그것으로 내 점심끼니를 때웠어요. 산과 들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았고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세 식구는 아버지가 계신 대천이란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집 옆에 교회당이 있었는데요. 어느 주일날 종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교회당으로 발길을 옮겼어요. 저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야기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누군가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내용 같았어요. 수난절 즈음이었던 같습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를 위해 죽은 분이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았어요. 나는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열 살 때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렇게 평생 예수에게 사로잡힌 채 그 분의 발길에 채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제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해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군사정권은  ‘잘살아보세!’ 라는 구호를 내 걸고 새마을운동을 벌였고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갔습니다. 우리나라는 돈도 없고 자원도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값싼 노동력 하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임금 정책에 기대어 경제개발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부모님께서 싸우시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왔어요. 나의 장래 일을 놓고 두 분이 다투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시켰으면 됐으니, 나를 공장에 보내어 돈을 벌게 하자는 입장이셨습니다. 헌데 어머니는 달랐어요. 당신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아들을 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입장이셨어요.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십니다만, 그 때 영등포에 살고 계신 외숙부께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분은  당시 영등포역 부근 길거리에서 밤에 카바이드 불을 켜놓고,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었지요. 편지를 받은 외숙부께서는 졸업하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지요. 밤에는 외숙부를 도와드리고 낮에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3)
제가 대학 3학년 때 전태일 분신焚身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저와 동갑내기였어요. 제가 서울로 올라오던 해에, 그는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갔습니다. 봉제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5o원 받았어요. 당시 다방 커피 한 잔 값이었지요.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에서 시위 도중 분신(焚身)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요. 특히 진보적인 크리스천 지성인들에게 더더욱 그랬습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저는 성균관대 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요. 전태일 사건은 내 인생의 방향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인생의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고요. 저는 공학의 길을 포기하였고요. 신학의 길을 택했습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던 해였습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서대문 순복음교회의 열성신도였어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설교가 물질축복이었어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현세적인 구복(求福)신앙이었지요. 

헌데,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순복음교회 식의 신앙 스타일과 달랐기 때문이었지요. 신학은 오로지 기도하고 ‘믿습니다’하나로 해결되지 않았어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요구되었고요. 그리스도교 역사를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 고대 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힘든 길이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간 첫 학기에 발을 잘못 들여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은 적도 있었는데요. 헌데 이미 때가 늦었지요. 두 학기 때부터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학교 분위기에 차츰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안병무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는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만나게 되었고요. 인간에게 있어서 영과 육은 둘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전체요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몸(soma) 신학'는 저에게 신앙과 학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타자(others)에 대한 책임의식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지요. 

(4)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였어요. 당시 김정준학장께서 저를 불러 재일동포 유학생을 소개해주며 잘 보살펴주라고 했습니다. 동지사대학 신학부에서 율겐 몰트만 전공했던 학생인데, 김재준 신학 연구차 고국에 유학을 왔다고 했어요. 

1975년 신학대학원 시절 저는 영등포 가리봉동의 공장 밀집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다수였는데요. 청년부 담당 전도사였던 저는 매주 토요일마다 집회인도를 했습니다. 

10월 초 어느 토요일 저녁 저는 집회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했습니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어요. 체격이 건장한 청년 두 명이 내 방으로 들어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완력으로 나를 개 끌 듯 끌고 나갔어요. 그들은 검은 세단에 나를 태워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도착한 건물 현관 입구에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큰 현판이 걸려 있었어요.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이었습니다. 

그곳의 지하실에서 나는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취조를 받았어요. 신학대학원에 유학 온 재일동포 학생이 북에서 파송된 간첩이었다는 것이었고요. 저는 그에게 포섭되어 신학대학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조서가 꾸며졌습니다. 심문과정에서 온갖 고문과 협박에 의해서 저는 졸지에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조작된 간첩으로 둔갑되었어요. 1심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고요. 2심에서 10년형을 받았습니다.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형(刑)이 재조정되었어요. 저는 1540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내제사건과 거의 동시대에 터졌던 재일동포 학생간첩단 사건들 대부분이 30년이 지난 지금 재심을 통해 속속들이 무죄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제가 관련된 사건도 현재 재심 계류 중에 있습니다. 

(5)
감방에서의 생활은 참혹했습니다.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0.78평의 독방이 세계의 전부였어요. 저는 감방에서 두 가지만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여기’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은 건강을 챙기는 것이었고요.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는 일뿐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나는 요가명상을 열심히 했지요.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였지요. 다른 한 편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신학공부에 기초가 되는 동서방 철학종교서적들을 주로 읽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과 독일어, 일본어로 된 신학서적들을 많이 읽었지요. 그 덕에 감방생활에서 별로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내공內攻을 쌓았던 이 기간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감방에서 소매치기, 폭력, 좀도둑, 사기, 횡령 등으로 들어온 사회의 바닥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바닥 민(民)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제 옆에 사람이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어요. 존재이유를 새롭게 찾게 된 것이지요.  

(6)
1980년 1월 5일, 출소 후, 저는 신학대학원에 복학하게 되었고요. 8년만에 졸업할 수 있었어요. 오갈 데 없이 백수白手생활을 하고 있던 저를 안병무선생께서 거두어주셨어요. <한국신학연구소> 시절 저는 평생에 걸친 학문의 동반자인 박재순과 박경미교수 부부를 만나게 되었지요. 박재순은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이를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주선으로 성서학의 본고장인 독일 함부르크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마, 이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독일교회의 후원으로 7년 동안 경제적인 걱정에서 해방되어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 탐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 관심은 역사의 실존인물 예수였습니다. 그를 하느님으로 숭배하는 예수 신성神性 신앙은 저에게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보다는 갈릴리의 바닥 민(民)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의 동반자(partner)로 살았던 역사의 실존 인물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평생 복음서를 연구한 학자의 양심으로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예수말씀들은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으로 수렴됩니다.(막12:28-34; 마22:34-40/눅10:25-28. 참조, 신6:5; 레19:18) 예수말씀의 대의(大義)는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표현되는데요.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경계를 초월하여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 온 휴머니즘 가치의 정수(精髓)일 것입니다. 

(7)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갈 곳이 없었어요. 부산의 한 신학교에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저는 신학생들을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접속시켜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신앙교리체계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싶었어요. 보다 비판적 지성과 오픈된 학문의 열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목회자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세계를 교구(敎區)로 삼고, 세상일을 선교과제로 삼아 목회하는 통 큰 목회자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신학교 재직시절 가르쳤던 두 제자를 잊을 수 없어요. 제자 김선일군은 2004년 5월, 이라크에 선교사로 갔다가 무장단체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패권놀음에 희생당한 사건이었어요. 국제적인 인권차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또 한 제자는 최한규군입니다. 그는 부산에 있는 모 교회 소년부 전도사였어요. 2007년 7월, 학생들을 인솔하고 수련회에 갔다가 급류急流에 떠내려가는 두 아이를 보고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구출했습니다. 허나 막상 자기 자신은 기진맥진하여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한 제자가 사회의 불의세력에 의해 타살 당했다면, 다른 한 제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 어린 두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두 제자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무상계명(無上誡命)을 실천한 참 예수의 제자들이었고요. 예수의 화신(化身)들이었습니다.   

(8)
본문에서는 한 서기관이 예수를 시험할 목적으로 와서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성서본문은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데요. 그 맥락에 서서 본문을 읽어야 제대로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째 계명은 신명기(6:4-5)를 인용한 말씀인데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한 약소민족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지요. 주변의 신들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야훼 하느님 신앙으로 무장되어 민족의 난관을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다짐이 본문의 행간(行間)에 들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계명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성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레위기(19:18)에서 온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12지파(tribes)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출애굽 해방사건 이후 사분오열되어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단합이 절실했던 역사적 맥락에서 이 계명은 주어졌지요. 

예수는 이 두 계명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어요.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양식이고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애인은 경천과 다르지 않고요(愛人不異敬天). 경천이 애인이라는 것입니다(敬天卽是愛人).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마7:12) 일반적으로 황금률로 불리는 이 말씀은 역사의 예수에게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요. 『논어』에서도 나옵니다. 자공이 공자께 묻지요. “평생 지켜야 될 한 마디가 무엇입니까?” 공자가 말합니다. ‘서이다’(其恕呼). 서(恕)는 상대방과 같은(如) 마음(心)을 품는 것인데요. 이를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이지요. 대인관계를 예수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공자는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허나 지향하는 바는 다르지 않지요.   

예수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어요. 사회적 신분, 경제적 유무(有無), 의인과 죄인, 가부장적 남녀차별 등 이분법적 가치판단에 매이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딸로 본 것이지요. 사람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임마누엘 칸트의 명제(命題)는 곧 이러한 예수의 인간 평등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요.  

(9)    
저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당시 독일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공경과 이웃사랑”을 사회적으로 제도화시킨 나라 같았어요.  

저는 귀국 후 신학교에서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강의했습니다. 특히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사회적 소수자들의 고난과 해방의 지평에서 가르쳤어요. 헌데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어요. 그것은 내 가르침과 삶의 괴리(乖離)에서 온 것이었어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가르쳤지만, 내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중인격자 또는 위선자로써의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민중이 되어 살 수는 없지만, 어떤 형식으로든지 그들과 간격을 좁혀나가려고 노력했어요. 

15년 전, 제자와 함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예수의 최고계명의 실천 도량으로써 노인요양시설 <예함의집>을 설립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치매 등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어르신들도 사람대접을 받으며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실 수 있는 보살핌과 치유 공간을 마련해드리기 위함이었어요.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은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여 빚을 갚는 자세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회에로 환원하는 삶을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10)
저는 지난 4월 하순경 북유럽의 복지 선진국들을 여행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의 이념을 실현한 나라들이지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들은 바이킹의 후손들입니다. 바이킹은 밖에서 얻은 것을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이 골고루 나누어 먹는 평등공동체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뷔페음식이 바이킹요리입니다.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덴마크인데요. 그 나라 국민들은 루터교 신자들인데요. 어떤 삶을 살든지 삶 자체를 ‘신의 은총(sola gratia)’으로 알고 매사에 감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적 평등이 국민의 행복을 담보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평준화 정도가 국민의 행복감을 결정짓는다는 것이지요. 덴마크에서 고소득자는 소득의 60% 이상을 세금으로 납부하며 저소득자는 40%까지 세금을 낸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받는 사람과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의 월급 차이가 2.8배라고 합니다. 국민간의 소득격차 해소가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어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사회를 지탱하고 견인해나가는 힘은 법규가 아니라 조합(union)입니다. 도덕과 윤리라고 합니다. 국무총리도 은퇴하면 조합이 제공하는 집에서 산다고 합니다. 18세가 되면 아이들의 생활을 부모가 아닌 국가에서 책임진다고 합니다. 재소자가 한 명 들어오면 교도소에 흰 깃발을 꽂을 정도로 범죄가 없는 나라들이었다고 해요. 헌데 요즈음은 아랍인 난민들을 대거 유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드군요.  

스웨덴에서는 이미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민주의가 무엇인지 가르친다고 합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인정하는 것과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맨 먼저 가르친다고 해요. 사회적으로 소통(social communication)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민주주의 교육의 근간이라고 합니다.   

‘1등의 가치’보다는 ‘협동의 가치’가 더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요. 남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해 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숙제는 어려운 수학문제 푸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봉사활동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고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소중한 가치로 가르친다고 해요. “네 자신의 역사가 곧 나라의 역사이다(your own history is the history of the country)”덴마크 교육의 좌우명이라고 해요. 자기 삶에 대한 절대 긍정과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라는 말이지요. 

덴마크는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이른바 자발적인 싱글 맘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열 명 중 한 명꼴로 신생아가 정자를 기증받은 싱글 맘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하는데요. 정자은행이 활성화되어 있고요. 출산휴가가 52주에 이르고, 양육비용의 4분의 3을 국가에서 지원해 준다고 합니다. 출산 후 복직하는 리턴 맘의 비율도 85%에 이른다고 합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최고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인구가 9백만 정도인데요. 국회의원 수가 349명이라고 합니다. 그 중 여성 비율이 40%에 해당하는데요. 국회의원 월급은 9 백만원 정도. 그 중 58%를 세금으로 낸다고 해요. 국회의원 3명 당 보좌관 한 명, 개인 비서도 없다고 합니다. 정치인들 사이에 권위주의란 찾아 볼 수 없고요. 국회의원 은뱃지는 우리나라의 금뱃지와 달리 권위가 아닌 봉사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자전거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출퇴근한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이 봉사하고요. 적은 수당을 받고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고 해요.  

스칸디나비아 반도 여행을 하면서 나는 자연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태친화적인 민주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고요. 사회적 평등과 더불어의 삶이 국민에게 삶의 질(質)과 만족도를 높인다는 것,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내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초등학교 교육의 근간이라는 것, 이웃사랑 정신의 사회제도화 그리고 근검절약의 생활화는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재벌 독식의 천민자본주의와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가 벤치마킹해야 할 민주주의 꽃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와 타자(他者)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동시에 일치의 삶을 사는 것, 곧 『논어』에서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가치가 사회화된 것이겠지요. 타자(他者)에게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예수의 이웃사랑 정신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명수 (충주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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