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필자주-

고려사

-유관,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鄭道傳)이 찬수(撰修)한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였다. -세종 1년 9월 20일. 

이렇게 시작한 <고려사> 개수 작업은 세종 사후에야 끝을 봤습니다.  

-김종서, 황보인, 정인지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니 -문종 1년 8월 25일.

현재 전해지는 <고려사>는 문종 1년 8월에 완성된 것입니다. 정도전의 원본 <고려사>와 세종 재위기 수차 고쳐 쓴 <고려사>는 실록에 기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고려사>는 470여년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려의 통사입니다. 통사는 개별 임금의 실록과 달리 ‘못 읽는 책’이 아닙니다.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펴낸 역사서입니다. <고려사>가 열람 금지 책자가 아니라는 것은 아래 인용문에 확연히 나타납니다.  

-정도전, 정총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祖)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임금이 친히 보고 정도전에게 교서(敎書)를 내리었다. -태조 4년 1월 25일. 

태종도 <고려사>를 친히 보고 읽었습니다. 읽고 태종은 불만을 표했습니다. 

만약 이 글과 같다면, 전조(前朝)의 말년에 임금에 직언(直言)한 자는 윤소종(尹紹宗) 한 사람뿐이었고, 고을을 잘 다스린 자는 오직 정운경(鄭云敬) 한 사람뿐이었으나 -태종 14년 5월 10일.  

태종의 표현에 의하면, 정치를 제대로 했던 관리가 중앙에는 윤소종(尹紹宗), 지방에는 정운경(鄭云敬)뿐이었습니다. 윤소종은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가 태조 2년 9월에 사망한 개국공신입니다. 그런데 정운경은 생소한 인물입니다. 대체 누구일까요? 답은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세종도 <고려사>을 읽고 열전(列傳)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정운경이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표했습니다.  

운경(云敬)은 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이 없었는데도 전(傳)을 지어 드러내고,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은 충신(忠臣)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정도전이-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세종 5년 12월 29일.  

정운경은 정도전의 아버지였습니다. 생모가 천한 노비였다는 우현보 일가의 공격에 시달렸던 정도전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생부의 행적이며 가족관계를 자세히 기록하여, 본인이 사대부 가문의 적자였던 것을 분명히 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원본 <고려사>를 펴낼 때는 정도전이 권력 실세였습니다. 그때에 정도전은 <고려사> 편찬을 본인의 가족사를 미화시키는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정도전 영정

원본 <고려사>는 시대 상황과 맞지 않았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세종은 거침없이 표현했습니다. 고려 유신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을 충신(忠臣)이라고. 앞서 태종이 정몽주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리도록 조치했습니다. 반란의 수괴로 몰렸던 우현보, 이색, 설장수가 조선의 원로로 예우 받고 생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고려사> 개수 작업은 태종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하윤, 남재, 이숙번,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태종 14년 8월 7일.

하윤의 사망으로 작업은 중도에 그쳤습니다. 상왕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공을 넘겼습니다. 세종도 원본 <고려사>에서 고려 말기의 기록에 관해서는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원본 <고려사>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 (중략)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세종 3년 1월 30일.
 
제(制), 칙(勅), 태자(太子)는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 이들 용어를 왕국에서 사용하여 황제국에서 시비를 걸어온다면, 왕국에서는 분수에 넘치는 용어를 사용한 경위를 해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교 문제로 비화됐을 경우의 일입니다. <고려사>는 이미 망한 왕조의 역사입니다. 망한 왕조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했는가는 외교적 분쟁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튼 <고려사> 개수의 소임을 맡은 유관, 변계량은 작업을 끝냈습니다. 

유관(柳觀)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세종 3년 1월 30일. 

2년쯤 지나 세종은 2차 개수에 착수했습니다.
  
지관사(知館事) 유관(柳觀)과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세종 5년 12월 29일.

변계량이 윤회로 교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계량은 ‘왕국의 분수’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세종은 역사 기록의 원칙으로 ‘있었던 사실’을 앞세웠습니다. 사료를 고증하여 있었던 사실대로 기록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차 개수에 즈음하여 왕국의 분수를 내세웠던 것은 어찌된 것일까요? 

그것은 상왕 태종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종은 명나라에 대하여서는 저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와 재위기가 겹쳤던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자금성. 정화의 남해 원정, <영락대전> 등으로 국력을 떨친 영락제였습니다. 태종은 명나라와 분란이 일 만한 일은 시도 자체를 않았습니다. 양녕을 세자 자리에 쫓아내고 세자를 뽑는 자리에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중략)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종 4년 5월에 졸했습니다. 영락제는 2년 뒤에 사망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세종은 압록강 유역 여진족을 북으로 밀어내고 4군을, 두만강 유역에는 6진을 개척합니다. 싸움은 여진족하고 했지만, 명나라 영토를 조선에 귀속시킨 일이었습니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유관, 윤회도 <고려사> 개수의 소임을 완수했습니다. 세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개, 권제에게 3차 개수를 지시한 것입니다. 3차 개수의 경우는 시작 기사는 없고 완성 기사만 있습니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신개(申槪),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제(權踶) 등이 찬술(撰述)한 <고려사>를 올렸다. -세종 24년 8월 12일.
   
권제는 세종 27년 4월 5일 정인지, 안지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4월 16일 사망했습니다. 세종 31년 2월에는 이미 사망한 권제의 ‘역사 왜곡 사건’으로 시끄러웠습니다. 권제의 아버지 권근의 고려시대 이력을 왜곡한 사실이 폭로된 것입니다.  

권제가 구사(舊史)-옛 <고려사>-를 깎고 보탠 것은 매우 자세하였다. (중략) 권근(權近)이 성지(聖旨)-명나라의 외교문서-를 사사로 개탁(開坼)-뜯어봄-한 일을, 제가 그 말을 왜곡(歪曲)되게 쓰고 -세종 31년 2월 22일.
 
인용문의 성지(聖旨)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성스러운 뜻’입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뜻이 담긴 외교문서를 聖旨로 표현했습니다. 임금의 은혜를 성은(聖恩)이라 합니다. 외국에서 어려운 지경에 처해 그 나라 임금의 은혜를 입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나라에 돌아와 ‘성은을 입었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실록을 읽다보면, 사대주의적 표현에 마음 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위 인용문의 聖旨가 그 사례입니다. 조선 초기 사대부사회에 만연된 사대주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제가 보기에 ‘마음에서 우러난 사대’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 그룹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시기는 명나라 건국에서 멸망까지입니다. 여진족 청나라에게도 어쩔 수 없이 사대에 응해야 했지만 실록에서 노골적으로 오랑캐로 표현했습니다. 
  
우왕 재위 14년 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정신적으로 똘똘 뭉쳤던 ‘이색, 정몽주, 정도전 동맹’은 ‘대 명나라 사대주의 동맹’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자신의 출생지이며 군사적 근거지인 동복면-철령 이북 지역-을 명나라에 빼앗길 위기에 처했는데도 전쟁을 피하려 했던 것은 사대부 그룹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데 이색, 이숭인, 권근 등은 조민수와 손을 잡았습니다. 

권근이 명나라에 외교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외교문서를 무단으로 뜯어본 일도 사대주의와 연관 있습니다. 명나라의 힘으로 창왕의 보위를 지키려 했던 것. 먼저 떠났던 이색, 이숭인이 별 소독 없이 귀국하자 다음 번 총대를 권근이 멨던 것입니다. 

권근을 맞이한 주원장의 반응도 떨떠름했습니다. 하여 권근은 귀국길에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외교문서를 사사로이 뜯어봤습니다. 외교문서 무단 개봉 건으로 권근은 정몽주, 정도전 등의 탄핵을 받고 죽을 위기에 몰렸습니다. 한데 그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유배가 풀리지 않음으로써 권근은 정몽주 사후 이방원이 급조한 반란 모의 56인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56인에 포함됐다면 권근은 이숭인과 저승길을 동행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권근의 유명세도 이숭인 못지않았으니 말입니다.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로 조선을 압박했습니다. 그에 태조는 외교문서 작성에 능한 권근에게 협조를 구했고, 권근이 응했습니다. 이후 공이 혁혁하여 태조 6년에 권근은 설장수와 함께 개국공신록에 이름자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개국공신록에 본인의 이름자를 올려 주기를 청하는 권근의 상소문에서 옮긴 것입니다. 

동북면(東北面)은 왕업(王業)이 기초한 곳이니 근본의 땅입니다. 중국(中國)에서 철령(鐵嶺)에 위(衛)를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신이 표문-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지었는데 (중략) 이로 말미암아 국가에 다시 동북(東北)의 근심이 없을 것이니 -태조 6년 12월 24일.  

명나라 외교문서를 무단으로 뜯어본 권근의 행적이 원본 <고려사>에, 또 두 차례 개수본 <고려사>에 어떻게 묘사됐는지, 권제가 그것을 어찌 고쳤는지, 하는 것은 확인할 길 없습니다. 다만 원본의 기록과 다르게 표현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권제는 본인 가족사의 상당 부분을 손봤습니다. 

또 사초(史草)에는 권부(權溥), 권준(權準), 권고(權臯) 등의 행실을 낮추어 썼는데, 제는 이것을 또 기록하지 않았다. 또 권부는 권수평(權守平)의 후손인데 (중략) -기존 기록에 의하면, 권수평의 윗대 혈통은 확실치 않는데- 제는 수평을 태조(太祖)-고려 태조 왕건-의 공신 권행(權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세종 31년 2월 22일.
 

세종 어진

권제로서는 기존 기록의 틀린 부분을 바로잡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를 정리하는 사람의 온당한 처신일 수는 없습니다. 문중에 전해지는 것과 다른 부분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고려사>를 개수하는 일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세종은 권제의 직첩을 박탈하고 시호를 회수했습니다.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권제에 대한 평은 곱지 않았습니다. 권제의 부음을 알린 기사에 정리된 그의 일대기에는 아래와 같은 가족사가 실렸습니다. 

기첩(妓妾)-기생 출신 후처-에게 혹하여 처자(妻子)를 대접하기를 매우 박하게 하여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하니, 세상에서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의 딸은 일찍이 첩과 더불어 거스림이 있어, 제가 발로 차서 죽였는데 -세종 27년 4월 16일.

권제는 아들도 유명합니다. 계유정변의 공신 권남이 권제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 권남은 아버지가 처자(妻子)를 박대하는 바람에 성장기가 불우했습니다. 과거시험에도 번번이 낙방, 30대 후반에야 합격했을 때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 수양대군의 집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식객이었지요. 권근에게는 같은 처지의 벗이 있었습니다. 한명회.

한명회도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여 개성의 옛 궁궐을 관리하는 ‘궁 참봉’ 직책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단종 즉위년 한명회가 권근을 찾아와 이런 투의 말을 했습니다. 

“당금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지 신료들의 나라인지 도대체 헷갈린다네.” 권근을 통해 한명회의 말이 수양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한명회의 뜻을 간파한 수양이 권근에게 아마도 이런 투의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씨 왕조 왕자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기다린다고 전하게.”

<고려사>를 개수하는 과정에 세종은 이런 말을 실록에 남겼습니다. 

-집현전의 이계전, 어효첨 등에게- 이르기를
“<고려사(高麗史)>는 처음 찬술(撰述)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중략) 그대들은 여러 사관(史官)들과 더불어 사초(史草)를 자세히 상고하여, 위에서 도조(度祖)와 환조(桓祖)로부터 태조(太祖)에 이르기까지 행사(行事)한 자취를 수색(搜索)하여 아뢰게 하라.” -세종 28년 10월 11일.  

도조(度祖)와 환조(桓祖)는 조선 개국 후 추존된 왕입니다. 환조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도조는 할아버지 이춘입니다. 도조 이춘은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원나라 국적자였습니다. 쌍성총관부 관할지에서 다루가치 직책을 세습하여 맡았습니다. 그러한 이력의 이춘은 훗날 왕으로 추존됐을지라도, <고려사>에 이름자가 언급될 까닭은 없었습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고려의 지방관으로 나름의 역할을 했다면, 이춘은 평생 원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혈통이 개인의 입지를 결정했던 봉건왕조시대였습니다. 세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바탕도 혈통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가족사를 미화하는 데는 세종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정인택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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