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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며 즐거워하라!(요엘 2:23~27)2016년 5월 15일 성령강림/5.18광주36주년/스승의주일설교
이훈삼 목사(성남주민교회) | 승인 2016.05.14 16:08

*영상설교: youtu.be/AIDDYdM7CvM

 

■ 주간 단상 : 몇 겹의 아픔

13일(금), 기장 총회의 세월호 미수습자를 위한 예배.
13일(금), 기장 총회의 세월호 미수습자를 위한 예배.

13일(금)에 기장 총회가 주최하고 호남지역의 노회들이 주관하는 세월호 미수습자들을 기다리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예배를 팽목항 현장에서 드렸다.

경기노회는 우리교인들 7명을 포함하여 9명이 동참하였다. 2년 동안 끊임없이 호소하는 것은 이 참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이었다.

기억의 숲.
기억의 숲.

팽목항에 거의 도착하기 전에 기억의 숲이라는 것을 조성해서 희생자들을 잊지 않으려하고 있었다. 이 숲은 원래 세계적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의 아들이 제안하고 기금을 마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끝인 진도에서도 서쪽 끝에 자리 잡은 5월의 팽목항은 잔잔한 바다와 적당한 바람이 부는 정말 평화로운 작은 포구였다.

총회장님의 설교로 예배와 성찬식도 하고 참가자들은 미수습자 가족들과 일일이 인사하면서 위로하였다.

그리고 또 별도로 간담회 시간도 가졌다. 몇 겹에 둘러싸인 미수습자 가족들의 아픔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수습자 9명의 유족들의 간절한 기도는

1. 이미 시신을 찾아 사망이 확인된 다른 가족들처럼 유가족이라고 불리고 싶다. 벌써 2년 동안이나 시신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2. 다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하라고 정부에 요구할 수 있지만 앞으로 인양과 시신 수습 등 모든 것을 오로지 정부의 처사에만 매달려야하는 미수습자 가족으로서는 정부에 맞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날 예배 때 공동 기도 제목도 처음에는 진상규명을 첫 번째로 했다가 뒤늦게 온전한 선체 인양을 첫 번째로 굳이 별지를 만들어서 수정인쇄물을 배포한 것 같다.
3. 선체를 온전히 인양해야 한다.
4.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가슴에 남는 고백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했을 때, 인양도 다 잘되고, 시신도 유실되지 않고 온전히 찾았다고 가정했을 때, 이미 2년이나 지난 자식의 상태를 직, 간접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304명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또 각자의 상황과 아픔이 여러 가지로 겹쳐서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1. 예언자 요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예언자 요엘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요엘서에는 그 시대나 인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다. 그래서 요엘에 대한 정확한 연대나 정보는 모르지만, 그의 시대는 분명 극심한 기근의 시대였다. 긴 가뭄에 이어 메뚜기 재앙이 불어 닥쳤다.

미켈란젤로, '예언자 요엘'(1508~12년, 바티칸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거대한 프레스코 화 ‘천지창조’를 채운 미켈란젤로는 맨 끝부분에 구약의 예언자 요엘을 그렸다.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인 요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은 그 시대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

한 글자도 빼먹거나 왜곡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양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두루마리에 집중하고 있다.

저기서 울려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인가? 지독한 가뭄과 공포의 메뚜기 떼 습격이다. 정말 처절한 유린이다. 가뭄과 메뚜기 떼 후에 눈앞에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내일은 없다. 이 내용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선언하는 것은 마침내 주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회복시킬 생명의 비를 내리신다는 약속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이 예언에 나타난 비를 성령의 단비로 이해했다. 지금 우리에게 바로 생명의 비, 성령의 비가 절실한 때다.


2. 기근의 시대

1) 타는 목마름으로!
도시인들은 가뭄의 재앙을 모른다. 도시는 상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비가 안 온다고 생업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농업 등 1차 산업은 한 마디로 물과의 전쟁이다. 관개 시설도 안 되어 있고, 지하수도 개발되지 않은 시대에, 농사의 성패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달려 있다. 비가 내리면 사는 것이고 가뭄이 오면 수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대의 기우제는 놀이나 문화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식이었다.

우리나라도 곧 가뭄이 시작된다. 어렵게 모를 심어 놓았는데, 가뭄으로 논바닥이 마르고, 모가 빨갛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는 농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오늘 말씀이 살아난다. 나도 아버님이 농사지으실 때, 그 무거운 발동기를 지게에 지고 얼마 남지 않은 저수지 물을 논에 대던 기억이 난다. 또 농촌에서 평생 친척처럼 살던 분들도 논에 물꼬 트는 문제로 싸우고 원수가 되는 경우도 보았다.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건물에 갇힌 사람들이 자기 오줌이라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그 갈증의 절박함을 느껴야만 오늘의 복음을 복음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한 컵의 수돗물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지 무심했던 우리들의 삶을 회개하면서 이 말씀 앞에 서야한다. 가뭄의 길이와 죽음의 길이는 정확히 비례한다. 물은 곧 생명이고, 가뭄은 곧 죽음이다.

80년대 김지하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온 몸을 불살라서 독재에 저항했던 분신 정국(1991.4.26.~6.29까지 10명 분신자살, 1명 투신자살, 2명이 경찰에게 살해됨)에서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라는 장문의 글을 조선일보에 실음으로써 충격을 주었고, 최근에는 세월호 가족들에게 세금 주는 것보다 무기를 하나 더 사야한다는 망발을 하여 분노를 사는 등 그 이후 그의 행보는 민주세력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80년 대 그의 펜은 정말 칼보다 강했다. 김지하의 걸작 중 우리 기억에서 사라질 수 없는 것은 ‘타는 목마름’이다.

이 시가 외국 작품의 표절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표절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노래할 때 목에 핏줄 선명한 안치환의 목소리로 ‘타는 목마름’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영상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https://www.youtube.com/watch?v=toLtg2KqvHM)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절박함의 시대를 관통해왔다. 지금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태가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그래도 그 이전 10년 동안의 민주정부를 경험한 이후이기에 군부독재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 반면 1960~80년대까지 30년 이상 동안 이어진 잔혹한 군부독재는 정말 비 인간적, 비 민주적이었으며 그 아래서 국민의 신음은 죽음의 소리에 가까웠고 그럴수록 다가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은 정말 타는 목마름이라는 표현 그 자체였다. 그 중심에 36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

오늘 우리가 이 만큼이나마 민주주의를 누리는 것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영구 독재를 획책하던 철권 세력들이 분명 존재했고 그 힘과 탄압을 죽음으로 맞서 지켜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민주주의다. 영상에서 나왔던 모든 장면들이 연출된 것이 아니라 실제 80년 광주 모습이다. 살벌하고 잔혹한 현실이었다. 세계에서도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대한민국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칼과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광주 전체가 피로 물들었고, 억울함과 고통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 80년 이후 모든 사회 개혁 운동의 밑바닥에는 5.18 광주의 희생이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현대사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광주에 빚을 지고 있다.

요엘 시대의 물리적 가뭄이든 한국 현대사의 폭압적 정치상황이든 모두 죽음처럼 사람들을 괴롭히는 가뭄이었고 반대로 그만큼 해갈의 열망은 뜨거웠다.

2) 무서운 메뚜기 떼 재앙
메뚜기 한 마리는 아무 힘이 없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간식이 별로 없는 어렸을 때, 우리는 논에 나가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끼운 다음에 프라이팬에 튀겨 먹었다. 가을 들판에서 잡은 메뚜기는 당시 최고의 영양식이었다. 메뚜기는 어린아이들이 쉽게 잡을 정도로 위협적이지 않다. 민 13:33에서 가나안을 정탐한 후 가나안 사람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없는 메뚜기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 메뚜기가 거대한 떼를 이루었을 때, 지상에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폐허로 만든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황폐한 땅과 믿을 수 없는 죽음의 현실, 그리고 죽고 싶은 절망뿐이다. 예로부터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서는 이 메뚜기 떼의 습격을 경험하였다. 히브리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내린 10가지 재앙 중에도 메뚜기 재앙이 등장한다. 메뚜기 떼의 습격은 무섭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마지막 심판 때의 재앙 중에 메뚜기 떼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먹어치울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하고 있다. 가장 잔혹한 심판의 표징 중에 메뚜기 떼의 습격을 넣고 있다.

*영상 '해남 메뚜기 떼'(https://www.youtube.com/watch?v=1AnVTT9Rfrc)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등 세계 여러 곳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친 경우들이 있다. 2014년 8월 말 해남 농사를 망친 메뚜기 떼 보도가 있다.

가뭄에 이은 메뚜기 떼의 습격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는 고통이었다.


3. 잔인한 절망의 시대에 희망은 있는가?

1) 인간의 운명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햇빛에만 의존하던 시대에 긴 가뭄이 들었다.
가족들이 먹지 못해 하나하나 죽어간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굶어 죽은 시체를 묻는 것뿐이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간신히 버텼다. 이 잔인한 가뭄이 끝나면,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실 것이고, 그 다음에는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데, 긴 가뭄 다음에 찾아온 것은 풍요를 약속하는 빗줄기가 아니라, 조금 남은 희망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메뚜기 떼의 습격이었다.

2) 절망의 시대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남북한의 끝없는 대치로 불안이 증폭되고 있고, 경제는 휘청거리고 정부와 가계부채는 급증하여 국가부도 사태를 염려해야 하고, 사회의 미래인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정신적 자산은 파산되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찌꺼기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제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국민과 소통하면서 해결의 지혜를 모아야 할 정부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에만 몰두하고 국민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어떤 가치, 어떤 삶의 자세를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 이미 스승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선생님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직업인으로 보는 불행한 세태다. 특히 교회에서 어린이, 청소년부 교사직을 정말 신실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고, 교회는 교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절망의 시대에 탄식을 말하는 것은 정직하기는 하지만 해답은 아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분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현실을 극복하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므로 어두운 죽음의 시대에서도 새로운 미래와 부활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스승들이 절실한 것이다.

4. 어둠 속에 내린 반전(反轉)

1) 오늘 절망할 힘마저 잃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환상을 내리신다.
자! 보아라, 마당에 밀이 가득할 것이다(지금 밀 한 톨도 없는데).
장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출렁출렁 넘칠 것이다(지금 독마다 비어 있는데).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메뚜기 떼들이 먹어치운 것을 그대로 갚아 줄 것이다.”(25절)

주목할 것은 지금 우리의 잔혹한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밝히신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의 무서운 심판, 긴 가뭄 끝에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더 무서운 메뚜기 떼로 쓸어버린 심판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는 이 섬뜩한 선언, 우린 이 말씀 앞에서 전율해야 한다, 소름이 돋아야 한다. 축복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환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린 환난 속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무슨 뜻이냐고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예수를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인생이 힘든 사람들뿐이다. 인생의 어둠을 경험한 사람만이 빛의 소중함과 은총을 고백할 수 있다.

2) 하나님 말씀에는 기근을 풍요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놓는 반전(反轉)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전환(轉換)이 있다.
더 이상 내 백성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언(確言)이 있다. 내 삶이 수치스럽지 않기를 기도하라. 본질적으로 따지면 가난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난을 사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빛이 있다. 그러나, 물질이 중심인 사회에서, 가난은 평범한 우리들에게 수치를 줄 때가 많다. 너무 버거운 살림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내 삶을 오그라트린다. 가난은 인간을 파괴하는 악마적 힘을 지니고 있다. 오늘 이렇게 가난으로 울먹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시는 가난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주 하나님에게서 오는 풍성한 삶과 축복을 보장해주신다. 하나님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펼쳐 보여 주신다. 그러니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하라고 하신다.


5. 성령의 비 :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

1) 새로운 인생과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비다.
풍성한 소출은 비에 달려 있다. 풍성한 추수는 파종기와 추수기에 적절한 수분이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 그 철을 따라 필요한 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이것은 길고 잔인한 빈곤을 넘어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비를 통해서, 처절한 고난과 수치스러운 현실을 넘어서 새로운 삶을 약속하신다. 요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진 재앙을 거두고 새로운 행복을 주시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2) 요엘 시대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소출과 축복을 내리시는 방법이 이른 비와 늦은 비였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고통으로 몰아가는 기근과 메뚜기의 공격을 끝장내고 풍성한 인생을 만들도록 하시는 방법도 비다. 그것은 그냥 비가 아니라, 성령의 비다.

성령은 우리의 삶에 기쁨과 생기를 불어넣는다. 성령을 통해서만, 기독교인들이 맺어야 할 신앙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다.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는 직분, 성령 없는 신앙의 연륜은 오히려 교회를 파괴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사건들, 많은 기독교인들이 겪는 신앙의 매너리즘도 결국은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철을 따라 적절히 내려주시는 성령의 단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단비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과 삶은 황폐하게 갈라지며, 영적인 기근에 시달린다. 이 시대의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다. 주님이 내리시는 은혜의 단비가 없으면,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단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이렇게 절박한 시대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은총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성령의 비를 벅찬 감동으로 맞아야 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탈옥한 후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는 환희와 자유! 성령의 비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삶은 이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감동적이다.
너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물이 없어 메말라 죽어 가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단비를 내리신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조건이 기초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의 진지한 노력과 책임성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근본은 하나님께 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이 점을 받아들이고 삶의 원칙으로 적용하며 산다는 뜻이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구원에 이르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답은 명확하다, 어떻게 하나님을 내 삶의 영역으로 모셔 들일 것인가? 오늘 성령 강림 주일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삶에 들어오신다. 적절한 비를 통해서 메마르고 황폐한 우리의 심령과 이 시대를 생명으로 적셔주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성령을 향해 내 영혼을 활짝 열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마음껏 받아들이라.
거기에 새 삶이 놓여 있다.

이훈삼 목사(성남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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