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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 연재를 시작하며<교회개혁 담론투쟁 : 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
박일준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 승인 2016.05.19 11:07

우리의 일상 삶 속에는 특별히 종교와 연관된 일상적 삶 속에는 메시야적 문법이 작동한다. 메시야적 문법이란 ‘메시야에 대한 사유가 문법으로 작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이 메시야적 문법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두 가지 형태로 작동한다: 메시아니즘(messianism)과 메시아성(messianicity). 메시아니즘은 메시아적 문법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구현한 모습을 가리키고, 메시아성은 그 문법을 가능케 하는 본래적 상태를 가리킨다. 혹은 메시아니즘이란 (카푸토의 방식을 빌리자면) ‘메시아성’ 혹은 ‘메사아적 정신’이 아주 구체적인 역사의 시점에 구현되어 나타난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메시아주의와 메시아성의 결정적인 차이는 메시아주의는 언제나 ‘미래적 현재’ 즉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반드시 임할 것으로 믿으면서, 현재의 모든 삶과 헌신을 그 종말의 시점으로 간주된 시간으로 투사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메시아니즘이 바로 메시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시아성 혹은 메시아 정신은 그런 메시아주의가 가능케 하는 심층적 문법이지만, 이 문법은 특정한 역사적 시점을 종말의 그때라고 간주하거나 정의하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메시아성은 우리의 기존 질서 체제에 전혀 이질적인 것이 도래하여, 현실에 사건(event)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즉 메시아성, 메시아 정신, 혹은 메시아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 너머로부터 도래하는 전혀 이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시간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죽음의 시간 말이다. 통상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대략 몇 십 년 후 생물학적 삶의 종말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하고 살아가지만, 원칙적으로 말해서 내 삶의 모든 순간에는 죽음의 도래 가능성이 상존한다. 하지만 죽음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찾아올 수 있다. 그렇게 예기치 않는 시간에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것과 같은 그런 특성, 바로 그것을 ‘메시아성’(messianicity)라고 데리다는 이름하였다. 즉 메시아니즘은 이 메시아성이 갖는 근원적인 불확실성 혹은 삶의 평범성이 담지한 이 종말론적 특성을 역사적으로 구현한 것이지만, 어떤 특정한 역사적 구현을 메시아성의 유일무이한 구현으로 간주할 때, 도착적인 형태로 변질되고 만다. 

이 도착된 메시아주의의 적나라한 핵심은 바로 오늘이 지나면, 이번만 지나면, 하늘에서 메시야가 내려와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란 기독교적 기대심리로 나타난다.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최후의 시간으로서, 이 때 혹은 사건이 도래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면서 매 순간이 본래적으로는 종말의 순간이라는 사실이 망각된다. 그래서 자신이 종말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점의 도래를 위해 현재의 모든 것들이 투자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는 이 ‘메시아니즘’적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 ‘이번 일만 잘되면’의 문법,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의 문법 등.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런 종류의 메시아니즘은 메시야에 대한 사유가 ‘도착적인 한탕주의’로 변질된 것을 가리킨다. 주기적으로 한국 교회 주변에는 종말을 종교상품화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이 많이 명멸한다. 요즘 ‘신천지’ 타령이 한창이지만, 이런 사이비 단체의 범람은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많은 사이비 이단들이 메시아니즘을 활용했는데, 대체로 그 종파를 창설한 사람이 ‘메시야’의 자리를 차지하는 식이었다. 이런 풍조들은 모두 ‘메시아’의 추상적 문법을 사실적 실재로 혼동하는데서 오는 오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철학도 마찬가지지만) 신학의 주요과제들 중 하나는 매 시간 범람하는 이 ‘잘못 놓여 진 구체성의 오류’를 바로 잡아 주는데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믿는 유대신앙으로부터 유래하지만, 우리는 유대교의 신관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우리가 유대교인이 아닌 까닭이다. 유대인들이 믿던 종말의 구원자 메시아를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다. 메시아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은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인 믿음 체계로부터 기독교적인 믿음 체계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모든 것을 ‘종말’이라는 특정한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시간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매 순간 모든 것은 소멸하고 다시 생성하기를 거듭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시아니즘적 사유는 그 종말이라는 특정의 시점을 미래의 어느 시간엔가 투사한다. 그리고 그 시점을 종말이라 결정하고, 그때를 위해 바로 지금 여기의 모든 삶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 때, 즉 종말이 어느 때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성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종말’의 시점에 대한 해석도 신학적으로 무척 다양하다. 그런데 메시아니즘은 그런 다양한 신학적 해석들을 무시하고, 성서의 거듭된 경고도 무시하고,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에 근거하여 그 종말의 시점이 언제라고 선포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이런 메시아니즘은 성서적인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세계 종교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 반복된 도착된 종말주의의 변형에 불과하다. 초대 기독교의 역사로부터 ‘메시아니즘’으로 변형된 기독교 종말론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판정하였다. 요즘 한국 기독교 주변에서도 여전히 이 ‘메시아니즘’의 문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이 있다. 진짜 기독교, 진짜 교회, 진짜 신자 등등의 말들이 나도는 시대는 이미 진짜 기독교와 진짜 교회와 진짜 신자가 부재하는 세상이다. 진실이 부재한 세상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짜’를 주장하는 사이비들이 범람하기 마련인 것이다. 즉 이단들이 창궐하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진짜’ 혹은 ‘진정한 것’이 부재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한국 교회는 신천지를 사이비로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사진출처 : 천지일보)

여기서 묻자. 한국 교회는 이 ‘메시아니즘’으로부터 안전한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한국 교회는 신천지를 사이비로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가? 그들만큼이나 한국 교회는 ‘메시아니즘’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터이니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라’는 신앙론이 이미 메시아니즘의 문법을 함축하고 있다. 한국 교회 메시아니즘의 절정은 바로 역설적으로 신앙체험에 있다. 역설적인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신앙 경험을 받은 사람이 그 다음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의 경험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모든 이에게 최종적이고 유일한 경험으로 선포할 때, 여기는 신앙적 이기주의에 기반한 메시아니즘의 논리, 즉 내가 최종적이고 유일한 계시를 받았고, 이를 통해 세상의 최종적 종말이 도래했다는 식의 논리가 그 은혜와 경험을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값싼 은혜”(billige Gnade)로 변질시켜 버린다. 

메시아니즘(messianism)은 ‘메시아성’(messianicity)에 근거한다. 문제는 언제나 ‘메시아니즘’이 자신의 논리를 종말의 최종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논리에 근거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종말론적’이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반복으로 사유하는 상습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오늘은 어제의 반복일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반복되는 오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삶의 모든 사건은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리자면) “영원한 사라짐 혹은 죽음”(perpetual perishing)으로 진입해 가고 있음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매 순간은 ‘종말’이다. 세상의 종말? 그 이전에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종말이고, 그리고 그렇게 쌓인 내 삶이 종말이다. 따라서 삶은 그렇게 죽음으로 향해 달려가는 매 순간들 위에 세워져 있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죽음이란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세워져 있는 종착지가 아니라, 이미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영원한 사라짐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영원한 사라짐이 일어나는 바로 지금의 현재 순간으로 신학은, 특별히 루터의 신학은 “소명”(vocatio)을 도입한다. 소명은 지금 현재 바로 이 자리에서 감당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며, 그것은 바로 그 개인의 삶의 전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총체성의 경험이 바로 종교적 경험의 총체인 것이다. 즉 종교적 경험은 일상의 삶을 벗어나, 어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삶 속에서 하고 있는 일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의 ‘선택’(electio) 신학은 시간 안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사라짐으로 떨어지는 것을 거스르기 위한 이론적 전략으로 변용된다. 

영원한 사라짐에 대한 저항, 죽음에 대한 반역, 바로 그것이 선택의 신학인 것이다. 구원은 “영혼의 불멸”로 달리 해석된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교회가 히틀러의 권력 앞에서 보여주었듯이, 루터의 소명 신학은 기존의 권력적 질서를 그대로 묵인하고 순응하게 되는 위험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반면, 칼빈의 선택 신학은 기존의 것에 저항할 수 있는 신앙적 근원을 가져다주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매 순간이 영원한 사라짐으로 진입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은폐하고, 영혼불멸을 주장함으로써 죽음도 우리 삶의 일부라는 생명의 지혜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자신의 불멸을 구원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삶과 그 영광의 불멸을 위해 불굴의 노력을 다하는 이기적인 신자들의 집합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웨슬리주의는 이론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하지만, 현실의 감리교회는 루터나 칼빈의 교회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강조한 종교적 경험론만이 도착적으로 강조된 결과 “사이비 메시아니즘”1) 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해천 윤성범은 아주 오래전 이 사이비 메시아니즘의 기원을 ‘메스머주의’ 즉 메스머(Franz Anton Mesmer, 1734-1815)로부터 비롯된 운동에서 찾았다. 1766년 메스머는 비엔나에서 박사 논문 『인체에 있어서의 위성의 영향에 대하여』 (De influxu plantarum in corpus humanum)을 발표하는데, 요약하자면 “일체를 관통하고 그리고 지상의 모든 물체를 연결하는 어떠한 능력이 있다는 것과 따라서 인간이 이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견해”2) 이다. 어떤 계기로 메스머는 1767년 자력이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력은 광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체에도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 자력, 즉 그의 용어로, “동물적 자력”(tierischer Magnetismus)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3) 

이는 근대 유럽의 기계 문명의 영향 하에서 유물론이 득세하던 시절, 정신과 물질이 서로 교통하면서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는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한참을 더 나아가 최면술과 결합하여 질병을 영적 능력으로 치유하는 “심령술”(Spiritism)로 발전해 나아가고, 이것이 미국과 인도 유럽 등지에서 “신지학”(theosophy)로 발전해 나아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심령술적 사유가 종말론적 사유와 결합하면서, 마치 기독교 고유의 정신인 듯이 포장되면서,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못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은 것과 같은 것을 간주된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현재 여기에서 치유의 은사를 발휘하고, 방언의 은사를 발휘하는 것은 곧 그가 죽음 후에 영원한 구원의 반열에 오르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의 간접 증명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신비한 능력과 종말론이 결합하여 “사이비 메시아니즘”을 부추기게 된다. 그러한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영험한 이가 곧 메시야의 재림을 고지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윤성범은 이러한 ‘사이비 메시아니즘’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병폐를 “믿음 획일주의”4) 즉,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믿음도 아니라는 식의 믿음 획일주의 혹은 믿음 우월주의가 한국교회를 더 잘못된 사이비 메시아니즘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학적 다양성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평범한 사실이 한국 교회에서는 과도하게 억압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이비 이단과 다양성을 변별할 수 있는 (신학적) 변별력이 한국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개교회의 모습 자체가 사이비와 제도권 정통 교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각 교회 목회자들의 위기의식은 신학적 변별력을 성찰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부흥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강박적 위기  의식이 목회자들에게 그런 영적 정신적 여유를 용납하지 않는 탓이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세계적인 부흥의 상징으로 거듭났지만, 그 부흥의 이면에는 전혀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물량주의적 사고와 무한경쟁과 생존투쟁에 찌들은 20세기 자본주의적 삶의 적나라한 정신성이 고스란히 교회 내에 남아있다.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신앙적 정체성에 대해서 과도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 다름을 ‘이단’으로 ‘사이비’로 정죄한다. 문제는 그러한 정죄를 단행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 이미 이 사이비 이단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들 중 하나가 바로 ‘메시아니즘’이다. 

한국 교회 내에서 ‘메시아성’ 혹은 메시아 정신이 아니라 메시아주의가 만연하는 데에는 성숙한 내적 영성의 결여가 큰 몫을 차지한다. 메시아니즘의 만연은 어쩌면 증상인지도 모른다. 그 병의 원인이 몸으로 나타내는 효과 말이다. 그래서 그 외적 효과만을 처방한다면 우리는 메시아니즘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한국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가를 역사적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성범은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원인을 열거하는데, 우선 한국 개신교는 “시종일관하여 평민의 종교로 등장”하였고, 둘째 평민의 종교로서 “한문을 쓰지 않고 많은 성경과 전도지를 순 국문으로 인쇄하여 누구나 한글만 깨친 사람이면 볼 수 있도록 문서 보급에 치중”했으며, 셋째 ‘천당과 지옥’의 단순한 메시지를 통하여 절망적인 삶의 한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음을 역설하였고, 지식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서민들의 눈 높이에 교회를 맞추었다는 점을 지적한다.5)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루터의 주장이 옳기만 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루터가 주장하는 신학적 진리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음을 여기서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이 95개조 반박문은 라틴어로 적혀 있었다. 당시 공립학교 교육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반박문을 읽을 수 있는 독일인은 수도원에서 라틴어를 배운 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귀족층을 중심으로 그의 견해가 빠른 공감을 얻을 수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한 당시의 교육 상황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를 평범한 독일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한다. 독일어라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시 인구의 5%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종교개혁’ 혹은 사사키 아타루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혁명”이 가능했을까? 그 성서를 읽도록 하려는 교육혁명이 병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한국교회의 부흥 초기 반복되었음을 윤성범은 잘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윤성범은 한국교회의 온전한 부흥이 가능하려면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독이 즉 제대로 된 성경 공부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6) 성경을 수십 독 혹은 수백 독 했다는 신자들이 즐비하지만, 성서에 대한 이해는 윤성범 시절보다 전혀 진척되지 않고, 성경 공부 모임은 성서에 대한 진지한 공부와 학습의 시간이 아니라 그저 한국교회의 위계적 사유방식을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견고하게 설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윤성범이 예전에 주장한 성서 연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주의할 것은 현재 한국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식의 ‘성경 공부’가 아니라, ‘성서 연구’라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계적인 암송과 인도자가 불러주는 뻔한 정답을 반복하는 식의 성경 공부가 아니라, 내적으로 비판적인 물음을 가지고 성서와 더불어 영적인 대화를 시도해 나아가는 내면의 진짜 ‘공부’ 말이다. 물론 지적인 학습만으로 한국교회의 문제가 단번에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또 하나의 사이비 메시아니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실한 공부와 수행은 결국 우리 개신교가 강조하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모토의 토대이다. ‘오직 믿음으로만’을 본래적으로 주창한 루터가 믿음만을 외치면서 대자보만 붙인 게 아니라, 그의 대자보를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독일 국민들이 독일어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도록 교육운동을 사회를 향해 전개했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의 제2의 부흥은 곧 이 교회교육이 ‘성경 구절에 대한 기계적인 암송’이나 기계적인 ‘독’(讀)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를 향한 ‘독’(毒)으로 작용할 따름이다. 

진정한 개신교적 성경공부는 사회를 향한 교육개혁 운동 즉 믿음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만 생각”하지 않고, “대인, 대 사회 관계”를 깊이 숙고하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처음부터 개인적인 모임이 아니라, 공동체적 모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공동체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적 성경 공부는 “윤리적인 문제”이다.7) 한국선교 초기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에 집중하였던 것이 당시 사회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그저 당장에 부흥효과가 있다는 여러 가지 기술에만 홀리고 있다. 

메시아니즘이 이단이나 사이비로 전락하지 않고 신앙생활의 정당한 문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의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이 날이 지나가도, 이번 선거가 지나가도, 삶의 시간은 또 흘러갈 것이다. 모든 것을 완성하는 종말의 시간은 결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그 종말의 시간이란 개념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완전을 구현하는 삶의 시간과정으로 이끌어간다. 

우리의 삶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미완성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을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는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완전을 실현한다고 여겨지는 가상의 시간, 바로 그 시간이 ‘메시아성’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메시아적 시간은 언제나 ‘가상’(virtual)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어느 정도 자유롭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해석된 시간을 충실하게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은 자유의 행사에 따른 우리의 (신학적 그리고 도덕적) 의무이다. 

메시아니즘이 만연할수록 점점 더 망각되는 것이 바로 이 (신학적인) 도덕적 책임감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메시아니즘, 즉 종말론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사건적 잠재성 바로 그것이 ‘메시아성’(messianicity)인 것이다. 내가 속한 세계의 모든 것은 결국 ‘영원한 소멸’로 진입해 들어간다는 통찰,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우리는 소중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한 순간도 두 번 살수는 없기 때문이다. 매 시간의 이 종말론적 성격이 망각되고, 특정한 시간 특별히 도래하지 않은 어느 미래의 시간이 독점적으로 종말화될 때, 그리고 그것이 유일무이한 진리로 앙등될 때, 메시아니즘은 도착된다. 

우리는 이 도착의 악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번 연재를 통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 해천 윤성범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신비주의적 종말론의 성향을 “사이비 메시아니즘”으로 정의한 바 있다(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윤성범 전집 1. [서울: 도서출판 감신, 1998], 211). 
2)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171. 
3)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172. 
4)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212. 
5)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212-213. 
6)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214. 
7) 윤성범, 『한국 종교문화와 한국적 기독교』. 216. 

박일준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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