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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힘, 사도 도마<성서의 인물을 통해서 보는 에니어그램 - 5번 유형 ‘도마’>
김영호 | 승인 2016.05.19 15:21

I. 도입

“아는 것이 힘이다”와 “아는 것이 병이다” 사이. 에니어그램을 알면서, 소급하여 이전에 사상의학(사상체질론)을 접하면서 느꼈던 생각이다. “에니어그램은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게 나의 화두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왜 5번 유형인 나와 몇 유형의 사람들에겐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고, 일부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겐 별로 논제가 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일단을 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상의학이 사람의 유형의 전체를 4등분하여 태양, 태음, 소양, 소음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면, 에니어그램은 그걸 9개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 전형적인 사람도 있지만, 유형과 유형 사이 그 경계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나눌 전체란 게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나는 스스로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이라고 규정한다. 5번 유형은 ‘관찰형’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 ‘지성적이고 분석적인 사색가’이라 하기도 하며, 이상적인 5번 유형을 ‘초연하게 행동하는 지식인’이라 이름 짓는다.

에니어그램은 어원대로 9가지 유형이다. 논리학에서 9는 3x3이다. 즉 머리(지성), 가슴(감성), 열정(일명 장腸형)의 삼원론. 8, 9, 1은 열정형, 5, 6, 7은 머리형, 2, 3, 4는 가슴형이라 한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 체계로 머리, 가슴, 열정이 각각의 큰 유형 안에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8번 유형은 열정-열정형, 9번 유형은 열정-가슴형, 1번 유형은 열정-머리형, 또 2번 유형은 가슴-가슴형, 3번 유형은 가슴-열정형, 4번 유형은 가슴-머리형 그리고 5번 유형은 머리-머리형, 6번 유형은 머리-가슴형, 7번 유형은 머리-열정형으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에 5번의 전형을 요셉, 도마 그리고 니고데모로 꼽는다. 요셉은 5번의 완성된 인격체로, 도마는 5번의 격정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 니고데모는 5번의 행동적 성품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즉 요셉은 5번의 통합적 모습, 성숙한 높은 경지의 전형을 나타내고 있고, 도마는 ‘의심하는 사도’로 특징지어진 5번 유형의 격정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심을 거치고 나서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용감하게 사지를 마다하지 않고 인도에 가서 기독교를 선교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면에서 니고데모도 예수께 찾아가 신념에 관한 솔직한 질문을 던지는 5번 유형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연후 그를 통한 자기 확신을 자기 처지와 신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거침없이 용기 있게 실현하는 모습도 보여준다(김영은).

II. 도마 이야기

내가 맡은 성경의 인물은 도마이다. 신학과 지성을 적으로 여기는, 한국교회를 도태시키는 목사, 몰지각한 목사들이 비신앙의 표상으로 삼는 인물 도마.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없어 책망 받은 인물 도마. 과연 그는 책망 받아 마땅할까? 합리적 의심이 죄인가?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도 말하듯이, 의심 이후에 가장 열정적으로 바뀌는 경우를 무수히 보지 않던가? 실은 도마의 사례, 등장으로 후대 인류에게 예수의 부활은 훨씬 더 합리적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대충 얼버무리는 믿음은 길게 못 가나, 의심을 벗어난 확신은 길이 가지 않던가? 증거 없는 맹목적인 믿음의 끝은 어디인가? 의심이나 회의를 지워버린 믿음이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싶다. 도마는 이 시대 한국교회를 위한 예언자이다. 

개인적으로도 보라. 의심이 일어나는데 진정 믿음은 의심 저 너머에 있다는 최후의 유혹에 넘어가 믿음의 길로 회심하면서, 그랬기에 모든 회의와 합리적 의심,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의심을 멀리 한 결과로 눈 먼 구원, 값싼 은총을 부여잡고 그 나머지에 눈을 감는 몰상식, 몰지각한 일그러진 초상들. 그게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의 메시지인가? 그로부터 덤으로 받은 배타적 이기주의신학, 값싼 은총신학, 내세적 구원신학, 번영신학, 영광신학…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 서 있게 했다. 의심 많은 도마. 차라리 의심을 하라. 얼버무리지 말고. 의심은 최종 목적이 아니다. 과정일 뿐.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이런 물음표를 제기하면서 도마 다시보기를 시도한다. 이 발표는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라는 책에 근거하여 쓰기로 약속되어 있기에 그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 일반적으로 도마와 도마복음에 관한 자료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1. 도마 

디두모 유다 도마. ‘디두모(Didymos)’는 그리스어, ‘도마(Thomas)’는 아람어/시리아어,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쌍둥이’가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디두모 유다 도마’를 문자 그대로 하면 ‘쌍둥이 유다’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의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가롯 유다와 다른 유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 ‘도마’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기록한) 도마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한 분 아버지에게서, 혹은 한 태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과 쌍둥이라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강남 “도마복음 해설” 중에서)

위키 백과사전에 나오는 도마에 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토마스(Thomas, St Thomas the Apostle, Judas Thomas, Didymus) 또는 도마는 기독교의 사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람어로 ‘쌍둥이’를 뜻한다. 도마는 갈릴래아 출신으로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일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사도의 반열에 올랐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의 일화를 보면, 

장면 (1) 베다니아에 가는 길 
요한복음서의 라자로 소생설화에 따르면, 예수가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려고 베다니아로 가려고 하자 다른 사도들이 바리사이파의 음모에 걸릴 위험이 있다며 모두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우리도 함께 가서 그 분과 생사를 같이 하자.”라고 말하였다.
장면 (2) 최후의 만찬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 때에도 예수가 사도들에게 이별을 고하자, 다른 사도들이 비통에 잠겨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토마스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한 예수의 말에 “주님, 저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게쎄마니 동산에 갔는데, 예수가 병사들에게 사로잡히자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장면 (3) 부활하신 그리스도 
토마스는 자신이 없을 때 예수가 부활하여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났다는 증언을 처음에는 “내 눈으로 그 분의 손목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 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라며 믿지 못하였다. 여드레가 지나고 사도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예수가 다시 나타나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하고 그 표징을 보여 주자 토마스는 그제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하자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다.(이상 <위키 백과사전>에서 발췌, 편집)

2. 도마와 도마복음서

도마는 신중함과 사고의 감옥에 갇힌 자로서 5번 유형의 전형이다. 영지주의자 도마는 예수의 실제 쌍둥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즉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복음서에 ‘도마’라는 단어가 언급된 횟수는 여덟 번이다. 마태, 마가, 누가에 각 1회 나머지 5회는 요한복음에 나온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에는 단 한번 예수의 제자들을 열거하면서 나올 뿐이다. 요한복음에서 만이 도마의 이야기가 상황적인 묘사와 함께 나온다. 그 유명한 일화인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복음 20:29)도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복음서에서 ‘도마’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10:3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2. 마가복음 3:18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열혈당원 시몬과, …
3. 누가복음 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
4. 요한복음 11:16
그러자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5. 요한복음 14:5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6. 요한복음 20: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7. 요한복음 20: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8.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도마복음 13장에 나오는 구절로 도마를 다른 성서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5번 유형 도마의 특질이 드러난다. 

1예수께서 그의 따르는 자들에게 가라사대, “나를 무엇엔가 비교해 보아라. 그리고 내가 무엇과 같은지 말해 보라.” 2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의로운 천사 같나이다.” 3마태가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나이다.” 4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스승님이시여! 제 입은 지금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전혀 언표(言表)할 수 없나이다.”

(복음서의 병행 구절로서 요한복음 14장 1-6절).


3.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 설명하는 도마 이야기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 설명하는 도마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에는 5번 유형 일반에 대한 이야기와 도마에 관한 이야기가 교차, 중첩, 병행…하여 서술되어 있는데 아래의 서술은 그 중 도마에 관한 이야기만 추려내 보았다.

- 생각하는 도마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진 도마(이건 일설이고 정설이라 할 수는 없다)는 차분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다. … 예수와 동행하면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도마가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그만큼 생각도 많고 관찰도 잘하거니와 솔직하게 표현도 잘하고 용기 있게 발언하기 때문이다(이런 개인적인 성품으로의 비교에 대해 본인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이 도마에 대해 깊은 공감적 세계관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사상적 공감대로 인한 것이라는 말이다.)1) 오늘날까지도 <도마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도마가 예수에게 질문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물음에 대해 다른 제자들과 차별성을 드러내며 대답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대답은 다른 제자들의 평범한 대답에 비해 독특한 지혜를 드러낸다.

- 의심하는 도마
전통적으로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한복음 20:25)라고 말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런데 의심이 의심으로 끝나면 무의미하다. 그러나 의심이 믿음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복음 20:20)고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에는 제자들의 반응은 특별한 언급이 없고, 다만 도마에게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요한복음 20:25)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오히려 적극적인 표현을 한다. 의심으로 말하자면, 의미 있는 의심이요, 탐구적인 의심이요, 사색적인 의심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전형적인 의심이다.

- 신앙하는 도마
… 더욱이 도마는 예수의 형제였다. 그만큼 가까이서 예수와 함께 자라났다. 이와 비슷하게 야고보도 예수의 형제였기에 그를 메시아로, 부활하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데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우리는 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도마가 비로소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은 평생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믿음이 하나로 수렴되어, ‘꽉 찬’ 지성과 영성의 조화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고전적 표현인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에 익숙하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가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했을 때,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었다. ‘의심하는 도마’에서 ‘신앙하는 도마’로의 대전환이다.

- 행동하는 도마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대체로 생각이 많아서 무슨 결정을 내리기 어렵지만,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되면, 심지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돌출 행동을 할 만큼 특이한 면을 보인다. 드문 경우지만,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가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1:15)라고 말했을 때, 도마가 느닷없이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복음 11:16)고 제자들에게 말했던 일을 보라. … 지금도 인도의 서해안 지역 케랄라(Kerala) 주에 거면 팔라요르(Palayur) 시에 성 도마 교회가 있다. 기원후 52년에 사도 도마가 세운 교회다. 이곳은 도마가 인도에 세운 일곱 교회 가운데 첫 번째 교회이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도마가 그 역사적인 신앙 고백을 한 지 22년 만의 일이었다.

III. 5번 유형

1.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 설명하는 도마를 통해 본 5번 유형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는 도마를 통해 본 5번 유형을 서술하고 있는데 다음의 발췌는 도마를 통한 5번 유형의 특질을 편집한 것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어릴 적부터 생각이 많은 편이다. 무언가 알고 싶은 욕구가 강하고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자연히 질문도 많고 관찰도 잘한다. 정보와 지식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가능하면 읽을거리를 많이 구해서 읽는다.

5번 유형은 대체로 생각하는 사람, 또는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이해된다. 생각이 많은 까닭은 바르게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 늘 다지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뭐든지 쉽게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살피고 또 살피며 분석하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풍긴다. 자기 스스로도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자연히 신중하게 된다. … 

5번 유형은 차분하고 사색적인 만큼 행동 면에서는 비교적 약하거나 더딘 경향이 있다.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쪽이 강하며 분석적이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기고 안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두들겨 본 소리를 또다시 분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9번 유형과 비교하면, 둘 다 생각을 미루고 결정을 유보하지만, 9번 유형은 결정을 내리면 즉각 행동에 옮기는 데 반해 5번 유형은 결정을 내리고도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5번 유형이 보다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이를테면 ‘지식의 함정’ 또는 ‘정보의 박스’에서 뛰쳐나오면, 그들은 과단성 있게 행동하게 된다. 자신의 지식의 힘이 아니라 ‘섭리’를 따라 살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구보다 초연하게 되고 생각과 행동이 모두 자유로워진다. …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안 지나간다’는 말을 드는 5번 유형은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분석적이며 신중한 편이다. 그래서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그 소리를 분석하느라 건너지 못하는 격이다. 이들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신중한 태도 때문에 회의적이며 의심이 많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팔랑귀’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남의 말에 의존하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가능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고 ‘꽉 찼다’고 느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인다. … 

남의 말을 듣거나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남보다 더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거나 과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일단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는 5번 유형에게서 볼 수 있는 성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마가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을 갖는 과정이 남달리 힘겨웠으리라 짐작이 된다. … 

도마는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만 살려고 한 것이 곧 5번 유형인 자신의 함정이자 한계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늘 경험하던 유혹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섭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진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지식도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비평의 사막 너머로 들어서는 초연함에서 오는 희열과 함께 솟구치는 믿음, 그리고 해맑은 영혼이 일상에서의 형님(예수?)에게 “나의 하나님” 하고 외치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하는 도마’의 진면목을 목도한다. 무릇 고난과 역경을 거치고 이겨 낸 인생이 아름다운 것처럼, 의심과 번민을 거치고 이겨 낸 도마의 믿음이야말로 아름다운 믿음이요, 찬란한 고백이다. 우리는 5번 유형이 덕목을 살려서 초연해지면 지혜와 믿음이 빼어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도마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대체로 생각이 많아서 무슨 결정을 내리기 어렵지만,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되면, 심지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돌출 행동을 할 만큼 특이한 면을 보인다.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성은 한마디로 표현해 ‘초연함의 영성(spirituality of detachement)’이라 한다. 아브라함은 9번 유형이지만 5번 유형인 도마가 지성과 영성이 조화된 ‘비집착(non-attachment)’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믿음의 도마’로서 상징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도록 통합된 5번 유형은 8번 유형의 덕목을 살려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아량이 넓은 지도자로서 행동하게 된다.… 5번 유형은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사람들이나 사물을 잘 관찰하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고 생각하며, 이해가 잘 안 되면 더 많은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흐른다. 객관적으로 보면 판단과 행동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충분한데도, 자기 자신은 아직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생각을 위한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5번 유형은 초연한 자세를 갖기 전까지는 마치 ‘외딴 섬’과 같아서 스스로 생각에 갇혀 새로운 환경을 꺼린다. 지식이나 정보도 자기가 지닌 기존의 틀 속으로 끌어당기려다 보니 환원주의가 강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열린 사고와 과감한 행동이 어려워진다. 특히 리더에게 이런 성향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통 리더십’이라고 부르거나 완고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지나친 분석력에서 비롯된 의심 때문에 회의적이란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도마’가 ‘신앙하는 도마’가 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5번 유형은 일단 마음먹고 확신을 가지면 누구보다 초연해지고 담대해진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사실 생각도 많고 겁도 많다. 이들은 뭔가 믿으려면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처음 맺기가 힘들다. 5번 유형은 어릴 적부터 친구 사귀기가 힘든 사람들이다. 사고의 유연성이나 융통성이 부족하다. 공석에서 토론하거나 발언할 때도 원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스스로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고 이를 점차 확장해 나갈 때 그들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5번 유형에 대한 통합적인 해설을 정리해 본다. 아래의 글도 역시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 5번 유형은 어려서부터 궁금증이 많고 질문이 많아서 생각하고 관찰하고 독서를 하면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쓰며 살았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행동을 하지는 않는 성향이기 때문에 남들이 쉽게 행동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식에서, 특히 낯선 환경에 압도당할까봐 두려워한다. 또한 이들은 격정이 강화되면 자기도 모르게 탐욕에 빠진다.

5번 유형은 만 여섯 살을 전후해 부모와 양가적인 관계를 경험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잘 살피곤 했다. 자연히 관찰력이 커지면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분석하게 됐다. 이들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호기심이 큰 반면 고민도 많은 편이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신중할 만큼 회의적이다.

그러나 인색의 격정을 사로잡고 지식보다는 섭리를 따라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비(非)집착, 곧 초연의 덕목을 살리면, 5번 유형은 높은 이해심과 감지력으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리더의 금도와 초연한 자세를 드러낸다. 이들은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남달리 신뢰받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사색가 기질이 강한 5번 유형은 위기 상황에서 스트레스가 심하면 고립되거나 회의적이며 불안정해지기 쉬우나 남다른 이해심과 감지력, 분석력을 초연하게 살리며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

2. 5번 유형인 자신에 대한 성찰

198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아스 카네티의 그해 출간된 소설 󰡔두뇌 없는 세상󰡕(최근 개정판은 󰡔현혹󰡕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됨)이라는 책이 있다. 주인공은 서양인으로서 중국학을 공부하는 학자인데 자기 세계, 머리속에서만 살다가(1부-두뇌, 세상을 거부한다), 새 가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로 인해 자기 세계가 현실 속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2부-세계, 두뇌를 거부한다). 즉, 그 말은 현실적으로 무기력한 주인공에게 가정부는 온갖 부정,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다. 3부는 변증법적 귀결인데 현실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주인공이 가정부(부조리한 세상의 상징)를 대상으로 대립과 투쟁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그는 도서관처럼 높이 쌓인, 중국학 책으로 가득 채운 자기 서가를 불태우고 만다(3부-두뇌, 세상 속에 있다). 마치, “이 방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다는 말인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례가 5번 유형의 격정의 일단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자기 세계 속의 세상 만들기와 그 속에서 머무는 지식추구형 인간상의 한계.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5번 유형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양가적이라고 한다. 즉 존경하면서도 뭔가 밀어내는 느낌이랄까.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누가 있겠는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물에게 조차 그럴진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릴적 초등학교 시절 공부시간에 딴 생각을 많이 하고, 다른 데 쳐다보고 있는 적이 많아 단골처럼 통지표에 있던 말이 ‘주위가 산만하다’이었다. 사색적이어서 그럴까? 누구나 그렇듯이, 사실은 제일 참기 어려운 일이 별 새로운 것이 없는 말을 길게 할 때 아닌가? 아는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하는 선생님의 수업에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딴청을 부린 것 같다. 그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나는 모태신앙인이지만 기적과 부활 등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중고 시절 이런 걸 여과없이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내 믿음 없음과 소위 성령의 은사를 못 받음을 자탄하며 성령의 은혜를 구한 적도 많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몇 차례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부흥회에 참석하면서도 소위 은사를 구한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간절히 원하던 그 성령 체험을 내가 경험한 적은 없다. 믿기지 않은 일이 믿어지는 일은 정말 특별한 은총이겠다. 

내게 가장 감명 받은 책을 들라면 나는 렘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를 들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건 그저 뭔가 있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서는 아닌데, 나는 그 책으로부터 방대한 서양철학자들을 통해 사고의 다양성, 사유의 유형을 배운 탓이다. 2학년 여름방학 때 철학과 친구를 비롯한 다섯 친구들과 매주 모여 강독했는데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그들 사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그 말이 다 맞는 듯한데 다시 그걸 비판하는 다른 사상가의 말을 보면 또 그게 다 맞는 듯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사유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철저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IV. 5W4 나의 격정과 고백

4번 날개를 쓰는 5번인 나는 지독히 외로움을 느끼면서 지냈다고 자평한다. 특히 열 살 때 시골에서 인천으로 이사오게 되면서 친구도, 환경도, 터놓을 대상도 없이 고독하게 지냈다. 학교에서 매 쉬는 시간마다 뒤편 복도 창가에 가서 산을 쳐다보며 고향에서의 추억과 나의 현재의 외로움과 서글픔을 달랬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나마  자살이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은 굳이 말하자면 신앙심에서라기 보다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못 찾아서 그랬다고나 할까. 대학 1학년때 어느 대선배가 폴 틸리히의 󰡔존재에의 이유󰡕를 읽어 보고 나서 자살에의 충동을 벗어났다고 해서 그 책을 읽었는데(그 후로 틸리히의 사상에 많이 공감하게 되었다) 내게도 그 책은 나의 현실과 내 상태를 재발견하도록 도와준 소중한 책이었다.

4번 날개를 쓰는 5번 유형의 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게 직관이나 영성은 없는가? 직관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가? 나는 그렇게 논리를 신봉하고 있던가?” 그것도 아닌 듯하다. 적어도 논리를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때로 내게도 직관적인 면이 있기도 한데, ‘나는 원래 그렇다’는 식의 규정이 나를 옭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직관력이 결핍되었다는 말을 하니 연애 6년 결혼 17년을 같이 한 아내가 ‘당신, 직관력이 있어’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런가? 

그런데 아주 자주 ‘틀’을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이 3차례가 되면 참지 못하고 기어코, 억지로라도 규칙성을 만들어낸다. 소위,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2015년 에니어그램을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5번 유형인 내게 결핍된 ‘섭리’와 ‘은총’을 많이 생각하며 또 이를 구했다. 타인에게도 인사말로 ‘은총이 깃들기를’ 축원하였다. 또 내게 인색함이 무엇인지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인색이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지 않음만은 아니다. 남을 인정하는 일, 사유방식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 무엇보다 위에 무엇이 있다는 걸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이 인색함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물론 쉬이 고쳐지지는 않고, 또 아직 의문의 눈으로 위를 쳐다보기는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야 <데미안>을 읽어본 나는 통학길에 음대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지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가, “너는 그걸 이제야 읽었냐?”, “지성과 감성이 같은 레벨?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왜 이제야 하는냐?”는 힐난을 들었다. 또 2학년 때는 내 절친이 권해 준 슐라이어마허의 책 󰡔종교론󰡕은 아무리 읽어도 눈에 안 들어와 포기했다. 그가 말한 “종교는 형이상학도, 도덕체계도 아니다. 종교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본질적인 직관이며 감정이다.”라는 ‘절대의존의 감정으로서의 종교’ 사상이 이해되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여전히 감성, 직관, 계시, 영성이라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그 존재나 방식을 무시하려는 생각도 갖지 않는다.

되돌아가서, 내게 있을 직관력을 찾아가기로 한다. 모심이라고 할까. 더 너른 사유의 확장과 포괄적인 관계를 위해. 

<각주 설명>

1) 오강남은 “도마복음 해설”이라는 기독교사상 연재 글에서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상호 대비한다. “… 특히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 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 1:1)나 ‘지금’(요 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 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기독교사상」 589호, 2008년 1월호).

김영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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