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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르는 삶(갈 5:16~26)2016년 5월 22일 성령강림둘째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05.21 16:32

*영상설교: youtu.be/vwBeoIFXFKo

 

1. 원초적 고민

1)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고민은 욕망의 문제다.
결국 모든 문제가 식욕, 소유욕, 권력욕, 성욕, 명예욕 등을 성취하려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개인의 삶이나 역사의 문제나 이런 욕망을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죄로 인도하는 이기적 욕망을 한 마디로 육체의 욕심이라고 표현했다. 육체, 세상, 쾌락, 세속 문화, 정치/사회/경제와 같은 세상 자체를 악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고, 제어할 수 없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끝없이 확대하려는 욕심을 죄라고 했다.

붉은색 부분이 갈라디아 지방.

갈라디아교회 교인들도 자유로부터 오는 욕망의 무절제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유대교가 율법에 따른 신앙으로 엄격한 도덕 생활을 유지했다면 반면에 이러한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주장한 기독교는 답답한 율법주의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도덕적으로 무절제한 자유 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을 지니고 있다.

2)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조심해야 할 육체의 욕망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5:19~21)

바울로부터 2천년이 지났고, 지리적으로도 아주 먼 곳인 갈라디아지방의 교회들에 대한 경고이지만, 들여다보면 오늘 우리들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날이 갈수록 전 세계적으로 성적 타락의 문제, 다툼과 분열, 그리고 쾌락의 문화가 도를 넘고 있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본질을 상실한 문화가 심화되고 있다. 원초적/육체적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없이 탐욕스럽고 잔인해지는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지 모를 정도로 타락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가만히 내 속에서 울려나오는 솔직한 욕망의 소리를 들여다볼수록 우리들 각자 또한 부, 권력, 명예,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2.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1) 악의 평범성(Banality)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육체의 욕망(죄)은 모든 개인들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간직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욕망이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사회의 제도와 구조 속에도 그대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 심각하다. 즉 우리는 죄의 구조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히틀러의 심복으로서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나찌 패망 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그는 6백 만 명을 학살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악마가 아니라 집에서는 다정한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빠였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 그런 끔찍한 대량 학살을 저질렀고, 더 나아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찾아냈다.

영화 ‘한나 아렌트’의 일부 (1:37).

* https://www.youtube.com/watch?v=zOT53NwD60c

비인간적인 악과 맞닥뜨려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악이 아니라 선을 지향해가야 하는데, 아이히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단지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며 그래서 본인은 무죄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

그러나 아이히만이 만약 자신이 직접 유대인들을 만나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도 없었고, 자기 죄를 부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인 명령을 받을 때도 암호로 받고 살인 명령을 내릴 때도 암호로 내렸다, 5월의 축제라든지 파란 하늘이라든지! 이처럼 처참한 죄를 은닉한 채 통용되는 공문에 아이히만은 서명하는 것밖에 없었지만 실제로 그 서명에 따라 수많은 생명들이 가스실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다. 만약 그가 가스실에 직접 가서 처형하고 명령을 내리는 구조였었다면, 그러한 끔찍한 명령도 쉽게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전범 재판에서 그렇게 뻔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악을 직접 만지고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간접적인 관여가 더 무서운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점을 간파한 것 같다. Banality를 평범성이라고 번역했지만 딱 맞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말로 평범성은 특별하거나 비범하지 않다는 뜻이지만, 원래 아렌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섬뜩하고 무서운 악이 개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고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구조를 가질 때 악은 더 흉포해지고 잔혹해진다 정도의 뜻인 것 같다.

이러한 구조 앞에서 우리들 각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르게 되면 악마적 죄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아이히만의 죄는 이렇게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러한 죄는 무게는 다르다할지라도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마치 모든 물건 값에는 부가가치세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각 물건마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우리가 물건을 사고 팔 때마다 물건 값 계산하고 그 옆에서 또 별도 세금을 내는 구조라면 우리가 세금을 정말 많이 내고 있다는 것을 훨씬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세는 물건 값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별로 느끼지 못하고 별 불만 없이 그냥 사고판다. 이것이 간접세의 위력이다. 악의 평범성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안에 구조적으로 들어와 있는 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3. 죽음과 구원

1) 죽음과 구원
이와 같은 인간의 욕망을 바울은 육체의 욕심이라고 표현했고, 기독교는 다른 말로 죄라고 한다. 이 죄가 인간성 깊은 곳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 속에 체계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육체의 욕망이 우리사회의 구조에 속속들이 체계화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현대인들이 죄의 구조를 극복하기 대단히 어려운 이유다.

TV, 책, 영화, 휴대폰, 게임, 광고 등 모든 것마다 성적 자극, 폭력, 탐욕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돈의 노예가 되며 폭력을 용인하고 정당화하게 된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섬기고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은 어려워지고 만다. 이러한 구조는 권력, 자본, 언론, 기업 등이 촘촘하게 이익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자기도 모르게 육체적 욕망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인간 자체도 죄와 연관되어 있고 그런 인간이 숨 쉬며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도 악마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주장의 첫 번째는 세월이 가고 역사가 흘러도 인간은 죄인이라는 선언이다. 인간은 불신앙, 성, 쾌락, 탐욕, 분노와 파당 등에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2) 이웃 종교의 해결책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고민은 하나님 믿는 사람들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진정한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불교도 2,500년 전부터 이 문제로 고심했으며, 그 이전의 인도 종교도 마찬가지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했을 것이다. 세계의 고등종교는 나름대로 진지한 구원의 길을 찾고 해법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개 인간이 이러한 자신의 현재 상황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정말 쉽지는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으면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관점이다. 인간을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본다.

3)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는 이 점에서 좀 다르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자기의 죄 성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해도 인간 자신이 곧 구원의 능력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통찰이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웃 종교의 해법이 매력적이고 인간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같지만 나는 동의가 안 된다. 아무리 내 자신을 보아도 내 지식과 의지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고백이다. 죽음에 이르는 죄로부터의 구원이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기독교의 선언이 더 옳다고 믿는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고 증언하며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오늘 다른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이 고백에 동참한다는 뜻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 라는 형식적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고백에 동의한다는 것이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다.
기독교인은 그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한 사람이다. 바울은 이것을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4. 그리스도인 : 성령을 따르는 사람

1)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내 본성에 있고 내 주변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육체적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오늘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 성령을 따라 살라!(16절)
인간 혼자 깨닫고 수련하고 연습해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명상과 수련이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또 결정적 요소도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적이고 결정적 요소는 바로 내가 성령의 권능 안에 있느냐이다. 기독교 신앙은 간단하다.

“성령을 따라 살라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될 것이다.” (16절)

2)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막연하던 초대교회에 획기적인 가능성을 불어넣어 준 계기가 바로 성령강림사건이다. 불안, 공포, 무기력증이 만연하던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재하심으로써 새로운 변혁을 만들어냈다. 사람이 바뀌었고 공기가 바뀌었고 그 시대가 바뀌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등 여러 예언자를 통해서 성령의 강림을 말씀하셨고, 마침내 초대교회에서  실현시켜주셨다.

안톤 라파엘 멩스, '성령강림'(25.5*46cm, 1765년/ 성 페테스부르크 성당).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열심히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각 사람 머리 위에 불같이 내린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늘을 응시하고 그 옆 막달라 마리아도 가슴에 손을 얹고 성령을 받는다. 손에 열쇠를 든 베드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제자들은 놀라고 기도하면서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열심히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각 사람 머리 위에 불같이 내린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늘을 응시하고 그 옆 막달라 마리아도 가슴에 손을 얹고 성령을 받는다. 손에 열쇠를 든 베드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제자들은 놀라고 기도하면서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그림 위는 지상에 성령을 보내시는 하늘의 모습을 담았다. 맨 위 오른 손을 들어 창조주의 위엄을 보이시는 하나님과 그 옆 아래에서 방금 떠나보낸 성령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그림 중앙에 찬란한 비둘기 모양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재하신다. 천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주변에서 이 순간을 찬양한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인간의 이성, 수련, 의지 이전에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령을 영접하고 성령에 따라 살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믿음을 회복하는 곳에서만 새 인생, 새 교회, 새 역사는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 주신다. 이 단순한 선언이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고 성령이 내게 오심을 기대하며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 이 증언을 믿으면 된다. 내가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면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육체적 욕심과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교회의 시작도, 개인의 변화도, 교회 개혁의 힘도, 사회 변혁의 에너지도 모두 성령을 따라 살 때만 가능하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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