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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6년 5월 29일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누가복음 7:1-10<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6.05.26 14:13

신학적 관점
 
본문은 언뜻 보면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관한 기적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론을 보면 백부장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중심 주제임이 분명하다. 예수가 원격으로 백부장을 만난 사건을 통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속죄론적이고 기독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나?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는가?

백부장은 헤롯 안티파스 휘하의 군인이었다. 그는 유대교의 일신론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매혹된 이방인,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God-fearer)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여 <행10:28>) 중요 계명을 지켰지만, 최종적으로 할례를 받음으로 자신이 원래 속한 민족적 유대를 포기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의 선포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왜냐하면, 누가에 의하면 이방인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율법의 윤리적 요구의 준수를 통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본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는 외국인 (그가 사는 도시의 유대인)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회당도 지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웃, 즉 그의 종도 사랑하였다. 그의 행동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비슷했다. 그의 종은, 거의 죽게 된 상태였는데, 백부장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2) 이 말은 경제적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누가는 그런 기능적 차원보다 인간적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것으로 묘사한다. 백부장은 친구들(friends, philoi)을 갖고 있었다고 표현되고 있는데(6),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 백부장은 소중한 인간관계를 상실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2-6절에 나오는 백부장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자비로웠으며, 약자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었고, 다른 민족에게 친절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평지설교가 요구하는 윤리적 계명을 잘 지킨 셈이다.(6:17-19)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더해서 그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6b-9). 그는 예수를 “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믿음의 증거로 여겨진다.(kyrios, 6)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치유의 기적이 신적인 능력을 전해주는 중재자와 직접 접촉함으로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다.(5:17, 6:19 참고) 그와 다르게, 백부장은 원거리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이 자신의 종을 치유하는데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다. 백부장은 예수의 마술적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었다. 예수가 이 땅의 낮은 것(ecousia, 8, 4:6-8참고)을 다스리는 권위가 있음을 인정했다. 백부장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때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 효과가 완벽하게 일어났다. 예수가 이 이야기 끝 부분에서 백부장의 믿음이 놀라운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이유는 예수의 인격과 권위에 대한 그의 깊은 수준의 신뢰 때문이었다.

백부장이 보여준 “사랑과 믿음의 통합”의 모범은 개신교 독자에게는 도전을 준다. 펠라기우스파와 후대의 여성주의 학자들은 이 백부장과 고넬료 이야기(행10)를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은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백부장의 순종과 믿음에 놀란 것 같다. 이 믿음은 예수가 부여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9)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이 백부장의 믿음을 일어나게 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칼뱅은 예수가 종을 육체적으로 치유하기 전에 백부장을 영적으로 치유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믿음의 근원에 관한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가 믿음을 환대의 공동체(a community of hospitality) 안에서 이루어 진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백부장은 인격적으로 예수를 신뢰했고, 그의 힘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했다. 개신교의 중요한 “은총에 의해, 믿음만을 통한 구원”이라는 원칙은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에도 적용된다. 백부장은 예수의 말씀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적으로 의존했고, 예수 앞에서 자신을 낮췄다. 백부장은 그의 종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의 병에 관해서는 도움이 되는 한마디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은 예수를 만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17:10 참고) 그는 자기가 자격이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예수를 간절하게 붙잡았다.(9:24) 마지막으로, 그의 믿음은 예견적(proleptic)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믿고 있었지만,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완전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22-24장)

백부장이 이렇게 매달리는 예수는 누구인가? 우선 예수는 치유자이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가득 찼고, 의사(5:31)처럼 귀신을 쫒아내고(4:31-37,41), 나병, 중풍병을 비롯한 온갖 병을 고치신다. (5:12-32; 4:38-40)

이런 축사와 치유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로서 예수가 행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치유 이야기를 예언자가 시리아 장군 나만을 치유한 이야기와 연결시킨다.(4:27; 9:19 참고) 나만도 비유대인이었고,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엘리사는 그를 만나지 않고 말을 전함으로 나병을 치유했다.(왕하 5:1-14). 두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가 비유대인을 치유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왕하 5:8)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나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하나님의 메시아,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구원의 심판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에 관해 선포했다.(9:18-20; 4:14, 18-21) 이전의 축사와 치유의 경우처럼, 예수의 말씀(7:7)은 야훼의 말씀의 능력을 갖고 있어서 죽음의 세력을 제압하여 본문을 다음과 같이 맺게 하였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7:10)

Gregory Anderson Love, Associate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San Anselmo, California
 
주석적 관점

- 눅 4:18-19에서 예수는 그의 사명과 사역의 방향을 선포했다. 주님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예수는 주의 은혜의 선구자, 해방의 선포자, 치유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누가는 그의 고향사람들에 의해 예수의 사역이 거부되는 것을 보도한다(4:23). 예수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함을 상기시키는데, 구체적으로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치유한 것이나,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깨끗해 한 것을 언급하면서(4:25-27) 어떻게 엘리야와 엘리사를 대했는지 상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누가는 하나님의 목적이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는 동기와 진실로 돌아간다.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이 예수도 그의 메시지를 유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누가는 이 에피소드를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사회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확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용했다.    
 
- 평지설교까지는(6:17-49), 누가는 마가1-3장의 문학적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평지설교에서부터는 마가의 순서를 벗어나 8:4까지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작은 개찬(改竄)”이라 불리는 이 부분이 마태의 설화와 내용을 공유하고 있지만, 많은 자료들은 누가의 것이고 누가의 아이디어, 이해, 그리고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부각시키고 있는데, 그의 주장과 믿음이 그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러한 관심들은 본문 구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의 진짜 믿음의 예(7:1-10, 36-50)로 시작하고 끝맺는데 예수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대리자로서 계시하는 구절들이 중간에 있다(7:11-17,18-35).

-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뒤에”(1) 라는 흥미있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충실함을 들음과 행함 둘 다로 정의하는 6:46-49과 연결된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백부장이 그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낸다. 유대인 장로들 대표가 그의 종이 심하게 아픈 로마의 백부장을 대신하여 예수께 다가온다.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주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서 예수께 그를 소개한다. 누가는 엘리사가 나아만을 치유한 이야기(왕하5:1-14)를 분명히 예시하고 있다. 두 이야기 모두 높은 직위의 군인인 이방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예언자에게 기적적인 치유를 요청하고 있고, 예언자에게 요청하는 것이 직접 보고 하지 않고 대리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치유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 차이점도 있다. 나아만이 처음에는 엘리사의 처방을 거부했는데 비해, 백부장은 예수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가 무엇을 시키든지 기꺼이 따랐다. 대조는 누가에게 중요하다. 예수는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이지만 그보다 더 크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가운데 세우신 위대한 예언자이다(16). 백부장에 의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수용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 백부장이 보낸 대조적인 대리인들 이야기도 중요하다. 우리가 보듯 첫 번째 대리인들은 지방 회당에서 온 유대인 장로들이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문화적 종교적 분리로 인해 백부장은 직접적으로 예수께로 접근할 엄두를 못내고, 오로지 그를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중재자들을 통해 접근했다. 두 번째 대리인들은 백부장의 친구들이다(6). 누가는 그들을 대리인이 아닌 백부장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한다. 첫 번째 대리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두 번째 대리인들은 백부장의 자격 없음을 강조하고 예수께서 그의 집에 직접 오시지 않도록 요청한다.  

- 백부장은 유대인 장로들이 말한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평가의 요소를 바꾼다. 그는 자신과 예수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다. 피상적으로 백부장의 선언은 그가 유대인들의 감수성을 인지하는 또 다른 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예수께 직접 다가가지 않고, 또한 집으로 오시지 않도록 요청했는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방인과 접촉하러 옴으로서 종교적 오염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부장이 그가 자격없다고 말한 이유는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군사적 경험을 통해 백부장은 권위의 표시와 명령의 사슬을 배웠다. 그는 평생 명령을 내리고 받는 삶을 살았기에 그들에게 부여된 권력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기적적 능력에 대해 듣고, 그는 예수가 가진 권위를 인식했다. 백부장은 이 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명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능력을 가진 것을 알았다.  

- 벡부장은 또한 예수의 권위는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그가 그의 부하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것이었다. 비유적으로  만약에 그의 능력이 인간의 권위에게 온 것이라면 인간의 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그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다. 백부장이 단순히 명령을 내림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것처럼 그는 예수께서 단순히 말씀만 하셔도(7) 종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다(10). 누가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능력은 공간에 제약을 받거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정된 사람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백부장은 이를 이해하고 있고, 그가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했기에 그러한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그의 믿음을 칭찬한 이유이기도 하다(9).

- 누가는 예수의 시인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에게서 믿음을 발견하는 놀라움을 기록했다. 슬프게도 그가 진짜 믿음을 발견한 것은 이스라엘인이 아닌 국외자에게서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또한 그러한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누가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명령을 내릴 때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바라보셨다고 기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그를 모범으로 세우고, 그들 또한 이러한 믿음을 본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Steven J. Kraftchick, Associate Professor of the Practice of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Candler School of Theology, Emory University, Atlanta, Georgia
 
목회적 관점

겉으로 보기에, 오늘 장면들의 분주함은 결국 한 사람의 믿음과 그로 인한 다른 사람의 치유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예수님이 백부장이나 그의 종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지에 대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백부장을 위하여 유대 공동체는 말을 아주 잘 해주었다. 이들 공동의 목소리는 단순히 이들 두 주인공들이 무대 밖에서 그들이 등장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합창단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 자신이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백부장은 예수가 그의 종을 고치도록 설득하려면 그가 속한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 같다. 그는 먼저 유대의 장로에게 그가 가치있는 사람임을 증언하도록 요청한다. 그는 예수가 와서 “나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설득해 달라고 한다. 이 군인과 유대 공동체 사이에는 강한 유대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회당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단순한 후원자 이상이라는 것이다. 장로들은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들의 간청에 감동을 받았든지 아니면 적어도 호기심을 가졌든지, 그들을 따라갔다.

장로들이나 백부장의 친구들이 그가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빠뜨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예수를 향해 달려가서 그 자신의 사정을 애원하려는 충동을 억제한다. 그 대신 그는 예수를 찾아내서 그에게 “나는 가치없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오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해 줄 한 무리의 친구들을 보낸다. 그는 때로는 어렵고 가혹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지휘하는 장교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의 절정을 본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7절).” 장교의 의도는 극적이고, 예수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예수는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고 말한다. 백부장의 종이 이런 영웅적인 노력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친구들의 무리가 최종적으로 한 행동인 증언은 치유 자체를 거의 군더더기가 되게 한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이야기에서 중심 인물이 종과 그의 주인이라는 인식과 싸워야 한다. 백부장이 그의 종을 “소중한 종(2절)”이라고 말할 때 그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군인이 존중하는 종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겨서 그러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이들의 관계가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어서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 때문에, 이 백부장이 그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행동할 때, 특히 질병과 비극의 시대에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관계망을 가지고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이 그 백부장이 더 큰 공동체를 책임져 왔는지 이야기하면서 그를 치켜세워서 그 군인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할 때 시작되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5절).” 이 두 가지 일은 어떤 의무도 없는 군 장교가 제공한 애정과 돌봄의 표현일 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과 헌신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중심이 되는 교리이다.

이 이야기는 믿음이 고독한 노력으로 남을 수 있다는 인식에 도전한다. 특히 우리처럼 서구에 사는 사람들은 개인의 용맹함 속에서 더 큰 힘이 발견된다고 믿는 문화적인 조건 속에 있다. 영적으로 이것 자체가 믿음을 공적인 일이기 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지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 가치있는 일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지만, 너무 자주, 다른 사람의 일에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관용을 받는 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취약하거나 부끄럽거나 부담스럽다고 느껴서, 우리가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친절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

내가 남수단의 야만적인 내전의 생존자로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가정이 지금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난민 캠프에서 15년 이상을 보내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2005년에 조인된 포괄적인 평화 협정은 총성은 멈추게 했지만, Dinka 부족들에게는 건강과 생계는 전혀 회복시키지 못했다.{Dinka 부족은 남수단에서 가장 큰 부족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부족의 오랜 전통으로 공동체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졌다. 음식과 의약품이 매우 부족했고 유일한 의사가 지방 마을에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오늘 이야기의 종처럼 Dinka 사람들은 그들을 대신해서 말해 줄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이것은 지방의 관료들과 협상을 해야 하거나 외국에 사는 가족들에게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연약한 몸을 마을에 있는 교회로 옮겨 와서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원이 없거나 고갈될 때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할까? 종종 우리는 무언가 갈망하는 것이 있거나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침대 옆에서 철야 기도를 해달라는 식으로 사적인 신앙에 집착한다.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로 불러내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간단한 짐일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도달했을 때, 너무 자주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혼자 지탱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실패했다고 느끼게 된다. 사실 믿음의 뿌리는 개인의 가슴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나 살아 온 믿음은 그 자신을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더 큰 공동체를 요구한다. 특별히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에게 말해 줄 믿음의 공동체, 우리에게 정당한 이름을 주고 우리를 책임 있는 사람으로 유지해 줄 공동체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인생의 기쁨과 도전과 비극을 만나게 돕고, 우리 각자의 예측할 수 없는 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화해하게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M. JAN HOLTON Assistant Professor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Yale Divinity School, New Haven, Connecticut

설교적 관점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가 본적이 있는가? 수 년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내가 봉사하던 단체의 이른 저녁 모임에 초대되었었다. 초대한 이는 이 단체에 온 지 얼마안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녀의 집 방문이 처음이었다. 인쇄된 약도를 따라 운전하고 가다보니 큰 저택 앞에 차를 주차하게 되었다.  그 저택의 주소는 집 앞에 표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주었던 초대장의 약도는 그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문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부엌에 몇몇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그 집 뒷 뜰로 가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였다. 몇 분간 모르는 이들과 잡담을 한 후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스미스씨 집이 아닌가요?” 나는 말했고 그들은 “아닙니다, 스미스씨 집은 옆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왜 내가 여기 왔는지를 묻지 못했는 데 그 이유는 혹시 파티에 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초대해놓고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몰라서 그랬다고 하였다.  

-이번 주와 다음 2주 성서정과 복음서는 예기치 않았던 손님들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관한 것이다. 각각의 본문에서 손님은 어떤 형태의 환대 (hospitality)를 받는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침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는 상황이다. 그 곳은 이번 주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으로 한 백부장이 예수께서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의 명성이 이미 그에게 알려져있었다. 그 백부장은 예수의 파티에 초대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였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있었다. 그의 종들 가운데 그가 사랑하는 종이 매우 아팠다. 초대받지 않은 예수의 거실로 직접 갈 만큼 뻔뻔하지 못했던 그는 유대장로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와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치유해 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9-10절). 예수는 원격으로 그 종을 치유했고 백부장 곧 이스라엘의 밖에 있던 그의 믿음은 인정받았을 것이다.
 
-이 본문은 몇 가지 면에서 난해하다. 먼저 1세기 상황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는데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종이(slave) 있었다는 점이다. 탈무드는 주전 200부터 주후 400년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있어 다양한 형태의 종의 상태에(status) 대해 서술하고 있다. 로마 가정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조직표에서는 다양한 종들과 가족들 사이에 있어 책임과 권위의 한계를 규정하고 있다.[1세기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종’이라는 게 불가능하다는 관점인 듯] 이 백부장은 관습과 법에 따라 한 무리의 군인들을 명령하는 일과 또 한 가정의 가부장이라는 역할에 익숙해있었다. 비록 1세기 노예제가 18-9세기 미국의 노예제와 매우 다르지만 불평등한 관계는 동일하다. 이런 불평등에 기초하여 백부장이 예수 앞에서 자신의 지위와 종의 그것을 비교할 때 그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부장은 자신이 사랑하는 종이 그 집의 여느 종처럼 명령을 따른다고 예수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종과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종에게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은 나를 위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주제는 백부장이 이런 축복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들린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가치는] 이스라엘 집의 구성원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장로들에 의하면 “그는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 (5절)이다. 비록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히 동정심이 있었고 심지어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 점이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은 예수의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가? 예수는 부자들에게 커다란 영예를 부여하는 관행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그는 백부장의 종을 고쳤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많은 돈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커다란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는 충실한 믿음은 멤버쉽(이스라엘 집)이나 사회적 지위 (노예 소유자) 혹은 경제적 상태 (큰 재정적 기부를 하는)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장로들이 의에 대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약한 사람을 치유하였다. 그 종은 발언권이나 투표권 없는 소외된 자리에(on the margin) 살고 있었다. 그는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자신에게 자비심을 베풀어 준 주인을 위하여 일했다. 백부장은 그를 보다 건강한 종으로 대체하면서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 쯤으로 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믿음을 통한 백부장의 종을 치유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이런 문화 속에서 가장 약한 자에게까지 확대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제자들과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도 확대되는 것을 가르쳤다.  

Verlee A. Copeland, Senior Minister, The Union Church of Hinsdale, United Church of Christ, Hinsdale, Illinois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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