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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속의 도(道), 전승을 통해 영글어가는 ‘보편(理)’<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20> - 『논어19권』자장편
이은선(세종대) | 승인 2016.06.07 11:01

<명구>

「子張篇 6」: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장편 6」: 자하왈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해석>

자하가 말했다.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고,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

<성찰>

이 편은 논어의 마지막 두 편 중 하나로 공자 사후 제자들의 언술로만 이루어진 장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자장(子張, B.C.503-?), 자하(子夏, B.C.507-?), 자유(子游, B.C.506-?), 자공(子貢, B.C.507-420), 증자(曾子, B.C.506-436) 등 다섯 명인데, 예수 사후 그 삶과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그 전승의 과정에서 이해의 차이를 보이듯이 여기서도 그러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이 편의 이름이 된 제자 자장은 공자보다 49세 어린 최연소자인데, ‘선비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하고(見危致命), 이익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의(義)로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見得思義), 특히 제사와 상사(喪事)에 공경과 애도를 다할 것(祭祀敬 喪事哀)’을 강조하였다. 이런 이야기 끝에 그는 “그만하면 되었다고 할 것이다(其可已矣)”라고 한 것을 보니, 스승 가르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여 전하고자 한 것 같다.

이번에 우리가 표제문으로 삼은 말은 살아생전 공자와 흡사하게 닮았다고 하는 제자 자하(子夏)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춘추전국시대가 가고 한나라(漢, B.C.206-A.D.220) 이후 거의 천여 년 동안 불교나 도교에 눌려있던 유교가 송나라(A.D.960-1279)때 다시 신유교(新儒敎)의 모습으로 부흥하면서 거기서 중요한 독본이 된 <근사록(近思錄)>의 명칭이 연원한 것을 볼 수 있다. 

<근사록>은 주희(朱熹, 1130-1200)와 그 친구 여조겸(呂祖謙)이 북송 시대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장재(張載, 1020-1077),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등 유교 현인들의 말씀을 편해놓은 책이다. ‘가까운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찰함(近思)’이라는 이 용어는 실천과 공부, 道와 學, 현실과 이상의 하나됨을 지향하는 유교적 가르침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주희가 나중에 그것을 독본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리라.

이 짧은 세 절의 문장 안에서 그러나 나는 인간적 삶의 전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본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정신의 삶, The life of the mind>에서 인간적 삶을 ‘사고(thinking)’와 ‘의지(willing)’, 그리고 ‘판단(judging)’의 세 가지로 본 것과 유사하게, 공자의 인(仁), 인간다움, 인간적 삶, 또는 더 보편적으로는 ‘생명성(性)’이 세 가지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인간의 삶도 포함해서 생명은 ‘관계(relatedness)’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박학(널리 배움)’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관계 속에서 지낼 것, 그것도 넓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공부이고, 책을 읽는 것이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며, 여행을 하는 것 등이라는 의미이겠다.

‘독지(뜻을 돈독히 함)’, 우리는 생명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뜻을 가지고 있고, (삶의) 원초적 의지가 표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주체로 자각한다는 것은, 진정한 관계 속에 산다는 것은 그 뜻을 한 차원 더 고양시키는 것이 아닐까? 삶에서 뜻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을 독실하게 찾고 밀고 나가는 것, 인간적 원함(willing)과 소망(intention)을 갖는 것을 말하는데, 공자는 그 일을 인생의 시발점(立志)으로 보았고, 자하는 그것을 인(仁)을 향한 독지로 보았다.

그 뜻을 찾아나가는데서 절실해야 한다. 절실하다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이 확실히 다가오는 것, 즉 느끼는 것(feeling)에 주목하는 일이다. ‘절문(절실하게 묻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느낌과 직관에 주의하는 일이므로 유교나 공자의 인, 또는 우리의 사고하는 일이 느낌이나 몸의 감각, 직관 등과 관계없다고 하는 것은 이 초기 유교의 전승을 왜곡하는 일이다. 절박하게 묻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몸의 느낌과 감각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근사(近思)’, 가까운 일에서부터 생각해 나감(thinking)의 일은 결국 판단(judging)의 일을 위함이다. 우리 삶의 관계 속에서 느끼고 소망하는 일을 어떻게 삶에서 바르게, 통합적으로 판단과 행위로 표현해 내는가가 삶의 관건일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thinking), 잘못된 욕망(willing)에 굴복하지 않고, 주관적인 느낌(feeling)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잘 살아내는 일(judging, acting), 이것이 인간 보편의 일이고, 결국 이 일은 기독교도 불교도 마찬가지로 목표로 정진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삶의 보편을 유교가 참으로 ‘보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래서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위해서 유교 영성이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 참으로 풍성한’ 영성으로서 크게 역할 할 것을 기대한다.

이 편에서 나타나는 제자들 간의 의견 차이와 갈등 등은 이러한 인간적 삶에서 어떤 활동을 더 중시 여기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자 자유(子游)는 자하의 제자들이 이러한 수행의 과정에서 “물 뿌리고, (어른들의) 부름에 응답하고, 질문에 답하고, 나오고 물러나는 몸가짐의 일(灑掃應對進退)” 등의 일상의 몸 습관들이는 일은 잘하지만 거기에 몰두하느라 ‘(고차원적인) 공부하는 일(學)’은 잘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러자 자하는 “군자의 도에 있어서 어떤 것인들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처음도 잘하고 끝도 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다(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라고 응대하였다. 다시 한 번 유교 영성과 도의 추구는 어떠한 일인가를 잘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섬세한 일상적인 예절로부터 시작해서 크고 높은 하늘의 도를 논하고 구현하는 일까지 두루 섭렵하여 잘하기는 정말 어렵다. 유교적 성인의 추구는 그래서 일상을 떠나서 출가하는 불교나 교회라는 구별된 장소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그것보다 어렵고, 정말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일이라는 지적이 있다-바로 가장 세속적인 일과 장소로 여겨지는 정치나 교육, 가정 등에서 도를 추구하는 일이므로-.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나뉘어져 어떤 이는 큰 도를 이루는 일이나 선비로서의 공적 공헌을 우선시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오히려 스승의 참 뜻은 세세한 일과 일상생활 속에서 예를 다하는 일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전하고, 그에 대한 존숭을 표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공자와 유교 가르침의 핵심과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한다. 증자가 전하기를, ‘평소에 자신의 일에 정성을 쏟지 않는 사람이라도 어버이의 상(喪)을 당해서는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하고’, 또한 ‘부모 세대를 향한 孝 중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은 부모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 뜻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그만큼 유교적 도는 이세상적 ‘세대를 잇는 전승’과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통한 뜻의 실현’을 중시여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제자에게 묻기를 너희 선생님은 어디서 배웠느냐고 했다. 즉 어느 특정한 학파나 스승을 물은 것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자공은 대답하기를, “문왕과 무왕의 도(文武之道)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 문왕과 무왕의 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어디에서나 배우지 않은 데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일정한 스승을 모셨겠습니까?(...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라고 했다. 이 대답 속에서 모든 사람, 모든 경우를 통해서 배우고 깨닫고, 깨우치는 일을 계속해 나간 공자를 그려볼 수 있고, 여기에 하늘 부모님을 모시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몰두했던 효자(孝子)로서 의 예수, 그도 역시 어느 특정한 선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삶을 오버랩해서 그려볼 수 있다.

자신들은 이러한 인격의 진수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라고 제자들은 고백한다. ‘집의 담장에 비유하자면 우리 담장은 어깨에 닿는 정도여서 안의 좋은 것을 다 들여다볼 수 있어 오히려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않으면 안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볼 수 없는데, 그 문을 찾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자신들의 스승 공자는 그러하고, ‘다른 사람들의 현명함은 넘어갈 수 있는 언덕 정도이지만, 스승 공자는 해와 달과 같아서 넘어갈 수 없고,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며 그와의 인연을 스스로 끊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와 달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되묻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제대로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을 드러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오늘 이런 인격의 스승을 그리워한다. 그런 스승을 모시고 배우고, 그것을 다시 다음 세대로 전승하고, 그런 가운데 우리 세대와 인간 삶과 이 지구와 우주는 점점 더 큰 대동(大同)의 가능성을 이루어갈 것이다. 그 일의 기초가 좁은 반경의 가족적 삶이고,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서 ‘탄생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본분을 행하고, 다시 자신도 누군가, 무엇인가를 다음 세대를 위해서 탄생시키는 일을 하는 것, 유교적 전승이 우리에게 삶의 보편으로 전해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2016년 6월, 어린이의 날, 어버이의 날, 스승의 날이 있던 5월을 보내고, 집안의 혼인식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 가장 가까운 일에서 바르게 살피고, 느끼고, 판단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그런 일상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가서 스페인의 산티아고의 길(the way of Santiago)처럼 구별된 성스러운 길을 걸을 때는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시 일상과 삶으로 돌아와서 혼인식을 준비하고, 자식과 아내, 엄마, 선생으로서 가장 가까운 일상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니 ‘근사(近思)’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실감한다. 그래도 해보려고 한다.

이은선(세종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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