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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사랑법] 사랑은 '대상'의 문제 아닌 '행위'의 문제<민중신학의 사랑법과 한나 아렌트의 아모르 문디> ①
이인미 | 승인 2016.06.07 15:14

이웃이 누구입니까? 민중이 누구입니까?

나는 민중신학을 연구주제로 석사논문, 박사논문을 썼다. 그 두 논문은 구상·집필의 단계를 거치는 동안 내게 꽤 재미있는 사연들을 선사했다. 연구주제를 설명하며 내가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를 발설할 때 그것이 듣는 이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자극하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 말을 듣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그러니까 도대체 민중이 누구라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시한폭탄처럼 품고 있다가 내 말이 끝나자마다 펑 터뜨리는 이들이 있었다. 

‘민, 중, 신, 학,’ 네 음절을 발음하고 내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그 질문이 나온 적도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질문하는 거라며 양해를 구하는 예의를 갖춘 경우였다. 요컨대, 많은 이들이 ‘민중이 누구입니까?’에 대한 답(개념정의)이 내 입에서 나오기를 고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고대’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학문연구에서 개념정의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하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나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그 옛날 한 율법교사의 질문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눅10:25-37, 새번역)

빈센트 반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에서 율법교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영생(구원)을 얻게 해준다는 것을 잘 말했다. 그는 예수로부터 “네 대답이 옳다”는 칭찬을 듣고 의기양양했다. 그는 예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율법교사는 이웃사랑을 생각하면서 ‘누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똑같이 이웃사랑을 생각한 예수는 ‘누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율법교사는 사랑할 대상이 누구인가에 관한 개념정의를 우선시하는 반면, 예수는 “그대로 행하여라” 혹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는 말로 ‘행위’를 일관되게 강조한다. 여기서 잠깐. 나와 대화하는 중에 “민중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분들을 내가 예수의 대척점에 있었던 율법교사로 판정한 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런 판정을 할 권한은 내게 없다.

예수의 의도, 지식층(intelligentsia)의 의도 

나는 민중신학이, 율법교사에게 행위를 강조한 예수의 입장을 정확히 환기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민중신학은 예수의 입장을 근본의 차원에서 이어받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누구’로 개념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민중신학은 ‘제3세계신학’이나 ‘상황신학’ 같은 이름보다는 그냥 ‘기독교 정통신학’으로 불리우는 게 더 어울릴 성싶다. 민중신학은 이웃 같지 않은 사람들(오합지졸)과 함께한 예수의 활동을 강조하였다(안병무: 1990,137). 갈릴리의 민중와 함께한 예수의 선교를 기독교의 핵심으로 제시한 서남동은 민중신학이 “기독교의 원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서남동: 1983,259). 조지 오글은 자신이 민중신학의 진실성을 확신하게 된 까닭을, 민중신학에 “신약성서의 본질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조지 오글: 2010,93).

민중신학은 민중을 누구로 개념정의하지 않으려 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저는 민중을 한 마디로 말한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게 아니라 개념과 실체의 유리를 경계한다(안병무: 1988,27). 그의 민중 개념정의 거부는, 민중의 정체를 탐구·규명하는 이론작업보다, 민중과 함께하는 실천행위에 관심이 더 컸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자신의 민중신학을 학문적·이론적 작업 이전의 것으로 일컫기도 하였던 안병무이기에(안병무: 1988,73), 새로운 철학개념으로 민중을 제시할 필요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리하여 그의 민중 개념정의 거부는, 이웃이 누구냐 궁금해 하는 율법교사에 대하여 행위를 강조한 예수의 응답, 예수의 의도에 이어질 수 있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개념(이론)과 같이 가지 않고, 행위와 같이 간다. 나는 민중신학이 ‘민중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통찰만큼은 갖고 있었다고 본다. 특히 초창기에는 그랬다. 현영학은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이라는 낱말을 사용할 때 잘 정리된 어떤 개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현영학: 1997,93). 그는 민중이 고정된 개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일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은 민중 개념정의 거부라는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였다. 민중 개념정의를 반대하는 민중신학의 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개념정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적 논의로 추상화되어간다. ‘떠오르는 신생신학’ 민중신학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독일 신학자들의 편지에 대한 1986년 답장에 그 추상화경향이 이미 상당히 드리워져있음을 볼 수 있다(신학사상편집부: 1990-여름, 411-414). 현영학은 머리로 사는 지식층이 몸으로 사는 민중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현영학: 1997,74), 민중신학자들마저 어느 순간부터 머리로 살기 시작한 것 같다. 민중을 개념정의하려는 의지는, 말하자면 앞서 율법교사의 습관처럼, 지식층의 습관일 수 있다.

지식층은 무엇이든 대상화함으로써 생각을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지는 “내가 사랑할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질문한다. 객관적 사유, 비주관적 사유(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분리함), 대상중심의 사유이다. 연구를 위해서는 그런 질문의 단계(개념정의)가 필요하다. 대상을 묻는 질문(개념정의)에 대상을 설명하는 응답(개념정의)을 하면, 대상에 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다. 그때 사랑이 시작되는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 사랑할 수 있는가? 이웃이 누구인지 알면 이웃과 선한 행위를 주고받으며 소통할 수 있는가? 대상중심사유에는 한계가 있다. 연구·사색은 행위·실천을 때로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오윤 판화작품

‘민중’에 대한 개념정의 거부는 행위로서의 이웃사랑

예수는 율법교사가 제기하는 중심주제에 같이 뛰어들어 논의하지 않았다. 예수는 율법교사가 전개한 생각의 프레임(frame)에 들어서지 않았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는 율법교사가 가리키는 달(the moon)에 시선을 두지 않은 것이다. 예수는 달을 가리키는 율법교사의 손가락을 문제 삼았다. 동문서답인가? 논의의 초점을 이해 못한 아둔함인가? 아니다. 그것은 질문자의 프레임을 향하여 질문자 스스로 자기경험을 근거로 반추해볼 수 있도록 이끄는 ‘자극’이었다. 사랑은, 달(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손가락질(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민중신학도 예수를 따라 그렇게 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나는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정의 거부의지를 이웃사랑에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낯선 설명방식이었을지 모르겠다. 어떻든 철학, 정신분석학, 사회과학, 기타 포스트모더니즘 등 책상머리의 식자층이 선호하는 지식추구의 방식은 아니었다. 앞으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중신학을 이야기하는 글을 나는 몇 편 더 쓸 계획이다. 나는 기존하는 민중신학에 대하여 색다르게 접근하여 남다르게 설명해보겠다. 창조적 재구성이라 불러도 좋고, 독특한 해석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나의 글은 ‘민중신학과 나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이응노 <군상>

향후 나의 글들을 통하여 민중신학의 논의였음에도 이제까지 조명 받지 못했던 특정한 내용들이 밝은 빛 아래 드러나리라 기대한다. 이제까지 비교적 조명 받지 못했던 분야 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내용들은 ‘민중신학의 사랑법’이라는 주제 아래에 묶인다. 나는 민중신학의 사랑법, 즉 민중신학이 펼친 사랑의 이론과 실천을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아모르 문디(Amor Mundi, 세계사랑)’에 연결하여 서로 견주고, 마침내 공동체적 사랑 그리고 예수의 사랑(기독교적 사랑)에까지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제부터 민중신학의 사랑법과 한나 아렌트의 아모르 문디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중요한 용어들 중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문제의식의 공유를 위하여) 먼저 제시한다면, 그것은 ‘행위(action)’이다. 나의 글들은, 믿음을 저해하는 ‘업적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갈5:6)”에서 보듯 믿음과 일치된 실천으로서의 행위를 이야기한다. 이는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현상 이분법의 극복 혹은 믿음/행위 이분법의 극복을 위한 노력일 수 있다.

<도움 받은 글>

서남동(1983),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신학사상편집부(1990), “연구자료-민중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의 대화” 「신학사상」 제69집 
안병무(1988), 『민중신학이야기[개정신판]』(서울: 한국신학연구소) 
안병무(1990), 『갈릴래아의 예수』(천안: 한국신학연구소) 
조지 오글(2010), “한 미국선교사가 본 민중신학,” 이정용 편저·연규홍 옮김, 『민중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서울: 동연)
현영학(1997), 『예수의 탈춤: 한국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천안: 한국신학연구소)

 

<필자 소개>

글쓴이 이인미는 2016년 2월 성공회대 신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Th.D).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에서 오래도록 활동해왔으며(간사 혹은 자원활동가로), 현재는 1953년 설립된 새가정사에서 제15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였고, 공교육·사교육·출판사·신문사·방송사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다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하여 비로소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언어), 사람의 행위, 말과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에 깊은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나 아렌트 정치이론과 신학이론의 대화를 계속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인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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