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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귀태(鬼胎)인가? (3)<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6.07 14:57

박정희의 종교, 「힘」 (2)

박정희의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 3년

1937년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는 곧 이어 분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박정희에게 있어 그 곳은 일종의 병영(兵營)이었다. 교사(校舍)는 일종의 막사(幕舍)요, 학교의 운동장은 영락없는 연병장(練兵場)이었다.

이상스러우리만큼 박정희는 군사훈련을 좋아했다. 어린아이들을 직선으로 줄 세우기, 운동장 안에서나 학교 밖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도 예외 없이 구령에 맞추어 걷고 뛰게 했다. 어쨌든 박정희는 속된 말로 군인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어린학생들로 악대를 조직했다.

그는 사범 재학시절부터 공부는 꼴찌면서도 체육과 음악(특히 군가 부르기)엔 대단한 실력을 과시했고 특히 사격훈련과 교련에는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다. 당시 현역 육군 대령으로 교관부장에 재임 중이던 아리카와(有川)가 사관생도를 뺨칠 만큼의 박정희의 교련자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정도였다.

대체적으로 박정희의 역사를 쓴 이 들이거나 혹은 쓰고 있는 이들이 특히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시절의 박정희를 당시 박정희의 제자들의 증언이라면서 이렇게 미화하고 있다. 

“그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서 5.6학년 수업 시간엔 급장을 복도에 세워놓고 이순신 장군 이야기,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박 선생님이 어느 날 품속에서 꼭꼭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펴 보이셨습니다. 큼직한 백지였는데, 거기 뭔가를 열심히 그리셨습니다. 선생님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 그림을 보이시더니 ‘너희들 조용히 보기만 해야 한다. 이게 뭔 줄 아니? 이게 조선 국기라는 거다’하셨습니다. 그리곤 더욱 소리를 낮추어 ‘절대로 밖에 나가서 이거 얘기하면 안 돼, 알겠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끼리 있을 때는 꼭 우리말을 쓰자고 다짐하곤 하셨습니다. 철없는 우리는 아무 의미도 모르고 ‘선생님, 조선말하면 퇴학당한다는 데요’ 했더니 선생님은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어쨌든 씩씩하고 굳센 조선 사람이 되어야지…….’하셨습니다. 그때 철없는 저희들의 말에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선생님은 우리들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시는데도 제자들은 그저 무감각하기만 했었으니 말입니다…….”

조갑재를 비롯한 박정희 일대기 기자들의 박정희 예찬은 그야말로 또 다른 박정희론(論)자들의 정반면(正反面)을 이룬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하면서 주변을 놀라게 한 것은 학교 운동장 복판에서 불어대는 이른 아침의 기상나팔이었다. 그 기상나팔을 불어대는 시간을 대체적인 자료들은 여섯시쯤으로 전하는데 「조갑재의 박정희」에는 새벽4시에서 다섯시쯤이라면서 ‘박정희의 나팔 불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박 선생은 제자들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 박선생은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운동장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나팔을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여물을 끓어야 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분명히 조갑재는 그렇게 말했다. 박정희의 그 새벽 나팔이 “잠든 민족을 깨워 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던 셈이었다”고....

과연 그랬던 것일까? 박정희가 그 나팔을 불면서 잠든 민족을 일깨워 자주하는 조선민족을 이루리라는 역사적인 소명감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한번은 새벽 나팔이 문제가 되어 아리마(有馬)교장에게 불려갔다. 물론 일인(日人)교장이었다. 교장은 박정희에게 새벽 나팔을 다시는 불지 말라고 명했다. 교장의 말은 일종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꼿꼿한 자세, 꼿꼿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어려운 때 늦잠자리에 빠져 있다는 것은 결코 애국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애국정신을 가졌다면 늦잠에 빠져 있을 수 없습니다. 제 나팔 불기를 막지 마십시오.” 교장은 놀랐다. 박정희의 말은 대단한 무게를 느끼게 했다. 교장은 박정희의 애국운운의 그 애국이란 일본을 말하는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사실에 있다. 박정희가 말한 그 「애국」이란 무엇이었을까? 조선이었을까? 일본이었을까?

‘국가가 어려운데 늦잠자리에 빠져 있다는 것은 결코 애국적인 자세가 아닙니다’했던 박정희의 그 「국가」를 설마 「일본」이었다고야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故 장준하 선생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박정희가 그렇듯 새벽 나팔을 불어대며 지켜야 한다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박정희의 숨겨진(?) 적지 않은 언행을 보아서 하는 말이다. 이제 그의 반 역사적인 언행을 찾아보기로 하자. 

“박 선생님은 늘 나팔을 꿰차고 다녔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후나 적적할땐 나팔을 불거나 풍금을 연주하거나 했는데 곡목이 주로 일본 군가였다.(실록 군인 박정희 67쪽, 정운현 2004.10.18. 개마고원)

“문경의 박 선생은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학교 뒷산에 올라가 전쟁놀이 연습을 했다. 이미 준비된 막대기로 총, 검을 대신케 했다...후에 점촌초등학교 교장이 되는 제자 박명래(朴命來)는 가을 운동회 때 박 선생의 지도하에 진행된 전쟁놀이 단체경기를 기억하고 있다.” 이어지는 다음말의 의미가 심상하다. 

“박 선생은 재빠른 아이들은 일본군으로, 동작이 굼뜬 아이들은 중국군으로 편성하여 고지전을 벌리는 연습을 했다. 물론 중국군이 패퇴하는 것으로 끝났다.”(「朴正熙의 결정적 순간들」, 58쪽, 기파랑)

박정희가 짜낸 그 편대는 오히려 가감 없이 「힘」의 신자 박정희 자신을 고발한다. 재빠른 쪽이 일본군. 이기는 쪽은 일본군이라는 박정희의 그 상상이 말이다. 그런데 더욱 심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왜 그 적수가 중국군 이었을까?왜 조선군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차마 일본을 승전군으로 그리면서 조선을 패전국으로 기를 수가 없어서 였을까?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의 전쟁놀이로 그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일본군을 패전국으로, 조선을 승전국으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힘을 종교로 가진 박정희로서는 말이다. 박정희가 짜낸 중, 일의 전쟁판을 종교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설명 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그 논리는 이런 것이다. 

그는 낳기를 「힘바라기」로 왔다. 힘은 그에게 최고의 가치요 자산이었다. 그래서 힘의 추구는 그에게 가히 운명적이었다. 힘은 그에게 곧 존립의 보장이었으니까……. 일본은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이야말로 그에겐 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가슴속에 한 씨앗이 있었다. 「조선사람」이라는 씨였다. 역사란 실로 오묘한 것이다. 힘에 미친 박정희의 가슴 속에 ‘조선의 씨’가 살아있게 했다니!

그러나 그럼에도 역시 박정희의 신은 「힘」인지라, 일본을 승리의 판으로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끌어온 것이 중국이었다. 차마 제 나라를 망하는 판으로 짤 수가 없었으니……. 
아, 박정희. 우리역사에 박정희가 있었다니…….

그는 사람도 타락할 량이면 그렇게 까지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다는 표증이었다. 어떤 박정희의 기자는 이런 사실을 전하기도 한다.

“대구 사범동창들에게 박정희하면 새벽나팔소리가 연상된다…….문경어린이들은 귀에 못이 박힌 박 선생의 나팔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황실광(黃實光) 할머니가 지금도 기억하는 가사, ‘데데쿠루 데키와 미나미나 고로세’ (튀어나오는 적들은 모두모두 죽여라).”

그렇다면 박정희의 제자들이 늙어서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선생이 부른 노래의 가사 중 ‘모도 모두 죽여라’하는 그 죽여야 할 적들이란 누구였을까? 모두모두 죽여야 한다는 그 적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적들이 일본군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터, 도대체 그렇다면 그 박정희에게 그 죽여야 할 적이란 누구였단 말인가?

필자가 박정희가 모도모두 죽이겠다 하는 그 적이 일본군을 지칭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언 하는 것은 그의 친일적 언행을 두고서이다. 소학교시절의 제자들이 늙어서도 기억하리만큼 일본군가를 불러댄 선생, 그가 즐겨 부른 나팔노래 역시 「진군나팔」을 빼놓지 않았다고 했다. 박정희는 문경 보통학교 교사 근무 3년간 교사로 보다는 오히려 출중한 군인이기를 소망했다. 푸른 제복에 빨간 견장을 단, 넓은 혁대에 장검을 찬 일본육군사관을 꿈꾸는 자였다.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첫 해를 간신히 넘긴 박정희는 다음해(1938) 부턴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사실의 기대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였지만 입학연령이 이미 지나 입학시험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그 징검다리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결국 박정희의 최종적인 꿈은 일본육군 사관학교에, 일본군사관이었다!

박정희에겐 네 살쯤 손위의 대구 간호학교출신 의누나가 있었다. 박정희는 이미 결혼한 때였지만 아내와의 관계가 심히 불화한 상태여서 주말이나 방학 때에도 아내보다는 이 의누나를 자주 찾곤 했다. 한 박정희의 저자는 그의 글에서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직을 팽개치고 떠날 당시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그런데 박정희 선생이 이 의누나 집에 놀러 와서,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와서는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한 잔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는데, 그 다음날예천역에서 만주로 떠났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한 가지 사실에서 확실한 사람이었다. 힘을, 힘의 신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그랬다.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오른손 검지끝 부분을 베었다. 그리고 혈서를 썼다.

盡忠報國 滅私奉公 (진충보국 멸사봉공)

박정희는 그 혈서를 만주 신경 (新京현 長春)에 위치한 일본군관학교로 보냈다. 그가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로 충성을 다해 국은(國恩)에 보답하겠다 한 그 국(國)이란 바로 일본이었다.

박정희가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나라가 말이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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