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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고전 11:23~26)2016년 6월 19일 총회선교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06.18 13:10

*영상설교: youtu.be/AcU7PK7AMWI

 

1. 망각의 강 : 죽음은 기억을 지우는 것

1) 레테(Lethe)의 강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인간과 자연 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사색하며 그 깊은 의미를 생각했다. 그들은 이러한 사색들을 독특하게 신화라는 형태로 만들어 보존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에 인생과 역사에 대한 깨달음과 깊은 성찰이 들어있어서 이후 2천 년 이상 동안 서양 사람들 사고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사유가 서양 사람들의 철학, 문화, 예술, 문학, 생활 습관 등에 직,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고, 이러한 서구를 충실하게 답습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규정하는 한국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죽음과 기억에 대해서도 독특한 전승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간다. 생과 사를 가로지는 사이에는 5개의 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레테(Lethe)의 강이다. 죽은 이는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강물을 조금씩 마시면 이 세상에서 겪었던 기억들이 모두 지워지고 이제 새 사람으로 태어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인생에 선하고 아름다운 기억들도 있지만, 실제 살아보면 아프고 힘들고 추악한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에 새로 태어나려면 이 모든 기억을 지워야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억을 모두 지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인가 보다. 기억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런 인생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재한, 2004)

그래서 평범한 멜로 영화인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년)에서 딱 하나 건질 명대사가 나왔다.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 거야. 난 무서워’

2) 성경, 기억의 투쟁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로부터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간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가 성경이다. 성경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쉐마라고 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10)

이것이야말로 기억 투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 삶의 순간마다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또 자녀들에게도 전승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규정이다.

우리가 오늘 기억 투쟁을 포기하기 때문에 친일파, 군부독재, 역사 왜곡 등이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경전을 소중히 여기며 예전을 존중한다. 경전인 성경과 예전인 성찬은 문자와 예식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승하려는 신앙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경에 목숨을 걸고 성례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2. 바울이 전하는 것 : 그리스도의 죽음

1) 바울의 사명, 전하는 것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23절)

바울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으로서 모든 신앙인은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한번 전하고 말 것이 아니다.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26절)이다. 바울이 죽을 때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 후손들도 쉬지 않고 전해야 하는 것이 있다. 놀라운 내용이다. 그게 무엇인가?

‘주의 죽으심’(26절)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끊임없이 반복해서 전하고 또 전해야 할 것, 우리의 인생과 역사가 종말을 고하는 그 순간까지 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인생 성공 비결이 아니다. 건강 비법이 아니다. 출세하고 부자 되는 방법이 아니다. 사회과학적 방법을 통한 인간의 지상 낙원이 아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가 전해 받은 것이고 온 삶으로 전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하는 방식, 성찬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방식으로서 성찬을 말하고 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23~25)

성찬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기억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몸과 피를 내어 주어 죽으셨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이란?
오늘 본문에는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가 끝까지 기념하고 전승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이 그냥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를 위해서 죽었는지, 그의 죽음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그냥 끝난 것인지, 그가 죽음에 갇히지 않고 무덤을 열고 부활했다는 것은 어떤 뜻인지 하는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자연사가 아니다. 바울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끝 날까지 기억하고 전해야 할 주님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다. 인간과 세상 자체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끔찍한 고난을 당한 구원의 죽음이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은총으로만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며, 지금도 죄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길을 선언하는 것이 사명이다.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한다는 것의 의미다.

기독교는 여기에 집착한다. 이것을 잃으면 기독교는 그냥 하나의 도덕 강론이나 사회 개혁 이론으로 추락한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의미

1) 우리 교단은 작년 9월에 제100회 총회를 열면서 주제를 ‘성찬’으로 잡았다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100회 총회 주제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성찬 자체가 잊지 말아야 할 기억, 그리스도의 구원 기억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몸과 피를 주셨다고 표현하셨다. 이 간결한 신앙이 2천 년 동안 교회를 교회되게 한 고백이었다. 교회는 이 고백을 증언하고 전승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다. 십자가의 구원은 성찬식을 통해서 교회 안 예전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의 성찬식은 그 자체뿐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도 실현될 때 완성된다.

1953년에 출발한 기장 교단은 이번 100회 총회 주제를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라고 정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이기에 그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늘 깨어 있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 인간의 영혼과 사회의 구조를 그리스도화 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면서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기장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했다. 주민교회는 기장 교단의 구성원으로서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교단은 1953년에 새롭게 출범했다. 이후 장로교는 기장과 예장으로 나뉘어졌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장은 당시의 교권주의자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쫓겨났다. 우리 선배들이 교단 밖으로 쫓겨나면서까지 굴복하지 않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당시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이 4가지를 표명하고 있다.

(1)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4)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자유하여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며, 외국 교회에 의지하고 예속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자립하고, 그러면서도 세계교회와 교류하면서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추구한다(에큐메니칼)는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1950년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들은 이 선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것 때문에 당시에는 이단으로 오해받았지만 지금은 다 이 길을 걷고 있다. 우리는 시대를 앞선 선구자였기에 고난당한 것이다.

2) 기장의 정체성(기장성)은 60년대 이후 군부 독재 상황에서 이를 신앙적으로 극복하려는 눈물겨운 헌신 속에 놓여 있다.

교리와 교권에 갇히지 않고 성경이 증언하는 진정한 복음의 자유를 추구한 기장 교회는 유신체제와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신군부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대부분의 교단들이 불의한 세상에 애써 눈감으며 교회 성장에만 몰두할 때, 기장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생명 평화 정의를 세우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복음의 사회화야말로 기장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보수 교단들은 기독교 복음이 개인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개인이란 사회 구조와 무관하게 공중에 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구조 안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을 온전히 구원하려면 그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혁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의 구원이다. 이것이 기장성의 요체다.

4. 세상 안에서 기억하는 그리스도

1) 세상 안에서

구원의 복음이 개인이나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갇혀있을 수 없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라는 표어로 정리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 3:16)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게 하시면서 까지 사랑한 세상을 교회가 외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믿는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 단순한 사실에 놓여 있다. 한국교회가 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하고 외면한 것이 죄며, 오늘 한국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그 죄의 결과다.

2) 세상, 그 위험성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관리를 맡기신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타락 이후로 세상이 뼛속까지 죄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욕망, 이것을 기독교는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것이라 보고 원죄라고 한다. 그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이 세상 곳곳에 투영되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이것을 개혁하고자 세상으로 뛰어드는 교회까지도 악마적 세상 구조에 편입되기 십상이다.

세상은 욕망, 힘, 유혹과 강압 등으로 교회를 회유한다.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구조 안에 매몰되어 간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에 바로 그 세상의 논리로 변형된 내용을 기독교 복음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 교회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죄의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성을 쌓고 별도의 종교적 공간에 칩거하든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을 행해 돌진하든지!

한국교회 대부분은 실제로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세상의 포로가 되었지만 겉으로는 세상과 성을 쌓은 것처럼 행동했다. 반면에 기장은 대놓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세속화 된 교회라고 비난을 받았다. 문제는 세상을 이해하고 구원하기 위해 세상과 열어놓고 교류한 기장 교회는 일정 정도 성공했지만, 또 일정 정도는 우리도 세상의 막강한 논리 앞에서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을 상실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3) 신앙은 위험을 믿음으로 맞서는 것

우리는 참 어려운 길을 선택한 교단이다. 아니 교회는 사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교회는 골리앗 같은 거대한 세상을 향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당히 맞선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길이었고, 바리새인들로부터 세속적 인물이라고 끊임없이 질타를 받아야 했다. 결국 이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오늘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앙을 설명하는 사도 바울도 이 길을 걸었다.

교회는 세상과 빗장을 잠가서는 안 된다. 동시에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세상에 물들어 세속적 쾌락과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안 되는데 그렇게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세상의 악한 구조는 치명적으로 매혹적이다.

믿음이란 위험하다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깨어 있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해야 하고, 더 주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하고, 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기장 교회라는 것은 이러한 길을 기꺼이 간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개 교회는 개인이고 교단은 가정이다. 기장이라는 가정이 건강하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식구인 주민교회가 교단을 위해 기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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