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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에 대한 신학적 단상<교회개혁 담론투쟁 : 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
김희헌 (성공회대 연구교수) | 승인 2016.06.20 13:47

1. 
‘한국교회의 메시아니즘’을 다루는 이번 연재에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메시아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나의 출발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메시아 즉, 사람들의 종교적 욕망이 투사된 신화적 존재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아니다. 나의 신학사전에서 메시아는 ‘시간/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의 순간을 새겨 넣는 존재’이다. 이 카이로스를 경험한 이는 이전의 삶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된다. 

메시아에 대한 앎이란 카이로스를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카이로스의 경험 속에서 일어날 변화(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당연히 메시아를 따른다는 것은 이전의 삶으로 회귀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모험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이 종교적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는 메시아적 요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앎이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앎은 일종의 카이로스요,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 깊이 안다는 것은 더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요, 따라서 안다는 것은 알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모험이다.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던 시기에 형성되고 자라난 개신교의 정신세계에서, (메시아에 대한) 앎은 존재의 변화이기보다는 지식의 습득에 가까웠고, 그 앎이란 것도 자기시대의 율법에 순응하는 방식에 관한 학습이었지, 그 율법을 폐기하(거나 사랑으로 완성하)는 모험을 충동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띠었을 뿐, 그 시대의 메카니즘(사회적 율법)인 부르주아적 질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성경은 그것과는 다른 사실을 증언한다.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다’는 베드로(막8:29)와 바울(롬8:2)의 선언은 옛 질서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존재에 관한 적극적 긍정이었다. 바울이 말한 복음(유앙겔리온)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해체하는 메시아의 카이로스적 도래에 관한 것이었고, 그 카이로스를 경험한 사람들은 민족과 신분과 성(性)의 차별을 전제로 한 율법을 해체하는 혁명적 삶(갈3:28, 골3:11)을 살아갔다. 

성경의 언어 카이로스(καιρὸς)란 하나님나라의 도래(막1:15) 즉, 시간의 위기이다. 그 위기는 지속되어온 시간(크로노스)의 파열, 그 시간 속에서 구축되어온 질서/율법의 파국을 의미한다. 메시아의 시간인 카이로스는 공간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면서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의 틈바구니에서 특이한 사건으로서 등장한다. 이 카이로스적 사건은 이전에 존재했던 기준과 관습과 관점과 척도로서는 측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종교는 이 카이로스적 사건을 위험시하고, 무능한 종교는 그것을 조롱한다. 그들의 종교적 입술에서는 습관이 된 경건의 언어가 흘러넘친다. 그러나 그 언어는 믿음의 언어이기보다는 관념의 언어이다. 그 언어는 시대의 규범(νόμος, 율법)을 따라 구성되며, 율법적 질서를 지속시키는 일에 충성한다. 거기에서 증오와 차별과 억압이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것이 인간을 체제와 질서의 노예로 양산하는 아편으로서의 종교가 보여주는 대표적 양상이다.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이 왜곡과 무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한국교회가 타락했다 한다. 무엇이 타락인가? 종교의 타락은 윤리적 행위의 부패나 정치경제적 억압과 착취의 구조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정신의 몰락이다. 한국교회는 왜곡된 메시아니즘에 사로잡힌 채, 역사를 갱신/변혁하는 카이로스의 실제적 도래를 위험시하고, 사회적 율법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나는 그것이 교회의 타락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적극적인 부패그룹이다. 이들은 돈과 권력을 메시아로 섬기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종교적 언어를 소비한다. 그들이 부패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다. 율법적 세계의 크로노스적 지속을 깨뜨리며 등장하는 카이로스적 메시아를 경험하지 못한 무지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거 권력의 마성에 젖어 자신의 지식(편견) 속으로 몰락하였다. 

이들은 관념적 이원론에 빠져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역사)을 부패한 것이라고 보며, 자신들의 욕망을 이룰 환상적 메시아니즘을 유포한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주가 진화하는 이유이고, 역사가 진보하는 이유이다. 기독교는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이라고 고백한다. 만일 시간이 부패와 죽음의 공간일 뿐이라면, 신도 죽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 이 부패그룹에게 신은 죽었다. 그들의 영혼에서 신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짓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아니면 무슨 짓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 신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종교적 왜곡을 통해서, 권력의 악행과 제도적 억압과 온갖 혐오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어떠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포장되어 추악하지 않게 여겨짐으로써, 결국 예수마저 추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 대부분의 교회는 무기력에 빠져있다. 신을 향한 찬미가 있지만, 정서적 열기 속에서 이루어질 뿐 고백의 알맹이가 빠졌다. 믿음의 꿈을 잃은 것이다. 진정한 경외와 찬미는 카이로스의 메아리를 들을 때 가능하다. ‘늘-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안정적으로 보이는 이 현실세계를 동요시키는 메시아의 시간(카이로스)이 교회 안에서 태동되지 못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향해야 할 당당한 종교정신을 관념적 변증법으로 치환하며 자위하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는 관념 속에서만 전능하며, 그것을 설파하는 종교적 언어는 별의 징조를 잃었다. 

앞선 이들에 의해서 종교적 언어가 왜곡되었다면, 이들에 의해서는 그 언어가 부패한다. 신학적 사유를 효용의 원리에 가두고, 믿음의 언어를 카이로스적 진실이 아닌 크로노스적 지속에 대한 서술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예수의 메시아적 믿음은 잊혀지고, 예수를 메시아로서 경배하는 행위만 관습화된다. 

3. 
종교적 인간이란 신과 맞선 프로메테우스적 영웅보다는 신 앞에서 자신의 허약한 실존을 인식하는 존재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신과 연합한 존재로서 그 실존의 허약성을 뚫고 일어서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카이로스의 산물이요, 신앙인은 카이로스의 순간을 통과한 주체적 인간이다. 여기서 신앙의 주체성이란 단순한 개체적 자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과 연합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무게를 딛고 일어선 이 세상으로부터의(from) 주체성이요, 신의 자녀로서 공명정대한 명랑성을 지닌 신을 향한(toward) 주체성이다. 믿음이란 새로운 주체성의 선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세계변혁을 위한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카이로스로 드러나는 창조의 힘과 대면할 주체적인 신앙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세계를 답습할 뿐, 현실세계의 갱신을 목표로 하는 존재론적 탐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압적인 율법의 세계 속으로 화육하여 카이로스로 등장하는 신은 항상 창조이며, 이 창조는 과거에 대한 심판이자 갱신이다. 세계의 갱신을 상상하지 않고, 현재의 질서가 마치 영원할 것처럼 여기는 것이야말로 무신론이다. 

신은 세계를 끊임없이 창조한다. 그의 창조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탄식하는 만물을 향해 이뤄진다. 신의 시간 카이로스는 그 탄식이 기쁨으로 변혁되는 지점이다. 철학과 신학이 주목하는 곳은 신이 메시아로 화육하여 창조와 구원활동이 벌어지는 바로 그곳이다. 

메시아가 등장하는 카이로스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시대가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열정의 아버지이며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다. 역사적 삶 속에서 사랑이란 가난에 대한 성찰이요 행위이다. 여기서 가난이란 단지 궁핍만이 아니라, 그것과 결부된 착취, 배제, 억압, 모멸, 불행 등을 통칭한다. 사랑이란 일차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의 동인은 항상 현재의 억압적 상태에 저항하기 위한 사랑의 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저항이다. 저항이란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랑이 가난(한 이들)을 주체로 만든다. 심오한 윤리와 영성은 바로 이 가난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태동했다. 

가난하지 않으면 창조의 순간 카이로스에 참여할 수 없다. 그것이 없이는 종교도 철학도 껍데기일 뿐이다. 가난은 지성의 소금이요, 영성의 출발이다. 가난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빈자/약자를 동정(charity)의 대상으로 본 것은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요, 신의 창조에 대한 무지이다. 

근대세계에서 가난이란 착취를 의미했다. 탈근대 시대에 필요한 성찰은 가난이 죽음의 극복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마5:3)는 이미 이 세계가 주입하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자이다. 

근대의 사회구조가 개인이 개인을 약탈하고 집단이 집단을 억압하는 방식이었다면, 탈근대의 사회구조는 자신의 부를 창출하고 권력을 획득하는 일에 사회 전체를 동원한다. 신자유주의적 약탈체제는 전사회적 시스템을 활용한다. 전체의 공공재를 개인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전사회적으로 재배치한다. 따라서 근대의 구원이 개인을 주목했다면, 탈근대 시대의 구원은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개인구원이라는 근대적 사고체계에 머문 종교는 윤리적 종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구원적 종교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근대세계에서 정치적 목표는 저항의 ‘축적’이었고, 종교 역시 천국을 향한 믿음의 ‘축적’을 요구했다. 그러나 탈근대의 정치적 방향은 저항의 ‘확산’이요, 종교의 길은 존재의 모든 지평으로 확대되는 정의와 평화의 삶에 있다. 탈주라는 저항의 몸짓만으로는 부족하다. 탈주하는 그 내용이 ‘장차 도래할 것’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면서 이 크로노스의 질서에 대한 반란의 요소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이란 이 세계에 대한 반란의 감각을 소유한 자들이다. 억압적 세계를 금욕적 정서로 길들이려는 종교 프로젝트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사랑이 승리하는 세계를 구축하려는 급진성이 길러져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 - 출처 : 한겨레 휴심정

크로노스를 타고 흐르는 공간의 견고함은 세계를 탄식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박국과 같은 사람은 괴로워 부르짖는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핍박합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창조를 몸에 입은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억압적 크로노스의 시간은 깨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시대의 메시아로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인 마쉬아흐 (합3:13), 그들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신의 구원을 받을 사람이다. 또한 그들 자신이 크로노스의 질서 속에서 구원의 징조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이들은 믿음으로 사는 의인(갈3:11)이요, 이 역사가 뒤척이며 뱉어내는 미래의 씨알이다. 이들의 등장에 관심을 갖지 않는 모든 메시아니즘은 타락과 부패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이 글에서 사용된 개념과 아이디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의 도움을 받았다. 

김희헌 (성공회대 연구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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