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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능력(행 16:23~34)2016년 7월 3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07.01 14:18

1.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인생을 결정한다.

1) 청소년들의 입, 욕

언젠가 버스를 탔다가 뒤에 앉은 청소년들이 서로 대화 하는 소리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입을 열면 욕이 섞여 있었다. 도대체 욕이 없이는 말을 할 수 없는 애들 같았다. 듣는 사람들은 놀랍고 당황스러운데 정작 본인들은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주 일상적이고 또 유달리 그 청소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우리 청소년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어른 되어서도 계속 유지된다면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건설할 수도 없을 것이다.

2) 독재의 그늘 : 부정의 언어

80년 광주의 민주 함성을 총칼과 탱크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은 부당한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을 통제했다. 말 안 들으면 그냥 잡아다 고문하고 폐간시키는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그래서 유명한 땡전 뉴스가 생겨났다. 9시 뉴스가 땡하고 시작되자마자 첫 번째 뉴스는 전두환에 관한 소식이 차지했다. 그리고 용비어천가가 넘쳐났다. 하늘이 전두환을 내려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 뉴스 진행자의 공식적인 언사였다. 저 때는 정말 하나님도 어처구니가 없으셨을 것 같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보도지침을 내리는 것이었다. 사건 보도에서 사진, 제목, 내용까지 권력이 정해주면 거기에 맞추어 쓰라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보루라는 언론은 권력이 주는 이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다. 그래서 당시 시민들에게 생긴 버릇이 언론사의 보도를 거꾸로 보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세월호 같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권력이 공영방송에 개입하여 국민의 안전보다도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요구하는 신 보도지침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바로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국장에게 노골적으로 세월호에 대한 보도에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vmdhAzXVQE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거짓말이야, 반대일거야 라는 생각과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런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부정의 언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고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람이 똑똑한 시대는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어두운 후유증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권력은 어떡하든지 언론의 독립성을 지켜주어야만 사회가 건강할 수 있다. 여기가 민주정권과 독재정권을 구분하는 한 요소다.

우리가 입술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느냐, 어떤 시각을 지니고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느냐는 개인의 삶과 역사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2. 바울과 실라의 기적

1) 기적의 내용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서 선교할 때, 귀신들린 여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소리를 질러대니 불쌍히 여기고 그를 고쳐서 건강하게 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 귀신 들린 여성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점을 치면서 꽤 많은 수익을 올리던 이들이 바울 일행을 모함하여 체포되어 많이 얻어맞은 후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귀신들려 점을 치면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치유하여 인간답게 살게 해주었다는 것이 죄가 되어 바울과 실라는 실컷 얻어맞고는 수갑이 차인 채로 감옥에 갇혔다. 깊고 어두운 감옥보다 이들이 놓인 신앙적 상황이 더 암담했을 것 같다. 하나님 뜻대로 행한 결과가 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억울한 고통은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현존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 그럴 때 우리는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 어려운 현실에서 바울과 실라는 놀라운 기적을 일구어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지만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게 된 것이다. 빌립보 감옥을 흔들었던 기적은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현실화되었다. 극단적 상황에서의 기도와 찬양은 평상시에 기도와 찬양을 생활화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믿음은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내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기적은 그 끝에 예비 되어 있다.

감옥 중에서도 깊은 곳에 수감되었고 매를 때린 것도 모자라 발에 수갑을 채운 채로 아주 불편하고 힘든 모습으로 감옥에 던져졌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는 감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모두 도망갔을 것이라 여겨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책임을 표시하려 했다.

그러자 바울이 소리를 질러 자살을 막았고 이에 감동받은 간수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기고 음식을 차려주고 온 식구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놀라운 사건이다. 지금 보아도 참 놀라운 이 기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바울과 실라같은 고난 속에서 그 암울한 현실을 넘어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2) 기적의 조건 : 기도와 찬미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는 것이야말로 암울한 상황에 놀라운  기적을 불러들인 계기였다. 평상시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했다는 것이 놀라운 믿음이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어떡하든지 벌은 좀 피했으면 한다. 심지어 잘못하고도 무사하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오늘 바울과 실라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귀신에 매여 평생 고생하며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남들에게 단지 수익원으로서 이용당하던 한 여성을 치유하고 사회적으로 해방시킨 것은 오히려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누명과 매질과 투옥이었다. 이런 상황은 기도하기 어렵다. 기도보다도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감옥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리고 나아가 찬양을 드렸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도와 찬양은 저 어둠 깊이 갇혀 있는 내 현실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인도하는 안내인과 같다. 어려울수록 기도하고 찬양하라. 시험이 깊을수록 기도하고 찬양하라.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일수록 기도하고 찬양하라.

3) 기도와 찬미는 감사의 일상화로부터

바울과 실라가 인생의 가장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때에 좌절과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도와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평소에 기도와 찬양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고는 이런 신앙은 가능하지 않다. 내 입을 불만, 욕, 좌절, 비난, 자기 비하 이런 것들로 채우는 것은 스스로 삶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그 입술에 어떤 것을 얹어 놓고 사느냐하는 것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다.

3. 감사 훈련 : 혁명과 감사의 변증법

1) 감사도 훈련

처음 군대 가면 이런 느낌이다.

군대 훈련소에서 가장 먼저 교육하는 것은 어려운 전투 훈련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자세부터 시작한다. 차렷 자세도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은 어떻게, 눈은 어디에, 턱은 얼마 정도 등 반듯한 자세를 몸에 익히도록 한다. 그 다음에는 걷기, 줄 맞추기, 좌향좌 우향우 등 정말 초등학교에서나 배울 것들을 20대 청년들에게 가르친다. 재미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고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20대 중후반 대학원 졸업하고 입대하는 엘리트도 처음에는 어벙하게 잘 따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장교 훈련 때도 한 주간 내내 단조롭고 답답한 제식 훈련만 했다.

처음에는 엉망이었지만 한 주 지나면 나름대로 폼이 난다. 그 다음에서야 사격, 유격훈련 등 난이도 높은 훈련으로 옮겨갈 수 있다. 훈련이란 자동적으로 몸에 배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다음에 움직이다가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한 감사는 물론 자연스럽게 고백되어지는 것이지만 감사하는 삶은 어느 정도 훈련의 필요성이 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심지어 시련과 실패를 만나도 내 입술과 마음으로 먼저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일정 정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감사의 언어와 마음을 평상시에 입에 달고 다닐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정말 어려움을 만났을 때, 먼저 감사하게 된다. 이 감사가 우리 삶의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든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어른이니 훈련받을 필요 없다고 자만하지 말고 감사를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2) 혁명과 감사의 변증법

세상의 모든 혁명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미국 혁명 등 모든 사회 개혁 운동의 출발점은 불만이다. 여러 가지 부조리하고 불편한 점이 있음에도 만족해버리면 그 상황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사회적 혁명이든 과학의 혁명이든 현실에 대한 불만이 혁명의 운명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넘어서려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 주님이 목숨 걸고 외치신 것은 현재 있는 상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이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온전한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가이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베이스캠프다.

동시에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종교다. 바울과 실라처럼 정말 억울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내몰려도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는 감사의 신앙이 바탕에 존재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 어떤 상황도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시며 그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혁명성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진보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의 고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구제척인 삶과 역사 속에서 충돌한다는 점이다.

감사와 혁명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해버리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질식해버릴 위험이 있는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관계다. 그래서 어떤 현실이든지 감사하면서 수긍하는 경향의 신앙인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말아야 하며, 반대로 사회적 혁명성에 경도된 신앙은 자칫 사회적 불만이 신앙적 불신앙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끈임 없이 자신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감사의 고백을 훈련해야 한다.

3) 김동률 ‘감사’

결혼식 축가로 많이 불리는 노래 중에 옛 전람회 멤버 김동률의 ‘감사’라는 노래가 있다.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가사와 음률의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SQslNTdB2o

하루를 시작하면서 햇빛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있으니까!

그대를 만나 죽도록 사랑하는 게 누군가 주신 내 삶의 이유라면 더 이상 나에게 그 무엇도 바랄게 없어요

기독교 신앙이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시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행복하다는 고백이다. 이 감사가 결여된다면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 예수 믿으면서 감사가 메마른 신앙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삶의 소소한 계기 속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발견하며 감사함으로 순간을 채워가기 바란다.

4) 맥추감사주일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할 때 가끔 이거 꼭 해야 하나? 묻곤 한다. 보리추수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던 고대 사회에 지키던 절기를 계절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똑같이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공무원, 제조업, 상업, 정보통신 분야의 직업에 보리추수 절기가 무슨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또 여러 교회들이 마치 맥추감사주일을 교회 예산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지 않은 것도 그렇게 묻는 중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사회적 혁명성에 더 경도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주민교회는 자칫 감사가 메마르고 그래서 현실이 불만으로 가득한 각박한 삶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그 자신이 먼저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감사 없이 행복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며, 감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고난에 직면한우리 삶과 역사 속으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 마침 맥추절은 한 해의 절반을 지난 7월 첫 주에 해당하기에 한 해의 반년을 돌아보면서 남은 후반기를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감사의 마음과 고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016년 후반기를 시작하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미를 통해 드렸던 감사가 충만하여 올 후반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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