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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약한 메시아’를 기다리며<교회개혁 담론투쟁 : 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
정경일(새길기독사회연구원장) | 승인 2016.07.04 13:09

- 〈베를린 천사의 시〉로부터의 단상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절망〉 중에서 -

메시아적 현재

온 세상이 아프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구원이 절실하다. 메시아가 나타나 우리 모두를 구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절망만 더 커진다.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스스로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고통을 지속시키고 악화시킬 뿐이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 부재의 절망이 오히려 메시아 도래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사는 것이 절망적이니까 더 절박하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제는 메시아 희망의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데 있다. 사람들은 미래에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희망한다. 이런 미래의 메시아 희망이 현재의 절망에 맞서는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현재의 절망 앞에서 체념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내일의 희망은 오늘 희망하는 사람을 배반한다. 또한 미래의 희망에 시선을 두면 현재의 절망을 뚜렷이 보기 어렵다.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은 실체를 알 수 없을 때 더 큰 공포와 마비를 유발한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언제 구원이 닥칠지 미리 생각하고 기다릴 수 없기에 구원은 현재적이다.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현재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메시아적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해도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지금 시간(Jetztzeit)’을 메시아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메시아적 현재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파괴하며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도 바꾸고 구원할 수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은 그 어떤 메시아적 의미도 갖지 않은 비극적 과거였다. 하지만 과거의 광주로부터 송출되어 온 “약한 메시아적 힘”의 시그널을 포착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현재적 저항이 광주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을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부활시켰다. 만약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이 미래에만 희망을 두고 현재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광주는 지금도 폭도들의 도시로 모욕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현재적 저항이 과거에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폭도들의 난동’에서 ‘민주시민의 항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메시아적 현재는 그렇게 고통과 절망의 과거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늘 위태하고 유동적이다. 발터 벤야민은 “[현재의] 적이 승리하는 한 [과거에] 죽은 자조차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한다. 메시아적 현재가 과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반(反)메시아적 현재는 과거를 다시 절망의 계엄령 속으로 몰아넣고 고립시킬 수 있다. 구원을 가로막는 자는 ‘강한 메시아’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바람처럼 “딴 데서” 오는 구원은 강한 메시아와 무관하다. 과거에 광주에서 죽임당한 시민들은 보통 사람들이고 그들을 부활시킨 현재의 시민들도 보통 사람들이다. 그들은 벤야민이 말하는 ‘약한 메시아’다. 약한 메시아는 어떻게 구원하는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그 물음을 깊이 성찰하게 해준다.  

〈베를린 천사의 시〉와 발터 벤야민

페터 한트케가 극본을 쓰고 빔 벤더스가 감독한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는 발터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 이해에 대해서는 이 연재 〈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에서 이상철 목사가 쓴 “메시아는 가라!”를 읽어 보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 대한 심층적 분석에 대해서는 박흥식 감독이 쓴 “‘베를린 천사의 시’ 읽기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참고로 이 영화는 암시와 은유로 가득해서 스포일러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약한 메시아의 의미를 여섯 인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보여준다. ‘정신성’과 ‘영원’에 지친 천사 다미엘은 인간이 경험하는 ‘물질성’과 ‘지금’을 동경한다. 그의 동료 천사 카시엘은 고통 받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래서 괴로워하지만, 인간사를 “수집하고 증언하고 보존할” 뿐 직접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천사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곡예사 마리온은 닭의 깃털을 모아 만든 날개를 천사처럼 등에 붙이고 있지만, 하늘을 날 수 없는 유한하고 불안하고 외로운 여성이다. 인간이 된 천사 피터 포크는 따뜻한 시선으로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깨우쳐준다. 다섯 번째 인물 호머는 노쇠한 서사시인으로, 과거를 안타깝게 동경하면서도 현재의 평범한 영웅 이야기를 계속 찾아 노래하려고 하는 이다. 이 다섯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는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럼 여섯 번째 인물은 누굴까?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숨은 배우’다. 한트케와 벤더스는 영화 곳곳에 벤야민의 ‘사유’를 출연시킨다. 영화 초반, 천사들과 사람들이 섞여 있는 도서관 장면, 벤야민의 메시아 사상과 역사철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파울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이야기가 책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 소리들 사이에서 들린다. ‘1921년 발터 벤야민은 파울 클레의 수채화 〈새로운 천사〉를 샀다.’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 사상을 가장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절정은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그가 194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에세이니, 벤야민은 클레의 작품을 20여 년 동안 관찰하고 성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휙 지나가듯 들리는 벤야민과 클레의 <새로운 천사> 이야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성찰의 무게가 실려 있다.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열려 있다.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천사는 잔해 위에 잔해를 쌓고 그것을 그의 발밑에 던져 놓는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무르길 원하고, 죽은 자들을 깨워서 조각난 것을 결합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폭풍은 낙원으로부터 불어와서 그의 날개를 장악한다. 그것은 너무 강렬해서 그는 더 이상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천사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동안, 이 폭풍은 천사의 등이 향한 미래를 향해 그를 불가항력적으로 밀어낸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에서

클레의 천사는 전통적 천사의 이미지, 예를 들면, 칼을 들고 용과 싸우는 천사 미카엘이나 신의 메시지를 적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천사 가브리엘의 영웅적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이 새로운 천사의 표정은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해 하는 것 같기도 한다. 이제 갓 돋아난 것 같은 그의 날개는 너무 작고 연약해 보인다. 이 새로운 천사는 역사의 폭풍 속에서 머무를 수 있을까? 천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스스로를 구원할 수나 있는 걸까? 

벤야민은 그런 작고 연약한 날개의 천사 같은 존재들에게 메시아적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벤야민의 ‘사유’가 출연하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천상과 지상의 연약한 천사들, 즉 약한 메시아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구원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엑스트라들, 특별한 인간들!”

배우 피터 포크는 〈형사 콜롬보〉의 주인공이다. 흥미롭게도 〈베를린 천사의 시〉에 피터 포크는 그의 본명으로 출연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 특히 ‘엑스트라들’도 그가 형사 콜롬보를 연기한 배우임을 알아본다.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인물이다. 그렇게 피터는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문다. 영화 안에서 피터가 허무는 경계가 또 하나 있다. 천사와 인간의 경계다. 피터는 다미엘보다 먼저 인간이 된 천사다.

피터는 유쾌하고 상냥하다. 그는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그는 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다정하고 친밀하게 대한다. 그는 영화 촬영 중에 잠시 쉬고 있는 엑스트라들 중 한 여성의 얼굴을 그리며 속으로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은 엑스트라들이지. 특별한 사람들! (These humans are extras. Extra humans!)’ 

더 중요한 것은 그 엑스트라들이 유태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터가 그리고 있는 유태인 여성은 부드럽게 미소짓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파괴와 죽음이 들어 있다. 파괴자들에게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이었다. 그들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인간성을 박탈당한 채 목숨만 붙어 있는 ‘호모 사케르’였다. 그들의 파괴당하고 부정당한 인간성을 피터는 지금 긍정하고 회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인간”으로! 

무력한 천사들의 괴로움

천사는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베를린의 천사들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을 구원하는 데서는 천사가 인간보다 무력하다. 그 무력감을 두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이 보여준다. 

장면 1.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한 남자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 사람들은 넋 놓고 바라만 본다. 다미엘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그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주고 삶의 아름다움을 속삭여주지만, 아무런 실제적 구원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 사람에게 달려와 도움을 주는 이는 다른 인간이다. 

장면 2. 어느 고층 건물 옥상에서 청년이 뛰어내리려고 한다. 천사 카시엘은 그 청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하지만 청년은 아래로 뛰어내리고, 카시엘은 “안 돼!(Nein!)”라고 절규한다. 그날 밤, 괴로워하던 카시엘은 자신도 같은 자리에서 뛰어내리지만, 천사인 그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그 청년은 죽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멈추었지만 죽을 수도 없는 카시엘의 고통은 멈춰지지 않는다.  

다미엘과 카시엘은 자비로운 천사들이다. 그들은 늘 인간 가까이에 있지만,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지만,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모두에게 자비롭지만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천사들이 받은 저주일까. 인간만큼, 아니 인간보다 더 연약하고 무력한 천사들은 괴로워한다. 천사들은 그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될 수 있을까? 

사랑과 구원의 곡예

다미엘과 마리온이 함께 외줄타기를 한다. 이전의 무력감과 불안은 보이지 않는다. 다미엘은 두 발을 땅에 딛고 힘센 팔뚝으로 줄을 붙잡아 주고 마리온은 자유롭게 공중에서 몸을 움직인다. 두 사람은 춤추듯 함께 곡예를 한다. 그 둘을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천사 카시엘도 평안해 보인다. 사랑과 구원의 정경이다. 

다미엘과 마리온 중 누가 구원하는 메시아일까? 둘 모두다. 마리온은 다미엘을 정신성과 영원으로부터 구원하고, 다미엘은 마리온을 외로움과 불안으로부터 구원한다. 둘은 원래 하나였다. 둘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다미엘이 고백한다. “마리온의 집에 갔을 때, 나는 알아차렸다. 그의 집이 나의 집이었음을.” 다미엘과 마리온은 서로 안에 “약한 메시아적 힘”으로 존재해왔고, 서로에게서 그 힘이 발현되기를 기다려왔다. 현재의 마리온은 과거의 다미엘을 불러냈고, 과거의 다미엘은 현재의 마리온을 일깨웠다. 시간적으로 누가 먼저 메시아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메시아적 현재는 시간의 직선적, 일방적 흐름을 깨뜨리면서 과거도 구원하기 때문이다.  

외줄을 통해 서로 연결된 마리온과 다미엘에게는 더 이상 날개가 없다. 아니, 과거의 정신적이지만 무력했던 다미엘의 날개와 물질적이지만 불안했던 마리온의 날개가 사라지고, 정신성과 물질성이 통전된 “새로운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려고 하는 중이다. 작고 연약한 날개의 새로운 천사들은 더욱 거세지고 거대해지는 이 시대의 폭풍 속에서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다미엘이 말한다. 
“어떤 천사도 알지 못하던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지금 여기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구원하는 새로운 천사들, “매 순간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는 메시아들”은 안다. 잿빛 폭풍 구름은 우리가 사는 세상 위의 푸른 하늘을 가릴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는 진리를... 

폭풍 속에서, 
구원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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