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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바라지다!<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07.07 15:12

되-바라지다 「동사」

「1」그릇이 운두가 낮고 위가 벌어져 쉽사리 바닥이 드러나 보이다.
「2」튀어져 나오고 벌어져서 아늑한 맛이 없다.
「3」사람됨이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지 아니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다.
「4」차림이 얌전하지 않아 남의 눈에 잘 띄다.
「5」어린 나이에 어수룩한 데가 없고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하다

“되바라져가지고는”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가정 담당 교사로부터였다. 여중, 심지어 미션스쿨을 졸업한 내겐 좋지 않은 기억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정 선생님과의 일화가 가장 생생하다. 그녀는 절대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2분단 셋째 줄에서 왼쪽 안경 쓴 학생, 대답해 보세요.” 정이 갈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서태지가 밥을 줍니까? 대학을 보내 줍니까?”라며 대뜸 ‘우리 오빠’를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 역시 대뜸 일어나 “아니요, 서태지는 밥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재 대학이 주지 못하는 것을 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요. 서태지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라도 있으신가요? 평론가들의 평은요? 잘 모르시잖아요”라고 답했다. 그녀의 쏘아보는 눈초리가 무섭기도 했지만, ‘서태지 마니아’로서 물러서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물러서지 않았던 대가로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발랑 되바라져가지고는” 이었다.

사건은 교무실에 이내 퍼졌고, ‘딱하게도’ 전교 학생회장이었던 나는 교무실도 아닌 ‘교목실’에 끌려가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기독교적’이지 않은 음악을 들은 죄, 학생들에게 ‘모범적’을 보이지 못한 죄, ‘대든 죄’가 그 이유였다. 

‘되바라지다’와 비슷한 단어가 ‘까지다’(지나치게 약아서 되바라지다)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도 학교에서였다. 사회 시간에 전혜린의 시를 읽다 들켜버린 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까져가지고는” 이라는 소리와 함께 볼따구니를 꼬집혀야만 했다. 전혜린의 시가 그 교사의 수업보다 열 배는 사회적이라 주장하며 앙금을 삭여본다. 

가만, 사전적 의미에서 나는 몇 번 ‘되바라지다’에 해당됐는지가 궁금해진다. 교복 매무새가 썩 단정한 편은 아니었던 것을 보면 4번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어린 것이 꽤 당돌했으니, 5번도 내 모양새와 얼추 맞겠다. 그런데, 그 교사들 역시도 3번 ‘되바라지다’에 들어맞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학생을 너그럽게 감싸 주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대했으니 참말로 되바라진 교사들이라 말할 수 있겠다. 되바라진 교사 아래 되바라진 학생이니 응당 짜임이 맞다. 

내가 강골 기질을 갖고 태어나서 ‘되바라진’ 학생이었던 것일까? 지난 번 글에도 밝혔듯, 나는 정신이 약질인지라 그런 여자가 못 된다. 대신에 좋아하는 것이 분명한 학생이었다. 나는 rock음악이 좋았고, 서태지가 좋았고,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라디오 프로그램)이 좋았고, 남자친구는 진짜 진짜 좋았다. 연극과 소설이 좋았고, 친구들과 야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더 없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들로 나는 까르르 거릴 수 있었고, 그 ‘까르르’야 말로 학교를 상대할 수 있는 면역력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그 ‘까르르거림’을 ‘되바라진’ 혹은 ‘발랑 까진’으로 받아들일 때가 부지기수였기에 면역력은 곧잘 동이 나곤 했다. 

교회에서 청소녀/소년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과거 나의 ‘까르르거림’을 추억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나’를 만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아이들의 수다를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으랴. 신비하기까지 한 그네들의 언사들을 듣고 있자면, 신인류가 살고 있는 초일상적 공간에 머무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언어도 차림도 생각도 이렇게 저렇게 변한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자랑하는 그 열정에서, 학교 교사를 흉보며 까르르거리는 그 웃음에서, 집안 사정을 꺼내 놓으며 흘리는 그 눈물에서 나는 자주 ‘나’를 만나곤 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대화가 아기자기하지만 늘 석연한 것은 아니었다. 약속이나 한 것마냥 ‘경건’과 ‘순결’속으로 교묘히 자신들을 숨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바로 그렇다. ‘되바라져 예쁜’ 그네들의 수다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휙 하고 대화의 분위기를 바꿨고 그 양태가 거룩하기 짝에 없었다. 단정하여 장식된 것 같은, 얌전하여 거짓부렁 같은 그네들의 대화였다. 아이들은 그간 주워듣고, 억지로 듣고, 무심코 들은 것을 바탕으로 ‘성스러운 것’과 ‘속스러운 것’을 구분 지었다. ‘기독교적인 것’ 혹은 ‘교회에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은연하게 서로가 공유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단정함’ 혹은 ‘얌전함’은 엘리아데의 ‘성聖’ 이해와 섞어 짜여 있다. 그의 책 <성과 속>은 ‘성스러운’, ‘교회에 어울리는’, ‘기독교적인’ 것에 대한 상을 재현하고 (재)구상한다. 그는 ‘성(聖)스러움’을 “보통과 대립되는 완전함”, “다른 존재론의 영역” 혹은 “이례”적인 것 등으로 뜻을 매긴다. 뜻을 간추려 ‘공간’이나 ‘장소’로 내용을 좁혀와, “문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지방은 두 세계를 구별하고 분리하는 한계이자 경계선이고 국경인 동시에 그러한 세계들이 서로 만나고 속된 세계에서 성스러운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 역설적인 장소이다. ... 문지방과 문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간 연속성의 단절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에서 중대한 종교적 의미를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문지방과 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행의 상징이자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성과 속> 58쪽 

덧붙여 보자면, 공간이 ‘신성’을 갖추는 데에 십자가와 같은 sign은 큰 역할을 한다. 흔해 빠진 십자가인지라 그리 성스럽게 자극적이지는 않을 것 같은가. 그런데 역설적이게 성스러움이라는 것을 접하는 곳은 범속함의 영역에서 가능하다. 돌, 나무, 하늘, 큰 산 등은 우리 삶 속에 있는 ‘흔해 빠진’ 것들이지만,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는 ‘흔해 빠진 것’들을 ‘신성한 것’으로 승격시킨다. 서로가 구별되지만, 범속함 속에서 그러니까 흔하디 흔한 속된 것들 안에서 완전히 ‘이례적인 신’ 혹은 신성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이를 ‘종교적 인간’으로 한정해본다).

즉, 십자가를 향한 기독교인들의 (배움을 포함한)경험과 가치를 바탕으로 할 때, ‘흔해 빠진 십자가’가 ‘주님의 피’로 승격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말하자면, ‘십자가가 달려있는 예배당의 문지방을 넘는다’는 것은 신의 혹은 신적인 영역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저마다가 생각하는 ‘성스러움’의 옷을 입는다. ‘단정하고도 ‘얌전한’, 가끔은 ‘정결한’. 

할 것 많은 아이들이 “존재론적 차원의 단절”을 일으키는 “전혀 다른 존재론의 영역”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먼저는 대견하여 고맙다. 그런데 아쉽다. 언급했듯이 아이들은 교회가 주는 그 ‘성聖함’으로 자신을 감추고 숨어들어갈 때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품위를 잃은 나 같은 여자 앞에서도 비속어 사용을 바짝 줄이는 것을 보면, 그들이 규정한 ‘성역’ 안에 ‘안타깝게도’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들이 바짝 줄이는 것은 ‘욕설’만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기독교적’이지 않아 속되다 생각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거의 그러했다.

이를테면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은 ‘답정너’가 될 때가 많았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속된 것은 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차 있는 모양인지, 좀처럼 ‘그 이상의 이야기’는 잘 꺼내놓지 않았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교회 친구보다는 학교 친구들과 나눌 때가 더 많은 모양이었다. 남을 헐뜯는 것은 쉽고, 술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웠다. 부모의 이혼 이야기는 쉬운데, 섹스 이야기는 어렵고, 부활을 못 믿겠다는 이야기는 쉽지만, 클럽에 간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다.

보통 그것들의 기준은 목사의 설교, 부모의 신앙 등 전통적이어서 내재된 신앙의 규범적 틀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그로 인해 그네들의 민낯과 같은 이야기는 ‘성스러움’의 영역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되바라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문지방을 넘어오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기 검열’이 필요하겠지만, ‘성스러움’ 앞에서의 자기검열은 자발적 자기비하 혹은 낮은 자기-존중감으로 향하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염려되었다. 그 단정함 속에 숨어 들어간 아이들을 헤집고, 끄집고 싶은 것은 나의 되바라짐 때문일는지. 

속된, 보다 내 의사를 비치자면 ‘속되다 일컬어지는 것’들을 몽땅 헤집어 놓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어떻게’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근거 있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종교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성스러운 세계에 이미 머물기를 원하고 있다. “전혀 다른 존재론적 영역”에로 걸어 들어와 자신들이 품었던 이야기를 신과 나누고, (고맙게도!) 신의 품성과 닮아있다 생각하는 교역자와 나누길 원한다. ‘종교적 인간’이기를 자처하는 순간인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는 종교학자들의 주장이 단박에 받아들여진다. 그들의 존재가 성聖역에 머물기를 이미 원하고 있기에, 숨겨져 있는, 기독교적 검열을 넘지 못하는, 발랑 까졌다고 꾸중 듣는 이야기들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네의 성역을 일단 한 번 후질러 놓고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속되어 상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움키고 들어 올 수 있을 때, 그네들 스스로가 ‘성과 속’에 대한 규정을 새로이 할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강조하면, 일상에서 즉 범속에서 만나는 사물, 인물, 장소 속에서 ‘신성함’은 발견된다. 그런데 그 범속한 것들을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 ‘종교적인 것’으로 갈래짓는 것은 그네들의 경험에 달려있어야 한다. 결국, 성과 속의 구분은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어쨌든 그들이 관심하는 영화, 소설, 성경, 음악, 연애, 과학, 친구, 기도, 비판, 물음, 설교, 수다 등등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구분을 거부하며 ‘모호함’으로 귀결되는 아이가 있다면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일 것이다.

순결, 십자가, 사랑, 거룩, 정결, 정화는 물론 性, 담배, 이단, 죄, 돈 등에 이르는 수 많은 신성한 혹은 속된 언어들의 의미를 스스로가 묻고, 새롭게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신실하게 존중해주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의 체험으로 고백된 신성한 이미지들이 그들의 가슴에서 생동감 있게 재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 바로 딱 여기까지가 머리 굵은 우리네가 끼어들 수 있는 경계일 것이다. 
 
볼테기 꼬집혀 가며 읽었던 발랑 까진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닫는다. 그대의 잔잔한 신성함에 돌이 던져지길 기대하며 말이다. 

쟝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이는 것 같은 네 냄새.  네 글,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씩 못 보아도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좀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 나의 지병인 페시미즘을 고쳐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줄 사람은 너야.  
 쟝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이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 ‘쟝 아제베도에게

<필자 소개>

김정원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 석사 졸업.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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