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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통해 공자를 넘어 ‘도원(道源)’으로<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21> - 『논어20권』요왈편
이은선(세종대) | 승인 2016.07.11 13:03

<명구>

「堯曰篇 1」: 堯曰 咨爾舜.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舜亦以命禹. 曰 予小子履 敢用玄牡 敢昭告于皇皇后帝. 有罪不敢赦 帝臣不蔽 簡在帝心. 朕躬有罪 無以萬方 萬方有罪 罪在朕躬. 周有大牢 善人是富. 雖有周親 不如仁人 百姓有過 在予一人. ... 所重民食喪祭. 寬則得衆 信則民任焉. 敏則有功 公則說.

「요왈편1」 : 요왈 자이순. 천지력수재이궁 윤집기중. 사해곤궁 천록영종. 순역이명우. 왈 여소자리 감용현모 감소고우황황후제. 유죄불감사 제신불폐 간재제심. 짐궁유죄 무이
만방 만방유죄 죄재짐궁. 주유대뢰 선인시부. 수유주친 불여인인 백성유과 재여일인. ... 소중민식상제. 관즉득중 신즉민임언. 민즉유공 공즉열.

<해석>

요임금이 말씀하셨다: “아 그대 순(舜)이여! 하늘의 차례가 그대 몸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시오. 세상이 곤궁해지면 하늘의 봉록도 영원히 끊어질 것이오.” 순임금도 우(禹)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같은 말을 일렀다. 탕(湯)왕이 말하였다: “저 소자 이(履)는 감히 검은 소를 제물로 바치고 크나큰 상제께 고합니다. 죄 있는 자를 함부로 사해주지 않고, 감히 상제의 신하를 은폐하지 않사오니, 그것을 가려내는 것은 상제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제 몸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만방 때문이 아니고, 만방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무(武)왕이 말했다: “주(周)나라에는 하늘이 내려주신 큰 혜택이 있으니 착한 사람이 부유하게 된다. 비록 가까운 친척이 있다 해도 인(仁)한 사람만 같지 못하다. 백성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 죄는 모두 나 한 사람에게 있다.” ... 그가 소중하게 여긴 것은 백성과 식량과 장례와 제사였다. 관대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고, 신의가 있으면 백성이 신임하게 되고, 인첩하면 공적을 이루게 되고, 공평하면 백성들이 기뻐하게 된다. 

<성찰>

작년 1월부터 시작해서 1년 반 동안 이어왔던 『논어』를 통한 집언봉사(執言奉辭)가 마무리에 이르렀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요왈편’은 단지 세 절로 구성된『논어』마지막 편의 가장 짧은 글이고, 초기 사본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서 편집 마지막 시기에 보태진 것으로 보인다. 전(前) 편의 ‘자장편’에 이어서 도(道)의 전수에 관한 것인데, 자장편이 공자 사후의 전승에 관한 것이라면 이 편은 오히려 공자가 전해 받은 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요순(堯舜)’ 시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밝힌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동아시아 전통의 전설적 이상적 왕으로서 요임금이 천자의 자리를 내어줄 때 자기 아들이 아닌 덕 있는 순(유명한 효자)을 찾아내어 그에게 선양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마지막 편의 이름이 된 ‘요왈’은 그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자리를 선양하면서 당부하신 말을 밝혀준다; “하늘의 차례(天之曆數)”가 그대에게 이르러 자리를 받게 되는 것이니 이쪽이나 저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항상 “중(中庸)”을 택하라는 것이다. 

이 ‘중(中)’은 이후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B.C.483-B.C.402)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유교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中庸』의 핵심 언어로 전수되었고,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人心惟危), 도의 마음은 오묘하니(道心惟微), 오직 집중하고 한결같이 하여서(惟精惟一) 중을 잡아라(允執厥中)”라는 가르침은 이후 이어지는 유교적 형이상학과 인식론, 실천론 등의 모든 영역에서 유교 도의 정수로 매번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 유교의 기원 전승에서 잘 드러나듯이 유교 가르침은 원래 혈연이나 가족 중심주의가 아니었다. 요임금이 그 아들 대신에 지극한 효자로 알려진 순을 찾아서 선양한 것이나 순임금도 큰 정성과 수고로 홍수를 다스린 우(禹, B.C. 2070년경)를 후계자로 삼은 것 등은 모두 유교 전승의 본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 뒤를 이은 은(殷, B.C.1600-B.C.1046)나라의 탕왕도 위의 본문이 밝히는 대로 하늘 상제에 대한 깊은 믿음과 세상 만물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만방의 모든 죄가 모두 자신에게 근원한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에 대한 깊은 우환의식과 책임의식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은나라에 이은 주(周, B.C.1046-B.C.256)나라의 무왕도 “비록 가까운 친척이 있다고 해도 인(仁)한 사람만 같지 않다”고 고백하는데, 이것은 유교적 도의 전승이 결코 좁은 가족주의나 연고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고,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보편의 도(仁, 인간성)’에 근거해있음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무왕은 “저울과 도량형을 중하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피고, 없어진 관직을 되살려서 사방에 정치가 행해지게” 했다고 한다. 공자는 이러한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의 사심없음과 겸손의 정치를 가장 존경했고, 그를 지향점으로 삼으면서 “하늘의 도(天命)”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성(仁/禮/言)”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바른 정치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믿었다.

이렇게 유교적 도는 ‘참으로 풍성하게 영적이면서 가장 적게 종교적’인 도로서 오랜 동아시아적 기원으로부터 영글어왔다. 그것은 ‘거룩(聖, the sacred)’과 ‘세속(俗, the profane)’, 종교와 정치, 정치와 교육․문화, 공부(學)와 사회적 실천(公), 가정(私)과 사회(公) 등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긴밀히 연결하는 ‘세간적(世間的)’ 종교의 모습이다. 세속적 삶의 한복판에서 최고의 도를 실현하려는 영적 추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나 불교와는 다르게 유교는 성직자 그룹을 따로 두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러한 유교적 도는 오히려 누구나의 매일의 삶 속에서 매우 일상적이고 실천적으로 종교적 수행을 실천하는 이슬람적 추구와 더 잘 통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유교와 이슬람의 대화는 인류 문명에게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여긴다. 유교의 내재신적 지향은 이슬람의 과격한 신중심주의를 완화시켜줄 수 있다. 반면 이슬람의 매일의 삶에서의 구체적 종교적 실행은 그와 유사하지만 유교적 실천이 그동안 많이 상실했던 본래적 종교적 의미를 다시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이 둘은 모두 여성과 성적(性的) 자아에 대한 물음에서 큰 전환을 필요로 하는데, 이 전환은 서구 기독교 문명의 딸인 현대 페미니즘과의 대화를 통해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더욱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종교문명간의 대화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긴요하고 풍성한 기회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각 문명이 서로 나뉘어져서 다양하게 전개시켜온 문명의 실천들을 나는 우리 모두가 ‘인간(人), 인간성(仁)’이라는 공통점에 근거해서 서로 연결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래서 서구 중세 이후 근대를 시작하는 길목에서 『현자 나단』의 레싱(G.Lessing, 1729-1781)이 외쳤고, 한국 『정역(正易)』의 창시자 일부 김항(一夫 金恒, 1826-1898)선생이 외쳤듯이 서로 간의 화합을 위해서 ‘인간, 인간이면 족하다’라는 말귀가 더욱 귀하게 들려온다. 김일부 선생은 그러한 앞으로의 세대를 ‘후천개벽’의 시대로 지시하면서 “천지는 일월(日月)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일월은 지극한 사람(至人)이 아니면 헛된 그림자다(天地匪日月空穀 日月匪至人虛影)”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공자를 통해서 그의 말을 가지고 뜻을 찾고자 탐색해왔던 우리로서는 그 공자를 넘어서, 또는 그 공자도 거슬러서 더 근원적인 ‘도의 기원(道源)’으로 가고자 하는 일이고, 또한 우리 자신의 고유한 몸과 전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지난 4월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의미도 다시 새겨 본다. 하여 거기서의 성찰의 이야기를 이번 집언봉사의 마지막 말로 함께 드리고자 한다. 문명 간의 대화, 기독교 문명 안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일, 서구 문명과 한국 고유의 전통과의 관계 등에 관한 것들인데, 이와 더불어 이러한 모든 성찰과 생각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 마음속의 기원, 거룩한 ‘성찰의 힘(性理)’을 그 신적 토대로 지시하고자 한다. 우리 각자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모상(聖心)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은선 교수의 산티아고 순례 여행기 <산티아고 카미노(the way of Santiago)와 ‘산 돌(살아있는 돌)’의 비유> 는 다음 회에 게재됩니다.

이은선(세종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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