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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연구소]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 (누가복음서 10:25-37)<말씀의 잔치>
임영섭 목사 | 승인 2016.07.11 15:28

누가복음서 10:25-37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

임영섭 목사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복음서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나오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영향을 끼친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교회뿐이 아니라 사회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나 제3자가 위험해지지 않는데도,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말도 하나의 전문적인 용어가 되어서 미국의 <헤리티지 사전>에도 실려 있다. 그 뜻은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사람”이다. 이 밖에도 18세기 중반의 헨리 필딩의 소설처럼 문학작품에서도 이주제를 종종 다루고 있고, 종종 사회복지단체나 병원 이름으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오늘 비유는 신앙과 교회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그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다.

본문 맨앞을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때 율법교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을 대답으로 하자, 예수께서도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권면하신다. 오늘 비유의 결론은 이미 예수의 이 대답 속에 들어 있다고 하겠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고, 또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율법교사가 나누었던 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9절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된다. 아마도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앞에서 예수를 시험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아서 더 흔들어 보고 싶었는지, 갑자기 율법교사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는 이웃이 누구인지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에게 대답 대신 더 중요한 질문을 이어가신다.

2.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신다. 그리고는 바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은,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되는 고지대에 있었고, 여리고는 바다 높이보다 몇 십 미터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예루살렘은 제사장이 근무하던 성전이 있었는데, 여리고는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보면, 도시의 별명이 “천 그루의 종려나무의 도시”일 정도로 아름답고 숲이 울창한 성읍이었다. 그곳에 헤롯 왕의 겨울 궁전도 있었고, 살기 좋은 곳이라 많은 제사장들이 그곳에 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 비유에서,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갔다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여리고라는 도시는 살기 좋았지만 도시 바깥은 사막이었고, 특히 그 사막에는 동굴들이 많아서 그곳을 근거지로 강도짓을 하는 산적들이 많았다. 바로 그 사막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있었고, 그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졌다는 비유이다. 그 옆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지나가는데 도와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등장시키신 것은, 일종의 율법교사를 향한 공격이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사장, 레위 사람, 율법교사는 최고의 엘리트였고, 종교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지도층이자 기득권층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3절에서 율법교사에게 더 큰 충격을 안긴다. 아마 율법교사는 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등장했으니까, 이제 마지막 세 번째는 일반 사람이 등장해서 도울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당시 유대사회는 계급과 신분이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는데, 미쉬나를 보면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제사장은 레위사람보다 높고, 레위사람은 보통 이스라엘 사람보다 높다.”

그러니까 율법교사도 제사장이 나오고 레위 사람이 나왔으니까 이제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일반 유대인이겠구나, 이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지막 등장인물로 느닷없이 “사마리안 사람”을 언급하신다. 신앙적으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율법교사를 향해,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갔다고 충격을 주시더니, 마지막에는 무시하고 혐오하던 사마리아 사람을 높이셨던 것이다.

이 비유를 듣고 불쾌하게 생각했을 율법교사를 향해, 예수께서는 더 자극적인 내용을 들려주신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그냥 도와준 것이 아니라, 여관으로 데려가서 돈을 지불하고, 필요하면 앞으로 비용을 더 대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지막에 무척 곤란한 질문을 하나 더 하시는데, 36절을 보면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렇게 돌려서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라.” 이렇게 충격적인 결론과 함께 대화를 마치신다.

오늘 이 비유는 복음서의 다른 비유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처럼, 누군가를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아예 율법교사의 질문을 무시하신다.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지만, 예수의 대답은 율법교사의 이웃이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되물어 보신다.

나 중심의 사랑,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고, 누군가를 사랑해서 내가 구원을 받는, 나의 구원과 공적을 위한 사랑을 물어볼 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신다. 반대로, 그 사람에게 너는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느냐, 너의 영생과 이익을 넘어, 그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해줄 수 있느냐, 물어보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고 있는 사랑에 비추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하고 이웃을 돕는 데 중요한 것은 도움받는 이웃의 입장이지 교회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누군가에게 라면 몇 박스 사주고 돈 몇 푼 도와주면서 교회 이름이 적힌 띠를 두르고, 사진 찍고, 방송 타고, 그것을 자랑하고 대단한 일인 것처럼 포장을 하지만, 그런 태도는 율법교사의 입장이지,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결국 오늘 비유는 마치 예수께서 예수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도 마찬가지 라는 교훈을 준다.

3.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여러 상황들은 대부분 무엇인가 확실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특징을 갖고 있고 행동하는 데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 30절을 보면, 강도당한 사람을 묘사하는 데, 그 사람이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지,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이렇게만 나온다. 이 표현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죽은 걸로도 볼 수 있고, 살아 있는 걸로도 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에게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레위기 21장 11절을 보면, 제사장에 대해서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이 나온다. 

지금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만약 그가 죽어 있거나, 아니면 살아 있더라도 그를 도와주다가 죽는다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던 그들에게, “거의 죽게 된 사람” 혹은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고 접촉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도 모르고 당시 한 사람의 사회적 계급이나 상태는 입고 있는 옷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그 옷마저 벗겨져 있었다. 결국 이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일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당시에는 강도들이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가에 누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이처럼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사마리아인에게 모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고, 무엇인가 여러모로 애매모호한 일이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 사람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닥칠 위험이나 곤란한 점들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혹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고, 자칫 율법을 어기는 꼴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제사장과 레위사람에게는 빨리 여리고로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중요하고 바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 비유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 에게도 얼마든지 변명을 하고 빠져 나갈 데가 충분한 그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고, 그냥 지나간다고 해서 100% 그들이 잘못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여지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비유 속에 드러나는 이런 애매한 상황은, 율법교사가 29절에서 했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해 놓고서,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한다. 내가 사랑할 이웃의 범위가 무엇인지, 내가 사랑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현명하게 사랑해야 하는지, 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런 질문을 예수께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불확실한 배경 속에서 말씀하시면서, 사마리아 사람은 무엇인가 확실하고 효율적이고 안전하고 합리적이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하고 비효율적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여리고는 포도주와 올리브의 유명한 생산지였고, 수많은 상인들이 돈과 물품을 가지고 이 길을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고 어떤 신분인지, 심지어 그가 위장한 강도일 수도 있는데 그냥 그를 도와준다. 당시 사회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는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당시에는 여관이 오늘날과는 달리 강도와 도둑들이 출몰하는 가장 전형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수 시대 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단순히 종교적으로만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전에 난입해서 시체의 뼛가루를 뿌렸던 성전 모독 사건도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이 갈릴리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따라서 지금 여리고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이 누군가를 데리고 여관에 간다는 것은, 오해를 받고 유대인들에게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그런 환경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지금 사마리아인이 짐승에 태운 사람이,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이 공격하고 약탈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고, 자칫 강도 만난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그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여관에다가 돈을 주고 사람을 맡긴다는 것도,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위험하고 바보 같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여관 주인과 강도가 공모해서, 투숙객들을 약탈하는 경우도 있었고, 거기다가 돈을 맡기고 간다는 것도 그 돈을 그대로 환자에게 사용할지, 그리고 나중에 돌아왔을 때 양심적으로 들어간 비용을 청구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들고 있는 이 비유는,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보다, 어리석고 무모한 사람이라고, 반대로 비웃음을 살 수 있는 그런 태도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현명하고 합리적인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율법교사가 물어볼 때, 이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랑은 위험한 것이다. 사랑은 손해 보는 일이고, 욕을 먹는 일이며, 비웃음을 받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을 계산하고 묻고 따지고 있을 때, 누군가는 길가에서 죽어갈 수 있다.

결국 누군가는 모든 판단을 뒤로하고, 일단 붓고 싸매고 태워서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야 한다는 뜻이 오늘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있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 너무 제사장처럼 지혜롭고 너무 레위인처럼 똑똑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해도 되는 사랑, 해서는 안 되는 사랑, 사랑해야 할 이웃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웃을, 매우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구분한다. 굶는 사람에게 쌀을 주고,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섬길 때에도,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고르고 가르고 날카롭게 따질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계산하고 따지고 있을 때, 누군가는 무모하게 사랑하고, 누군가는 어리석게 사랑하고, 누군가는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늘 비유처럼, 예수께서는 그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되돌아보면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에 따라 조건 없는 무모한 십자가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성령강림절이 되어야 하겠다.

임영섭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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