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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절대의 힘, 저항의 불길<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7.14 15:32
장도영.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수의 차림으로 눈을 감은 채 검찰 측의 사형 구형을 듣고 있다

1962년 1월 10일 오전 10시, 「혁명(?) 재판소」 1호 법정은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무개로 내려 눌리고 있었다. 재판장 (제1심재판부)은 고영보 공군대령, 재판장의 철금속성(鐵金屬聲)이 법정을 들쑤셨다.

"피고인 장도영 사형!"

장도영과 이회영(李晦英)은 사형, 피고인는 문재준과 박치옥은 무기징역, 피고인 안용학, 송찬호, 방자명은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이들이 체포되기 (1961,7,5) 이틀 전 7.3 일까지 현직에 있던 이들이었다.

장도영은 내각 수반겸 최고회의의장, 이회영 대령은 내각수반 비서실장으로, 육군대령 문재준은 최고위원으로서 헌병감, 박치옥 역시 육군대령으로 최고위원, 안용학은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육군준장 송찬호는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육군중령 방자명은 제 15범죄 수사대장, 실로 쟁쟁한 직책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전 해, 1961년 10월 17일 혁명제판소가 발표한 공소장에 의하면 소위 이 “반혁명 분자들이 박정희 소장과 측근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 기구를 폐지하기 위해 세력들을 규합, 거사일을 7월 3일 새벽 3시로 잡았으며, 2일 오후에는 사병들에게까지 실탄이 지급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모의가 사전에 탄로나 장도영을 비롯해 40여명의 장군, 영관들이 체포되고, 이들과 연계되었다고 판단되는 2000여명의 장교들이 예편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중형의 피고들이 5월 2일, 박정희 의장의 형 면제로 풀려나 이 같은 박정희의 장도영 일단의 일망타진은 박정희 군부에 대한 장도영의 역 쿠데타 획책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더 큰 이유는 실권자는 둘일 수 없다는, 더 나아가 통치자는 하나여야 한다는 박정희 자신의 「힘의 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설령, 장도영이 박정희의 하극상을 순히 수용하고, 박정희의 통제에 전혀 이의의 제기 없이 예,예로 시종한다(했다) 해도 박정희로서는 결코 그가 수용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힘」을 좇는 자에겐 정반의 무력지심(無力之心)이 있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났다 보이는 놈을 그냥두지 못하는, 언젠가는 저놈이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기필코 나를 짓밟고 말 것이라는 무력지심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놈 앞에서는 맥이 뻣는다. 온몸이 비틀댄다. 그래서 마지막의 결심을 한다. 저 놈 없애버려야지. 저놈 살려두면 안돼, 하게 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데 있나?

박정희,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이미 천벌(天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였다. 당시 군부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동문들로 자신의 선배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선배들도 「참모총장」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큰 놈을 두고 보지 못하는 그의 죄성(罪性)때문이었다.

어떤 종교철학자는 ‘하느님’을 ‘역사’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고 했다. 역사(歷史)의 역사(役事)를 거스를 수 없다. ‘역사는 절대다’라는 의미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절대의 역사(歷史)에 역사(役事)가 있다. 과제가 있단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를 허락 한다’는 것은 곧 역사 자신에의 반역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16 군사정변 당시 장도영과 박정희

박정희의 자가당착(自家撞着)

박정희는 신이 되려 한다. 그것은 정말 당착이었다. 자가당착이라 했던가? 사실이다. 사람인 주제에 신이 되려 하는 것이다. 신이 뭔가? 내 위의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신이 뭔가? 내 위의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신이 되겠다”한다는 아니다. ‘나는 신이다’했다는 말도 아니다. 내 위에 서는 놈, 내 위에 있는 놈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신이 되기 시작한다. 자신이 느끼듯 못 느끼듯 알고하던 모르고 하던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명 「알레스카토벌작전」으로 알려진 장도영 일단을 「토벌」한 후 부쩍 자신을 신(神)으로 여기는 적지 않은 무리들이 전후좌우를 호위한다!

그러나 그런 박정희에게 역사는 고마운 기회를 허락한다. ‘혁명공약’을 통해 약속한 대로 원대로 복귀해야 한다는 본심의 발현이라는 것 말이다. 그 본심의 발현의 기세 역시 끈질겼다. 그 세찬기세로 치솟는 본심은 밤잠을 이룰 수 없게 했다. 

“이제는 원대로 복귀(原隊復歸)하라. 복귀하라, 복귀하라, 북귀, 복귀, 복귀…….”
하고 한 날밤, 원대복귀를 명하는 역사의 밤은 그러나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런데다 덮쳐오는 문제가 또 있다. 함께 일을 치러낸 소위 그 ‘혁명의 주체’들 중 대다수가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칠 일이었다.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는 2월 18일, 민정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불참선언은 「시국수습에 관한 9개방안」이 전제된 것으로, ‘보복의 금지’, ‘혁명정신계승’이 그 핵심이었는데, 그것은 군사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분석이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2월 18일 ‘민정불참선언’은 원대복귀를 주장해오는 이들에겐 큰 안심을 주었고, 차제에 원대복귀를 선언토록 압력을 가하게 한다. 박정희가 민정불참을 선언하고 꼭 열흘째 되는 2월 27일, 박임항, 윤태일, 이주일, 김동하 등은 박정희와 한 비밀요정에서 회합을 갖고 제1차 원대복귀성명을 발표했다. 
이른바 2.27 선언이라는 것이다. 이제 혁명주체들의 원대복귀주장은 확실한 대세를 이루었다. 

1996년 5월 16일 문화일보는 다음과 같은 박창암의 한 인터뷰를 보도하고 있다. 5.16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원대복귀에 대한 최고위원들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대부분의 혁명동지들은 혁명당시 공약을 통해 국민들과 약속한대로 원대 복귀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면서 혁명정신의 변질을 격탄 한다. “당시 최고위원 32명 가운데 복귀를 반대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

“당시 최고위원 32명 중 원대복귀를 반대한 사람은 4명뿐이었다”는 박창암의 증언은 이후 박정희의 정치적 행보가 그나마도 얼마나 반혁명적, 반역사적일 수밖에 없었겠는가를 명시해 준다.

말이 좋아 혁명세력이지 분명히 말해 이후의 군정참여세력은 박정희의 충실한 주구(走狗) 바로 그것이었다. ‘구국의 영웅’, ‘500년 만의 인물’, ‘하늘이 낸 사람’등등 이후 박정희는 그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신의자리’에 오르게 된다! 원대복귀성명을 발표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원대복귀성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박정희와의 담판에 들어갔다.
“왜 원대복귀를 미적대나. 만약 원대복귀를 거부하고 기어이 민정에 참여하겠다면 우리는 빠지겠다!”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래도 아직 역사가 박정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인데, 박정희는 이 같은 역사적 관심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었다. 대부분 혁명동료들의 주장에 박정희는 마지못해 다시 원대복귀성명을 발표했다. 제2차 성명이었다. 그러나 제2차 「원대복귀」성명이라는 것이야말로 철저히 성명으로 끝난다. 제2차 원대복귀 성명 수일 후 3월 16일, 중앙 보부는 「반혁명사건중간수사결과」라는 것을 발표한다. 

김동하, 박임창, 박창암, 이규광등, 박정희에게 원대복귀를 강력히 요구, 제2차 복귀 성명을 내게 했던 원대복귀 주창자들을 포함한 20여명의 인사들이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중앙정보부의 반혁명사건 중 간 수사결과 발표를 계기로 박정희는 중대(?) 결심을 한다. 아예 정권을 갖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반혁명의 혼란 속에서는 정권의 이양도, 원대복귀도 불가능하다면서……동시에 다시 한 번 역사의 반전(?)을 시도한다. “군정을 4년간 연장 하겠다”는 것이었다. 백척간두에 봉착한 조국의 구출을 위해 부득이한 결단이라면서…….

혁명의 전략을 반대하는 군부세력을 평정한 박정희는 그 반란의 칼을 이제는 민정, 민간계(民政, 民間界)로 돌렸다. 우선 정권장악을 위한 1차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본격적인 「중정의 시대」곧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 국가행정전반을 관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국가안전보장에 관계되는 국내의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할 목적 하에 3000명의 특무부대요원들로 출발한 소위 그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중앙정보부는 명실상부한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박정희의 권력이 조준하는 것은 군부 내의 반대 내지는 저항세력만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가슴에 품고 있는 이후의 집권기획에 저항하는 민간세력에 대해서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저항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는다.” 체포, 연행, 투옥, 고문이 예사가 된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단언엔 ‘처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의 종말의 예고

박정희 군부정치 종말의 예고는 너무 일찍 울린 셈이 됐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구호, 학술, 종교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1,170종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킨 것이다. 게다가 강력하게 언론을 검열했다. 3.16일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 기성정치인 4,734명의 정치 활동을 향후 6년 동안 금지시켰다. 박정희는 이 같은 일련의 행위들이 국가의 안위를 위해 당연한 것이라거나 혹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항변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자신의 종말에 대한 아주 분명한 예고 였다. 주변을 조용히 만들어 놓고 이루어지는 민주주의는 없으니 말이다. 주변을 조용히 만들어 놓고 해가는 정치란 곧 일인정치 아닌가? 그런데 박정희는, 홀로 하겠다는 정치는 반드시 민중의 생명적 저항을 부른다는 이 날 빛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초보적인 상식마저 결한 자였다. 

박정희의 독재. 그랬다. 그것은 실로 통렬한 그의 종말의 예고였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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