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기억, 그때만의 기억

'60년대의 중반에서 70년대의 중반에 걸쳐 20대를 보냈던 한국 사람이라면, 언뜻 보아 의미 없어 보이는 10년 단위의 그 연대가 가지는 차이를 대개는 알 것이다. 그것은 막걸리와 생맥주의 차이이며, 젓가락 장단과 통기타 반주의 차이이고, 목 자른 군화와 청바지의 차이입니다. 물론 다방과 고고홀, 가락국수와 라면의 차이는 애써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이문열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의 한 대목입니다. 저는 이 글을 참 좋아합니다. 연대가 주는 묘한 감동을 지금에서 '그 때의 기억'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기억을 얼마든지 되새김 할 수는 있지만 ‘추억’만 할 수 있는 '그때만의 기억'의 장소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때만의 기억'은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된 이질, 거기에서 묻어나오는 연대가 주는 작은 행복이 전부일까요? 60년대와 70년대의 이야기를 80년대와 90년대의 이야기로 읽어본다면 마냥 이색적이고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젓가락 장단과 통기타 반주의 차이는 디스코텍과 힙합의 차이로 목 자른 군화와 청바지의 차이는 군인과 용역의 차이라는 무거운 웃음으로 그리고 언제나 그때의 결말은 ‘독재’와 ‘문민정부’의 차이로 귀결되겠지요. 

큼지막하게 두 동강 낸 10년 단위의 압축된 감흥은 애석하게도 지금의 20대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의 보편적 감정까지 치고 들어오지 못한 듯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연대도 작은 감흥도 공감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우리는 그렇게 그때의 민주주의와 그때의 공동체 그리고 그때의 기억들만 좀먹고 사는 어설픈 젊은이들에 불과하겠지요. 

냉소주의

냉기만 짙어진 사회입니다. 철학자 강신주가 구태여 ‘냉소주의’라는 말을 다시 회자시키는 데에는 ‘어설픈 젊은이들’의 큰 보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신주는 세상만사를 구경꾼의 자세로 보는 우리들의 모습만 꼬집고 싶은 게 아니었을 겁니다. 엄연히 말해 냉소주의에는 ‘냉소적 인간’의 숱한 노고가 깃들여 있는 것이 분명 하니까요. 그러니 현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 변화를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는, 그러한 의지나 능력이 결핍된 ‘그들’의 모습도 같이 꼬집고 싶은 것이지요.

편 가르기 식의 대담은 원치 않지만 ‘우리’와 ‘그들’은 이미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져있는, 불가분의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지금의 청년들과 지금의 기성세대들의 완성된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별 다른 효력은 없어 보입니다. ‘냉소주의’라는 말 자체도 지나치게 가벼운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우리들의 태도는 이제는 오히려 ‘인자함’에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출처 : 인스티즈)

대 2병 

중 2병으로 시작된 질환은 어느새 대2병으로 까지 번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아탐색의 물음조차 병으로 치환해버리는 어른들의 막무가내는 청년에게도 똑같이 선고되어집니다. 새삼 느끼지만 언어의 힘은 대단히 무서운 것 같습니다. ‘병’으로 일단락을 지어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철저히 구분하여 아직 그 사이에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는 아이들에게 ‘정상’궤도로 강제 편입시킨 셈이니 말이지요.

청년들이라고 크게 다를까요? 처방 없이 지속화 되는 ‘병’은 나아질 리가 전혀 없습니다. 가속화 되었다면 그것이 더 정상일 것입니다. 취업과 스펙, 인맥과 줄타기, 그리고 유전 받은 약육강식의 세계는 우리가 갖춰야 할 대학생의 기본 자질입니다. 캠퍼스 생활의 낭만은 과거 선사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정도로만 인식하면 충분합니다. 생존지상주의의 종착지는 ‘나만 살기’일 텐데 과연 뭐가 중요할까요? 고민할 겨를도 없습니다. ‘정상’이라는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몸을 실어야 ‘병’을 모면할 수 있으니까요. 

올해 대학 4학년을 한 학기 남겨둔 저는 대2병을 2년 더 겪고 있는 난치병 환자에 불과합니다. 아니 어쩌면 불치병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 한 켠에는 불치병이 치료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더 큽니다. 이것은 모순이겠지요. 하지만 모순은 애초에 우리의 상황에 명명되어진 ‘병’이라는 모멸감과 책임을 떠맡기는 무책임이 아닐까 생각이듭니다. 

묻지마! 안부!

연일 안녕하냐는 무색한 인사만큼이나 많이 듣는 말이 앞으로의 계획입니다.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할 텐데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무례하게들 종종 묻곤 합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동기들에게는 신세한탄과 넋두리 그리고 푸념이 병행하며 서로를 도닥거리고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여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참 선배들이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은 왜 그렇게 꺼려지는지, 더 아니꼬운 것은 십 년이든 일 년이든 졸업을 하고 ‘실전’으로 나갈 때 비춰지는 모양새나 폼이 참 얄밉게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또 다시 운운할 과거의 회상이나 좀먹으면서 조언을 늘어놓을게 뻔하겠지요. “그때는 그랬는데, 이게 실전이야!”

아프지 말자 

20대의 청년의 미래라는 주제로 난해하고 잡스러운 이야기로 여기까지 온 것에는 확고한 믿음보단 불분명한 미래가 주는 불안이 주된 감정이라고 하면 얼추 이해가 될까싶습니다. 청년의 미래라는 주제로 글을 시작하려 할 때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난해한 것 중에 하나가 글을 쓰는 필자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20대를 4년 하고도 반년을 지내온, 새내기도 아니고 헌내기도 아닌 딱 어중간한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자니 보잘 것 없고, 앞을 내다보자니 캄캄한 나의 속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분명한 미래가 주는 캄캄함은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론 ‘캄캄함’이 주는 막연함은 우리의 기대와 불안이 뒤엉켜 시작되는 불편한 동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희망찬 미래와 무한한 가능성으로 오늘의 상황을 위로할 마음은 없습니다. 상처가 난 부분은 덮음으로 낫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살과 딱지가 벗겨져 가면서 낫기 때문이지요. 정의로운 사회는 없었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꿈들은 있었다라는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희망찬 미래로 도색하기 보단 잿빛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꿈꾸는 자유만큼은 넉넉히 허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도 아직 돌아올 계절은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박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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