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이웃종교 칼럼 연재
현존의 그리스도와 해후<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6.07.19 10:52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1-46; 새번역) 
 
"Then He will also say to those on His left, 'Depart from Me, accursed ones, into the eternal fire which has been prepared for the devil and his angels; 42.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nothing to eat;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nothing to drink; 43.I was a stranger, and you did not invite Me in; naked, and you did not clothe Me; sick, and in prison, and you did not visit Me.' 44."Then they themselves also will answer, 'Lord, when did we see You hungry, or thirsty, or a stranger, or naked, or sick, or in prison, and did not take care of You?' 45."Then He will answer them, 'Truly I say to you, to the extent that you did not do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you did not do it to Me.' 46."These will go away in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into eternal life."(Matthew25:41-46; NASB)

(1)
기독교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초기기독교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통일된 예수상(the unified image of Jesus)’이 성립될 수 있었는데요. 

AD452년 칼케톤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였어요. 예수는 신성(神性)에서도 완전하신 분이며 인성(人性)에서도 완전하신 분이라는 이른바 신인동질(神人同質)의 양성론(兩性論)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는 주장이었는데요.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을 주장하거나, 그 반대 주장도 모두 이단으로 단죄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이러한 양성론의 맥락에서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어요.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1:3-4)  

무슨 말인가요? 예수그리스도는 ‘육에 따르면(kata sarka)’ 다윗후손이지만, ‘영에 따르면(kata pneuma)’ 하느님의 아들로 확정되었다는 것이지요. 육에 따른 예수와 영에 따른 예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에 따른 예수와 곧 영에 따른 예수의 불이성(不二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에 따른 예수그리스도는 무엇인가요? 다윗 후손 요셉의 아들이지요.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가재도구를 만드는 일로 가족생계를 이어갔지요.(막6:3) 동생들이 성장하여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들어서자, 예수는 출가(出家)하여 공인(公人)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그 때 나이 서른 살 즈음이었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전역을 주유(周遊)하지요. 사회의 바닥에서 씨알민중이 겪고 있는 비참한 삶의 실상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유다광야에서 예언자 요한을 만나게 되고, 일정기간동안 그의 문하생이 되지요.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땅이 열리는 다시 개벽(開闢)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신령함과 존귀함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나사렛 촌부(村夫)에 지나지 않는 자기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메시아적 자기이해인데요.(막1:9-11) 

메시아적 공인(公人)의식은 예수께서 펼친 하느님나라 복음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됩니다. 로마와 헤롯 왕조의 중세(重稅)정책에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사회의 저변층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는데요. 그들 가운데는 소농, 소작농, 농노, 걸인, 병자, 창녀, 어린이 등 경제능력을 상실한 씨알민중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펼친 하느님나라 복음운동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첫째는 개벽(開闢)운동이었어요.  “때가 찼고, 하느님나라가 임박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은 예수설교의 요약인데요.(막1:14)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분별하고 살라는 말이지요. 그리스어 ‘카이로스’는 하느님께서 우주역사에 개입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인류역사의 카이로스를 4단계로 나누어 보았어요. 원시공산제 시대, 고대노예제 시대, 중세봉건제 시대, 근대자본제 시대가 그것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는 인류역사를 사탄이 지배하는 시대와 하느님께서 지배하는 시대로 본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예수의 ‘두 시대론’이 칼마르크스의 ‘4 시대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탄의 지배 특징은 무엇인가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입니다. 귀족에 의해서 씨알민중이 고난당하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계급사회에 진입한 이래로 인류역사는 곧 사탄에 의해 지배당하는 역사였습니다. 공(公)의 사유화 역사였습니다. 사탄의 지배는 현재진행형이지요. 현대 세계자본주의 시대는 어떤가요? 정치귀족에서 자본귀족에로 단지 권력주체의 장소이동만이 있었을 뿐, 사탄의 지배 현실은 여전하지요. 

이와 달리 하느님 통치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공공성(公共性)의 가치입니다. 사회정의(social justice)이지요. 사유화된 공(公)의 회복운동입니다. 공(公)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유화된 공(公)의 사회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요. 예수께서 생각한 하느님나라 통치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공유화(公有化)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의 지배는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하느님의 통치시간이 동터오고 있다는 것이 “때가 찼고, 하느님나라가 임박했다”는 메시지 내용입니다. 소수귀족의 지배에서 씨알민중의 지배에로 개벽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두 시대가 교체되는 틈바구니에 서 있다는 개벽종말의식을 갖고 살았던 것이지요.   

임박한 하느님나라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요.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한 생각 바꿈’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의식개혁이 동반되지 않은 사회개혁은 공허하지요.  

새 밥에 헌 밥을 섞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길들여진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요. 과거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 결코 새 역사가 펼쳐질 수 없음을 예수는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어요. 이는 한국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요. 

둘째로 예수의 하느님나라 복음운동은 밥상공동체 운동(박재순)이었어요. 사람다움의 가치를 ‘더불어의 삶’에서 찾은 것이지요. 결코 돈과 권력의 사유화에서 찾지 않았어요. 공공(公共)복지의 확장에서 찾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언한 하느님나라의 수혜자는 누구인가요? 가난한 사람들(ptochoi)이지요. 다수인 씨알민중입니다. 결코 소수귀족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다고 하셨어요.(룩6:20) 이는 예수운동의 성격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브뤼헬(1525~69)의 1598년작 '산상설교'. 모여든 군중 가운데 예수가 있다. '산상수훈'을 사람과 우거진 숲과 새와 하늘이 듣고 있다.

한 때 씨알민중은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요6:15) 빵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인데요. 이어오병(二魚五餠)의 기적으로 5천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인 뒤였습니다.   

예수는 또한 유다사회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세리나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한 밥상에서 먹고 마셨어요. 씨알민중의 동반자요 친구로 지냈어요.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룩7:34) 

셋째로 건강회복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랐던 씨알민중 가운데는 병자들이 많았어요.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과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막5:21-43), 30년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했던 중풍병자(요5:1-9), 시각장애와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건강회복에 힘쓰셨어요.(요9:1-12) 

갈릴리 농촌의 씨알민중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동반자로 살았던 예수를 로마제국은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씨알민중의 인간 존엄성 회복운동이 로마의 식민 질서를 위협하는 반국가적인 행위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상이 인간의 성품을 지닌 예수의 공생활(公生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성품을 지닌 예수는 어떻게 증언되고 있나요? 권력자의 손에 죽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 하늘에 오르시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마지막 때 심판관으로 파송된다는 것입니다.(행1:3-9) 

(2)
본문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오신 예수께서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심판할 것인가를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관 예수께서는 천사들을 대동하고 세상에 오시지요. 심판관 예수는 앞에 선 사람들을 두 편으로 갈라 세우지요. 오른 쪽에 양을 세우고, 왼쪽에 염소를 를 세웁니다. 오른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지요. “너희는 태초에 너희를 위해 마련하신 나라를 물려받아라. 내가 배고플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다. 목이 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집에 초대해 주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옷을 주었다. 몸이 아플 때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면회를 와 주었다.”

 그들이 묻습니다. 주님께서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 언제 저희가 보살펴드린 적이 있나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 형제들 중에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마찬가지로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말하지요. “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 한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3)
몇 가지 점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가장 작은이들’, 곧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씨알민중에게서 자아정체성을 찾고 있어요. 씨알민중의 하나로 살았던 예수의 공생애(公生涯)가 본문에 반영되어있습니다.  

둘째, 하늘나라 상속이 약속된 오른 쪽에 분류된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한데요.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잊은 것이지요. 베풀었으면서도 베풀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은 것인데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불교에서는 자선의 최고 형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상심리 없는 자선을 말합니다.     

베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시자(施者), 수자(受者), 시물(施物)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도와주었다는 생각 없이 도와주면 어떻게 되나요? 도와주고도 생색내지 않게 되지요. 주었다는 생각 없이 주고, 받았다는 생각 없이 받는 것입니다. 주었으되 주었다는 생각이 없고, 받았으되 받았다는 생각이 없을 때, 진정한 주고받음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예수말씀은 무주상보시의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자연에는 주고받음이 없지요.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고받았다는 분별은 단지 생각의 산물이지요. 생각에 머물지 않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나와 너라는 이분법을 초월한 ‘전체로서의 참나’ 발견이 필요한데요. 너를 나로 삼는다면, 베푼 것이 베푼 것이 아니고요. 받은 것이 받은 것이 아니지요. 내가 나에게 한 것일 뿐인데 무슨 주고받음이 성립되나요? 

한 도사가 한 겨울에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딱한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입혀주었습니다. 헌데, 그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사가 이상히 생각되어 물었어요. “이 사람아, 남의 신세를 졌으면, 최소한 고맙다는 말 한 마디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문둥병자가 말했어요. “보소, 도사양반, 당신이 벗어준 외투를 내가 입어주었으니, 당신이 보시할 기회를 내가 허락해준 것이 아닌가요? 오히려 당신이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도사는 그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셋째, 씨알민중과 예수는 둘이 아니라고 본 것인데요. 씨알민중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씨알민중의 현 상태 그대로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말이지요. 씨알민중의 존귀성 선언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당하고요. 부자들이 대접받는 사회풍토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나요? “너희 부자들은 화가 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부른 너희는 화가 있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지금 웃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눅6:24-25) 

오늘의 예수는 누구에게서 만날 수 있나요?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의 실천을 통해서 현존(現存)의 예수그리스도와 해후하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충주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관련기사 icon예수의 첫 설교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