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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구원자인가 구원의 매개자인가? : 한국개신교 안에서 메시아 찾기<교회개혁 담론투쟁 : 한국교회와 메시아니즘>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 승인 2016.07.19 12:55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

“선택받은 자”, “주의 종”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 소위 ‘믿음 좋’고 ‘신앙생활 열심’인 신도들이 자신의 목사를 칭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위의 칭호에는 몇 가지 함의가 담겨있는데, 첫째로 일반 신도와는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다. 목사란 일찍이 성직자가 되고자 하는 소명을 갖고 성스러운 길을 선택했으며, 따라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성스러운 사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단순히 자신의 선택에 기인한 것이 아닌, 단지 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기에 신이 직접 그를 선택했다고 하는 이해가 담겨있다. 셋째, 따라서 그는 신의 계시를 밝혀내고 전달하며 실행하는 존재로서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어릴 적 출석하던 교회에서 나중에 커서 목사가 될 거라고 철없이 공언하고 다녔던 필자는 실제로 목사가 되기 전부터 ‘믿음 좋’고 ‘신앙생활 열심’인 집사님, 권사님들에게서 “선택받은 자”, “주의 종”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될 사람이라며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한 때, 그것이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으로 여기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에 원서를 쓰고 입학하자 이제는 ‘새끼목사’라는 호칭을 받기에 이른다. 사실 정부가 인정한 (신학)대학에 원서를 내고, 교육부가 시행하는 시험을 치러 대입에 성공한 것을 뿐인데 말이다.

20년이라는 길고 긴 과정을 마치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된 지금(작년 10월에 목사가 되었으니 아직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호칭들과 그것으로 인해 규정되어 버린 나 자신이 불편하고 낯설게(unheimlich)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일차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목사라는 교회 내 직책이 갖는 실질적 의미와 “선택받은 자”, “주의 종”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함의하고 있는 종교적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목사는 하나의 직책일 뿐이다!

목사란 무엇일까? 단순히 말하자면, 목사는 특별히 개신교 전통에서 하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예전을 집례하고 공동체 구성원인 신도들의 교육과 지도를 담당하는 성직자를 일컫는다. (‘그럼 과연 목사는 성직자인가?’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겠다. 일단 ‘성례’를 ‘집례’하니 성직자라고 해두자.) 영어로는 pastor(목자: 그리스어 “ποιμήν”의 라틴어 번역 “pastor”에서 유래), 독일어로는 Pfarrer(교구/교회 관리자: 그리스어 “παροικία”에서 유래 “고향 근처에”의 뜻을 가짐)라고 번역된다. 위의 두 단어만 놓고 볼 때, 목사는 위계적 의미를 전혀 갖지 않고 있다. ‘pastor’는 보살핌의 의미를 ‘Pfarrer’는 관리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사제(“Priester”: 그리스어 “πρεσβύτερος”: “presbyteros”, 즉 ‘장로’의 의미에서 유래) 개념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사용된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교회 내 고착화된 위계질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일방적 권력화의 폐해에 대한 반성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이해하는 목사의 정체성과 그 역할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는 목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목사가 교회 내 다양한 은사에 따른 다양한 직책 중 하나로, 어떤 위계적 권위도 갖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3장 1~13절에서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명시하면서, 내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조용기 목사 성역 50주년 기념 성회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목사의 위치와 그 직책에 관한 이해는 이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지위를 구약성서 속 제사장 직에 대한 규정을 토대로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선별되고 거룩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모세를 상징으로 하는 종교적 권위주의와 레위인을 상징으로 하는 종교적 혈통주의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대변되는 종교적 선민주의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목사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 “주의 종”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자”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교회 내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관철시켜 결국,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위계질서 내에 귀속하도록 하며 지속적으로 그것을 재생산 하도록 했다. 이렇게 형성된 위계적 순환체계가 목사들의 욕망과 맞물려 돌아 거대한 권력 메커니즘 추동해나가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욕망의 시스템은 목사들에게 ‘메시아 슈트’를 만들어 입혀 막강한 존재로 변신시켜 놓는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신약성서와 종교개혁의 정신에 근거해 형성된 개신교의 목사직은 일방적인 신의 선택이나 명령에 의해 선별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신에게 부여받은 각각의 기능적 특성(은사)에 따라 공동체에 의해서 위임되는 하나의 직책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직책의 종교적 배경에는 신적 권위에 대한 공동의 인정과 그에 대한 수용(고백)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즉, 하나의 종교 공동체가 한 개인을 특정한 직책으로 선택하고 위임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종교적 매개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적 계시의 수용과 그 실행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공동의 신앙 내용(Glaubensinhalt)이 부정될 경우 그 공동체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그 고백된 신앙 내용이 갖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며 간접적인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칫 그 공동체는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의 욕망이 아무런 제약도 없이 관철되어 왜곡/변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그렇다면 개신교 공동체가 목사의 직책을 확립하고 한 개인에게 그 직책을 위임함에 있어서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앙 내용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설립의 목적과 목사직의 정체성에 국한하여 간단히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올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 사건을 준비하고자 교회를 설립하고, 그 때까지(카이로스) 각 은사에 따라 직책과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교회가 기다리는 그 때는 그리스도의 때이다. 즉, 그리스도 이 외의 어떤 존재도 공동체 설립 및 그 직책에 있어서 원인과 목적이 될 수 없다는 평등의식이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교회의 성격뿐만 아니라 교회 내 한 직책 중 하나인 목사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핵심적 전제가 된다.

구원의 매개자 그리스도

그리스도(Χριστός; Christos)는 히브리어 ‘메시아’(מׇשִׁיחַ 마쉬아흐)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하고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야웨에게 선택(기름부음 받은)된 왕을 칭하는 말이다. 한편, 일부 예언서에서는 메시아적 제사장(messianischer Hohenpriester)의 표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 뿐만 아니라 오직 야웨에 의해서 임명된 왕에게만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허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야웨가 기름부음 받은 왕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그 권위를 위임하였다는 사실을 선언하였다.2)

이를 단순히 왕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권력의 정당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왕은 단지 '신의 대리자'(Gottes Vermittler)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권력의 상대화를 통한 평등사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신적 대리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표상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까지 이어져 온다. 여기서 신과 그의 대리자로서의 메시아는 서로 구분되며 메시아는 결코 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이방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거쳐 메시아로서 예수에게 신적 본질을 투영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의 메시아성을 그대로 신성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3) 따라서 예수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의 영향으로 보기 보다는, 후기 유대 묵시사상과 그리스-로마적 종교/세계관의 융합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 결국 예수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보다는, 그가 신의 구원을 실현할 존재, 즉 구원의 매개자라고 하는 고백으로 보는 것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고대 이스라엘 혹은 유대 메시아사상의 본래적 핵심은 ‘다윗의 현현’과 그를 통한 ‘야웨의 통치’의 실현이다. 이것이 현실 정치와 역사적 상황의 한계로 인해 지연됨으로써 점차 역사를 초월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즉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다림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와 초대교회 공동체가 고백하는 예수에 대한 메시아적 표상은 이러한 초월적 메시아니즘이 관철되어 형성된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은 이러한 유대적 메시아 표상과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유대적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권력과 힘의 상징이다. 다윗이 점유했던 권력과 힘을 회복함으로써 야웨에게 위임받은 통치를 실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시아적 표상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권능과 정치적 지배력의 회복을 전제로 하기에 법적·제의적 역할이 강조된다.5) 이러한 메시아 표상은 국가와 권리를 빼앗긴 당시 유대민족의 상황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작금의 팔레스타인 사태에서 보듯이 수많은 끔찍한 전쟁과 분쟁의 씨앗이 될 뿐이다.

이와 달리 복음서 속 예수의 표상은 어찌 보면 무능하고 무질서한 존재로 묘사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왕, 혹은 제사장에게 부여되는 ‘기름부음’의 의식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몸을 씻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다’(회계)는 의미의 세례 의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여기서 ‘기름부음’의 의식은 신탁의 의미를 ‘세례’의식은 결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복음서 내, 여러 신학적 채색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신에게서 선택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신의 구원의지에 동참하는 매개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병 고침, 귀신 축출 등의 기적적 구원행위를 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자기이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구원의 행위를 실현함에 있어서 그 행위의 대상을 단순히 수혜자로 규정하지 않고, 믿음과 결단이라는 제 3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구원 행위의 파트너로 호명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는 구원 사역의 행위자로서 예수 자신의 역할을 매개자로 제한하고, 신과 인간의 협력을 통해 구원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선언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신적 구원 의지의 전달자로 그리고 그 구원 사건의 매개자로 자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민중이 함께 발화시킨 ‘신과 (인간)혁명의 통일’6)적 사건인 것이다.
  
2016년 현재, 이 세계에는 자칭, 타칭 혹은 속칭 메시아들로 넘쳐난다. 

정치, 문화, 경제, 종교의 전 영역에 걸쳐 수많은 메시아들이 저 마다 각각의 구원과 혁명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수많은 메시아들을 양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자신이 갖는 다양한 욕망에 따라 입맛에 맞는 인스턴트 메시아를 선택하게끔 만들어 왔다. 어떤 메시아는 화려함과 권위의 가면으로, 어떤 메시아는 소박함과 진실의 가면(persona)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그 가면 뒤에 욕망을 감추는 처세술을 진리인양 가르치고 있다. 자신이 쓴 가면이 사실은 자신에게 계시를 내려준 존재의 본얼굴(substantia)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수많은 목사들은 스스로를 ‘기름부음 받은 자’로 내세우면서, 자신이 드러내는 모든 것이 마치 신적 권위를 갖는 양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짓된 욕망의 메시아가 설파하는 거짓 진리가 사람들의 욕망과 결합하여 더 큰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욕망의 메시아가 부르짖는 욕망의 사랑과 욕망의 용서, 욕망의 섬김과 욕망의 나눔. 그리고 그 욕망을 궁극적으로 실현시킬 욕망의 구원과 욕망의 천국. 그 욕망의 이면에 자리 잡은 거짓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많은 메시아들.

메시아는 구원 그 자체를 그리고 그 구원의 의지를 끊임없이 계시하는 신 자체를 드러내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메시아는 구원자가 아닌 구원의 매개자로써 그 구원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욕망의 찌꺼기를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이끄는 존재다. 스스로 ‘기름부음 받’고 ‘선택되었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목사와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매개된 구원의 의지와 사건에 동참하고자 스스로 결단하고 참여한 존재일 뿐이다. 메시아는 우리 가운데 감추어져 찾아내야할 ‘구원의 매개자들’인 것이다.

메시아 찾기

목사들이여,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이여 스스로를 ‘기름부음 받은 자’, ‘선택받은 자’라고 하며 메시아로 주장하지 마라! 그 대신 그대들과 함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함께 구원 사건을 일으킬 메시아를 찾아, 그를 통해 스스로를 먼저 구원하라!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 (마태복음 25장 40, 45절 중)

<각주 설명>

1) 스가랴 6:13b. "쿰란 사본들과 12예언서에서는 제사장적 메시아를 왕적 메시아 보다 강조하고 있다.“ Wolfhart Pannenberg, "Grundzüge der Christologie",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Gütersloh, 1964, 24.
2) 위의 책, 25.
3) 위의 책, 같은 쪽.
4) 위의 책, 같은 쪽. 그리고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7, 86쪽 이하 참조.
5)  안병무, 위의 책, 90쪽 이하 참조.
6)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서울, 1983, 80쪽 이하 참조.

 

<필자 소개> 

박재형

한신대학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독일 뮌헨대학교(Ludwig-Maximilians Unversität München)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또한 ‘한국민중신학회’와 ‘대구와 카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민중신학회를 지도하며 함께 민중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의 제자리 찾기와 이를 위한 민중신학의 역할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신학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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