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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사랑법] 민중신학은 가난한 사람을 두둔하는 신학이 아니라 주체를 추구하는 신학이다<민중신학의 사랑법과 한나 아렌트의 아모르 문디> ③
이인미 | 승인 2016.07.29 15:31

주체가 문제되다 혹은 주체를 문제삼다

우리말로 주체, 아니 한자어 ‘主體’는 ‘subject’를 받은 이를테면 수입품이지만, 그나마도 직수입이 아니라 일본을 거쳤다. 그러므로 主體(主-體, 주인-몸)의 의미를 새길 때는 그 어원이 서양에 있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한자어의 의미보다는 subject(sub-ject, 아래에-던지다)를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주체, 주체성(subjectivity)은 서양의 근대에 본격적으로 철학의 기본원리로 대두되었다(김익달 외 1963: 1018). 

주체는 ‘sub’를 가진 또다른 개념 ‘실체(substance)’와, 서양의 근대를 지나며 점점 더 동일시되는데(Http://plato.stanford.edu/), 실체는 곧 자아(self)였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주체를 일컬어 “존재하기 위해 어떠한 타자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자아이자 실체였다. 스피노자는 주체를 자족적 실체 즉 “자기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타자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김상봉 2002: 273). “실체는 본질적으로 주체이다”라고 언급한 헤겔에게서도 실체는 주체이고 주체는 자아였다(김상봉 2002: 231). 그래서, 근대의 출발점은 “자명한 주체”이며(이진경 2016: 219-220), “주체 없는 근대철학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이진경 2016: 41), 기실 서양정신사에서 주체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사유의 주제이다. 김상봉은 전체 서양정신사의 본질적 성격을 ‘자아도취자 나르씨시스트,’ 즉 ‘홀로주체성’으로 요약하고 있다(김상봉 2002: 30).  

서양적 주체이해는 근대를 기점으로 서양 바깥으로 활발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본 적이 없”는 서양정신사의 주체는, “오랜 자기상실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김상봉 2002: 33). 우리가 서양의 객체로 세계사에 편입되었다는 역사인식을 할수록, 근대화를 간단히 서구화로 해명할수록, 우리는 자족적 존재인가 성찰할수록, 주체는 난제 중의 난제가 되었다. 일제식민지시대 임화의 이식문학론(1939-1941)은 그 와중에 주체성을 고민·궁리한 결과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신승엽 1991: 173-197). 

주체는 1970~80년대에 다시금 문제가 되었다. 일명 ‘체제비판적 지식인’들은 역사적 주체성의 위기를 감지하며,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이는, 봉건잔재와 식민잔재를 청산 못한 채 군부독재치하로 이어진 역사발전과정에서 무능력·무기력했던 지식층의 정치적 짐(burden)에 대한 반성문 격이었다(Namhee Lee 2007: 2-7). 이는, 당시의 지식층들이 서양적 주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주체가 상처입은 주체라는 점을 통찰하게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지식층 대열에 민중신학자들이 들어서있었다. 

나는 민중신학의 문제의식이 ‘민중’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즉 민중과 ‘주체’였으며, 이때 민중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배제된 사람을 가리키며 주체 또한 그러하다는 점을 환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민중신학에 대한 변호·변증 작업일 수 있는데, 나는 이 작업을 위하여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민중신학의 대화를 시도한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은, 민중신학의 주체이론을 민중신학 자신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면이 있다. 민중신학은 주체(역사의 주체)를 이야기하였다. 흔히 민중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민중으로 주장하고, 민중을 미화한 신학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프토코스 론(論)’이 아니라 ‘오클로스 론(論)’을 제시했으며, 오클로스에 보다 더 집중하는 신학이다. 프토코스(ptokos)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의 헬라어, 오클로스(ochlos)는 공식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무리(배제된 사람)라는 뜻의 헬라어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프토코이(ptokoi, 가난한 사람들)’가 아닌 ‘오클로이(ochloi, 배제된 사람들)’로 정의했다

민중신학과 한나 아렌트의 유사성 중 하나: 기존하는 학문의 전통에 작별을 고함

아렌트는 자신을 정치철학자가 아니라, 정치이론가로 불러달라고 주문하곤 하였다. 플라톤 이후 대부분의 정치철학자들이 선택한 ‘관조(contemplation)’에서 정치에 대한 일종의 적대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관조는 말과 행위의 영역(정치영역, 공적영역)으로부터 떠나 홀로 있을 때 가능한데, 그것이 ‘정치에 대한 의식적 거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박혁 2012; 42). 이 입장에 대하여 김선욱은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기존의 정치철학사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다(아렌트 2002: 역사서문). 민중신학 또한 서양신학(서양철학)을 관조와 사변에 집중하는 신학으로 비판하면서 그것에 작별을 고한다. 이를 위해 서남동은 “반신학(反神學)”이라는 용어를 끌어들이기까지 한다(서남동 1983: 305). 

두 작별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공개적 선포’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렌트의 작별선포는 스승 야스퍼스(K. Jaspers)에게 걱정을 안겼고(Arendt 1992: 642), 민중신학의 작별선포는 독일의 진보적 신학자들에게 걱정을 안겼다. 독일의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자들과 서신으로 신학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신학사상편집부 1990). 둘째, 인간의 행위가 주체됨을 이룩한다고 보는 지점이다. 아렌트는 주체를, 존재도 실체도 자아도 아닌 ‘행위’와 연결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사건 속에서 행위자들을 보고 들으며 행위자들을 민중으로 파악하였다.

아렌트에게 주체는, 행위의 ‘바탕에(sub-) 놓인(-ject) 것’ 즉 행위하는 인간이며, 행위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활동이다. 보고 듣는 사람(주시자/spectator, 아렌트의 용어)이 없는데 나 혼자 자족적인 주체란, 아렌트 정치이론체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아렌트는 존재(being)와 현상(appearance)의 이분법을 논리적 오류로 배격한다(Arendt 1978: 25). 요약컨대 민중신학의 경우 이분구도(주체-객체)에 대한 거부는 서양신학 전통에 대한 공개적 작별로 나타났다. 아렌트의 경우 이분구도(존재-현상)에 대한 거부는 서양철학 전통에 대한 공개적 작별로 나타났다. 두 공개적 작별은 이분구도 거부에 걸려있다. 

민중신학의 두 가지 문제의식: 민중 그리고 주체 

뜻밖에도 자주 간과되는 사실 중 하나는, 민중신학이 ‘프토코이(ptokoi, 가난한 사람들)’가 아닌 ‘오클로이(ochloi, 배제된 사람들)’를 ‘민중’으로 정의하였다(identify)는 사실이다. 배제된 사람들은 인위적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 경계는 고정적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이어서(안병무 1982: 103; 권진관 2012: 15), 배제의 요인과 범위는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빈자(the poor)를 기계적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아렌트도 가난한 사람들이 반드시 가난 때문이 아니라 멸시가 개입될 때 혁명하게 된다고 말했는데(Arendt 1965: 58-59), 민중신학도 경제요인 외 다른 요인들을 감안하고 있었다. 그중 중요하게 고려된 것으로 한(恨)을 들 수 있다. 

전태일과 노동법

한국민중신학회 정관 전문(前文)이 밝히고 있듯 학문적 연구성과가 아니라 하나의 민중사건(전태일의 분신행위)을 발생지점으로 삼은 민중신학은, 민중과 행위를 반복하여 연결하였다. 현영학에 의하면, 현존질서유지를 원하는 지배층에 대하여 “말대꾸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이 민중이다(현영학 1997: 102). 안병무는 갈릴리 민중을 언급할 때 “당대 예루살렘체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든 “예수의 공격”행위와 연결하였다(안병무 1990: 233).

황성규는 신약성서 예수이야기의 핵심내용을, 갈릴리 민중과 함께한 “지배세력에 대한 증오와 분노와 저항”행위로 요약하였다(황성규 1992: 25). 요컨대 민중신학이 지목한 민중은 다만 ‘가난한 자’라기보다는 ‘저항행위자’에 더 가깝다. 안병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부자 된다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새 질서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너희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안병무 2005: 102). 변혁을 위하여 저항하는 저항행위자가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 민중신학의 핵심적 주장이다.  

그러면 민중신학자들은 왜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였을까? 주체신학이라는 이름을 갖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는, 주체신학이라 할 경우 자칫 ‘가난’이라는 문제의식을 놓칠 수 있어서이다. 둘째는, subject의 서양적 기원에 거의 자동적으로 직결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순진한(naive) 독자성’일 수도 있고, ‘지나친 민감성’일 수도 있다. 신학의 명칭으로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을 채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주체’라는 문제의식이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부대효과를 불러왔다.    

주체를 추구하는 민중신학의 세 유형: 해방행위자 집중형, 구원행위자 집중형, 변혁행위자 집중형

본 연구자는 민중과 주체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을 행위의 면에서 균형있게 고려할 때 민중신학계를 셋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본 연구자 이전까지는 ‘세대별 분류’ 혹은 ‘주제별 분류’가 흔히 사용되어왔다. 본 연구자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리처드 니버(H. R. Niebuhr)가 사용한 유형론 방법을 가져온다. 그것은 “많은 요소를 여러 가문으로 나누어 각각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개개인을 관심사나 신념이 비슷한 비교적 구체적인 모델들에 비추어 이해하려” 하는 방법론이다(리처드 니버 2007: 48). 유형론을 적용하면 민중신학분야는 세 개의 ‘가문’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민중을 해방의 주체로 보며 민중의 해방행위에 집중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민중을 구원의 주체로 보며 민중의 구원행위에 집중하는 유형이다. 세 번째는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보며 민중의 변혁행위에 집중하는 유형이다. 다음 [민중신학의 사랑법] 연재분에서부터 그 세 가문들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다채롭고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것이다. 

* 이번 연재분은 2016년 6월 25일 한국사회이론학회 발표문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도움 받은 글> 

권진관(2012), 『민중신학에세이』(서울: 동연) 
김상봉(2002), 『나르시스의 꿈: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파주: 도서출판 한길사)
김익달 외(1963), 『철학대사전』(서울: 학원사) 
리처드 니버(2007), 홍병룡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박혁(2012), “정치이론과 방법: 한나 아렌트 정치이론의 방법적 토대에 관한 고찰,” 「21세기정치학회보」 제22집 3호(12월)
서남동(1983), “민담의 신학-反神學,”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신승엽(1991), “이식과 창조의 변증법: 임화의 ‘이식문학론’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여,” 「창작과비평」 제19집 3월호
신학사상편집부(1990), “연구자료: 민중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의 대화,” 「신학사상」 제69집 
안병무(1982), “예수와 오클로스,” NCC신학연구위원회 엮음, 『민중과 한국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안병무(1990), 『갈릴래아의 예수』(천안: 한국신학연구소)
안병무(2005), 『민중신학이야기(개정판)』(서울: 한국신학연구소)
이진경(2016), 『철학과 굴뚝청소부(개정증보판)』(서울: 그린비출판사)
한나 아렌트(2002), 김선욱 옮김, 『칸트 정치철학 강의』(서울: 푸른숲, 2002)
현영학(1997), 『예수의 탈춤: 한국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천안: 한국신학연구소)
황성규(1992), “‘이방인의 땅’ 갈릴리와 예수운동,” 안병무 박사 고희기념논문집 출판위원회 엮음, 『예수 민중 민족』(천안: 한국신학연구소) 
Hannah Arendt(1965), On Revolution (New York: Penguin Books)
Hannah Arendt(1978), The Life of the Mind (New York: Harcourt, Inc.)
Hannah Arendt(1992), Lotte Kohler and Hans Saner Ed.,  Robert and Rita Kimber Trans., Hannah Arendt Karl Jaspers Correspondence 1926-1969 (New York: Harcourt Brace)
Namhee Lee(2007), The Making of Minjung: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 (New York: The Cornell University Press) 
Paul Edwards(1967,1978),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8(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웹싸이트 Http://plato.stanford.edu/)

 

<필자 소개>

글쓴이 이인미는 2016년 2월 성공회대 신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Th.D).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에서 오래도록 활동해왔으며(간사 혹은 자원활동가로), 현재는 1953년 설립된 새가정사에서 제15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였고, 공교육·사교육·출판사·신문사·방송사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다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하여 비로소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언어), 사람의 행위, 말과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에 깊은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나 아렌트 정치이론과 신학이론의 대화를 계속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인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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