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승리는 상대의 파멸, 또는 선의 파멸이 아니라 상대를 또 다른 악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나는 ‘흡혈귀론’이라고 말합니다. 흡혈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단순히 누군가를 죽게 하지 않습니다. 흡혈귀는 자기에게 물린 자를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살 수 있는 상태, 즉 자신과 똑같은 하나의 악으로 만들고야 맙니다. 이렇게 악은 대물림되듯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니체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병은 전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 <내 마음을 만지다>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나는 아팠다. 아픔의 원인은 단순했다.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 때문이었다. 능력도 없지만 일도 잘 안 풀렸다. 생존의 기계 속에서 어느 부품으로 살아야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지 늘 고심했지만, 내게 오는 것은 아픔뿐이었다. 그리고 모아지는 시선은 경멸과 조소였다. 이 모든 것을 다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그렇게 아파하며 살았다.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삶의 본질 탐구, 철학적 사유, 근원에 대한 무한대의 호기심, 이것은 사실 현재의 생존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내 안에 들여놓은 것이다. 만일 배부른 돼지라면 나는 행복의 본질인 쾌감 횟수 늘리기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유희의 삶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되니 다방면으로 삶의 폭을 넓혔고, 거기서 글쓰기로 아픔을 덜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서 최근 의문이 들었다. 아픔의 원인이 경제활동이라면 악착같이 거기에 매달려 부를 축적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데 왜 못하는가? 이렇게 되면 다시 아파진다. 나의 글쓰기 컨셉이 괜찮아 차츰 확대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제자리이다. 그럼 글쓰기를 버리고 다른 걸로 돈을 벌면 되는 것 아닌가? 더 아파진다. 뭘 해서? 늘 고민이다.

비슷비슷한 상황이 오고 가는 날들 속에서 <내 마음을 만지다>가 눈에 들어왔다. 문학 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글쓰기로 치유를 한다는 책이다. 사실 나도 전에 이 부분을 눈여겨봤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혼자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학위를 받는 공부 말이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폭염 속에 머리도 푹푹 찐다. 위 책을 필사하면서 진짜 내 생각이 뭔지 더듬어봐야겠다.

다음은 이 책에서도 소개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다. 모든 게 아픈 것 같다. 나는 아픔을 느끼지만, 아픔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게 정상이지만, 이 아픔에 대한 성찰,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인지, 글쓰기를 하면서 두고 볼 일이다.
 
그날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돕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김서정 작가 1966년 강원도 장평에서 태어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2년 단편 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 소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어린이 인물 이야기 《신채호》, 《김구》, 《마의태자》 등을 썼고, 북한산 산행기로 산문집 《백수 산행기》, 먹거리와 몸을 성찰하는 에세이 《나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다이어트》, 평화 산문집 《분단국가 시민의 평화 배우기》, 글쓰기 강의인 《나를 표현하는 단숨에 글쓰기》를 지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출판 편집일과 글쓰기 그리고 글쓰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김서정 작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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