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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꺼이 ‘혼자’입니다.<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08.09 16:37

“인간은 역시 궁극적으로 고독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극복할 수 없는 고독, 풀어낼 수 없는 고독 즉 절대적 고독이 있다…. 나는 사선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지도 못하고, 내 대신 죽지도 못한다. 나의 부모, 내 아내, 내 자식들, 의사, 돈, 권력 그리고 전지 전능하신 신도 나에게 닥쳐오는 죽음, 나에게는 모든 것의 마지막, 절대적 적막, 어둠, 허무를 의미하는 나의 죽음으로부터 나를 도와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도 내 삶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나의 삶은 나 혼자 만이 살 수 있고, 나의 죽음은 나 혼자 만이 당해야 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박이문, 철학 에세이 ‘혼자됨과 고독’ 중

시작부터가 씁쓸하다. 인용한 박이문의 글을 보고 있자니, 입 속이 텁텁해진다. 고독에 대한 이야기가 참 그렇다. 내게는 사랑이나 행복보다는 보다 확실하고도 친밀한 것일진데,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과연 무겁다. 내가 쓴 글이 아님에도 저 글에서 기시감마저 느끼는 까닭은, 그의 말대로 궁극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인간이, 그리고 내가 고독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혼자다’라고 고백의 어조로 말하며 우울해 하거나 외로워했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드는 내용이겠지만, 이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기도 하다.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은 혼자고, 그러니 그 혼자라는 사실에 마음 에너지를 들입다 쏟아 붓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죽음 같은 거대한 의미들이 아니고서 라도, 내가 다달이 앓는 생리통이나, 더는 늘지 않는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 무섭기까지 한 학비에 대한 걱정들 역시도 오롯이 나의 것이며, 이러한 것을 나만큼 걱정하는 이도 나밖에 없으며, 내 대신 앓아주고 나의 문제를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이도 여전히 나 밖에는 없다. 나를 대신해 줄 이가 아무도 없어 고독하지만 인간의 본디가 그러한 것이라 하니 차라리 위로고 차라리 복음이다. 존재론적 복음이라 해둔다.

혼자, 그러니까 ‘혼자 됨’은 결과로서 나타나는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가 있고, 없고, 다가오고, 떠나가고의 과정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혼자 됨’은 본래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사람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혼자다. 그러나 인간만이 고독하다. 삶의 의미를 묻고, 자발적으로 생을 끊을 수 있는 존재, 오로지 인간만이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혼자 됨’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된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가고, 혼자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로서 고독은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보다 은밀하게 파고드는 아픔이다. 고독은 “혼자됨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나에 대한 타자들의 무관심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나는 울고, 저이는 웃는다. 나는 박박 기며 사는데, 저이는 두둑하게 산다. 나는 마음을 쏟지만, 저이는 업신여긴다. 본래적으로 혼자인 것은 존재론적 숙명이라지만, 내 ‘혼자 됨’의 상황에, 즉, 내 사회적 소외의 상황에, 내 축제의 상황에, 내 억울함의 상황에, 내 배고픈 상황에, 내 기쁨의 상황에 저이들의 무관심이 짙어질 때, 우리는 고독해진다. 고독은 우울감, 슬픔, 외로움 이라는 “정신적 고통”과 아픔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Julio Romero de Torres, Samaritana 1920 작가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해를 기존의 것과 달리하고 있다. 도전적인 눈빛과 양감 가득한 그녀의 몸에서 당참이 느껴진다. 예수에게 물음을 던지던 그 여성, 그 깊은 물음은 고독에서 온 것일지도.

그 아픔을 거슬러 보고자, 그 고통을 좀 나누어 보고자 많은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든다. 퀴어 페스티벌을 반대하던 젊은이들이 들고 왔던 피켓의 메시지, ‘행복한 가정’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네들의 말대로 남자 하나, 여자 하나가 만나 결혼하여 살면 정말 행복해 지는 것일까? 여러 문제-이성애, 모노가미, 결혼 제도, 행복 등- 가 어수선하게 영글어 있는 물음이지만, 그 어수선함을 털어낸 후 고쳐 묻자면, ‘사람이랑 사람이랑’이 만나서 결혼해 살게 되면,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라 둘이 살면 고독감 없이 살아 갈 수 있을까’ 정도겠다. 수필의 한 구절이 물음의 답을 대신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복잡하고 문제에 넘친 불행한 양인이 모였다고 해서 돌연 인간의 행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대답은 물론 부정 내지는 회의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류 사회에서 과연 ‘적당한 배필’을 찾았으며 신과 자기 앞에서 자기의 결혼을 축복해 마지않았을 것인가? 아니 그보다 소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을 자기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방해로 파악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아니 단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결혼에 의해 불행해 지지 않았을까?

-전혜린 <목마른 계절> 중
   

두 사람이 한 이불을 덮기 시작했다고 돌연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막 함께 살기로 한 연인들에게 행복이라는 의무감을 불어넣지만,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한 이불’은 웨딩드레스만큼이나 덧없다. 결국, 다시 고독이다. 결혼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결혼의 유의미함을 논하는 것 역시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세계에만 완전하게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완벽하게 ‘자기’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혼자 됨’에 계속적으로 놓여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괜찮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만남’ 속에 노출되어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타인에게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며, 타인들로 인해 제약되기도 구속되기도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나의 ‘혼자 됨’에 무관심한 타인을 필시 의식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타인을 즉, 외부세계를 의식하며 우리는 다시 고독하고, 다시 아프고, 다시 외롭다.   

고독의 씁쓸함, 그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 속에서 씨알이 빠진 “빈말” 가득한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에도 없는 동의를 하며, 하하 호호 웃는다. “말함과 들음”이 과연 그 속에 있는지 의문을 품지도 않은 채, 무리들 속에서 외로움을 달랜다. “빈말”은 존재자를 발견하는 것을 가로막는 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안다고 한들, 그것을 쉬 그만두지 못한다.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들 속에 자기를 묻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기심은 세계가 제공하는 다양한 볼거리들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결국 호기심이 추구하는 것은 세계를 관조하면서 여유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주치는 것을 끊임없이 교체함으로써 초조와 흥분을 맛보는 것이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중).” 그 초조와 흥분으로 생생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는데, 그 때야말로 ‘자기이해’의 끈을 사정없이 놓아 버리는 때이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1889 절대적 휴식을 갖고 싶어하던 고흐의 맘이 전해진다.

뿌리 깊지 않은 이야기에서 도망 나와야 할 때이다. 그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다른 세계로, 그러니까 “세계내면공간”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 팡세의 철학자를 믿어볼 때이다. 외부적 관심을 끊고, 자기 안으로 침잠하고, 또 침잠하여 내가 뿌리박고 있는 곳이 어딘지, 내 존재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찾고, 보고, 들어야 한다.

말했듯이, 우리는 ‘만남’과 ‘공동’ 속에 (안쓰럽게도) 내던져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세계내면공간”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됨’을 자처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고독 속으로 의연하게 걸어 들어 갈 시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다시 말해, 만날 천날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이니, 애를 써가며 고독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는 발견될 수 없다. 군중과 빈말과 호기심에서 벗어나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 숨겨져 있는 나를, 나의 존재를 나의 ‘있음’을 구원해 와야 한다. 그 구원은 하늘에 계신 그 님도 하실 수 없고, 공의와 사랑의 그 님도 하실 수 없다. 그것은 떠들썩한 기도원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고, 여름날의 뜨거운 수련회에서도 얻을 수 없다.

사랑을 서로에게 말하는 종교 공동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살 붙이고 사는 연인이나 배우자도 대신 해 줄 수 없다. 나의 발견과 내 존재의 구원은 ‘혼자 됨’과 그것에 따른 고독으로만 경험될 수 있다. 아픈 고독이 주는 은택이다. 그 은택 속에, 그러니까 그 외로운 고독 속에 머무를 때, 겟세마네에서 혼자 기도하던 그 젊은이의 고독을 이해하게 되고, 아들의 못 박힘을 마주하던 그 여인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 우리, 함께, 같이’의 가치는 뭉클하다. 여전히 내게도 그렇고, 그것은 엄마의 밥상처럼 언제고 그립다. 그런데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그곳에 접촉하는 순간 그 가치는 ‘나’를 좀먹곤 한다. 종교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나다. 나는 줄곧 나여야만 한다. 물론, 그 공동체를 통해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위로를 얻기도 하며, 함께 라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공동체’ 자체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와도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것이 고유의 ‘나’이며, 어떤 가치보다 큰 것이 ‘나’이다. 온전히 ‘나’로서 모일 때만이 그 공동체는 건강하다. 종교 혹은 공동체 혹은 군중에 의해 내가 저만치 휩쓸려 가려 할 때, 우리는 ‘혼자 됨’ 속으로 재빨리 돌아가야 한다. 존재의 소리를 강조하던 릴케의 시는 ‘혼자 됨’으로 돌아갈 것을 더욱 재촉한다.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충고를 해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십시오.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이 시는 자신의 시를 평가 받고자 하던 한 젊은 지망생을 향한 릴케의 단언이다. 릴케는 외부 세계의 평가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거두고, 자신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 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나의 소리’이다. 나의 소리를 듣는 것,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타인의 무관심을 기꺼이 의식하고, 기꺼이 아파하며 고독에로, ‘나’에로 침잠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즉 ‘혼자 됨’이어 ‘사람 됨’일 수 있다.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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