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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좀비서사 : <부산행>과 <이웃집 좀비>를 중심으로최병학의 <문화로 본 성서>
최병학 목사 | 승인 2016.08.16 14:09

1. 좀비 영화와 좀비의 실체 

좀비가 출몰하고 있다. 마니아층을 넘어 국내외 게임, 소설., 영화의 인기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공포영화나 문학의 하위 장르 주인공으로 여겨지던 좀비가 극장의 은막과 TV 채널, 서점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영화 <부산행>(2016)을 통해 이제 서울과 대전을 점령하고 부산을 향한다.

부산행

좀비 영화 장르를 처음 정립한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데뷔작이자 ‘시체 3부작’의 첫 영화 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 나오는 좀비들은 혐오감을 주는 외형과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부러져도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물어뜯어먹기 위해서 다가오는 것으로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비록 최근의 좀비처럼(2013년 작 <월드 워Z>와 <부산행>) 속도감은 없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이 흑백 영화의 좀비는 마냥 허구 속의 살아있는 시체가 아니었다. 미국은 외부적으로 소련과 냉전 중이었고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는 등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흑인 민권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전쟁 반대 시위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따라서 좀비들은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미국 사회를 습격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좀비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는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투영하고 비판하는 고도의 우화장치들을 보여줌으로 호러물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1)

로메로 감독의 두 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새벽>(1979)은 좀비 영화의 전설이다.2) 첫 번째 흑백 영화와는 달리 두 번째 영화에서는 총천연색과 환한 조명을 통하여 도심 한가운데 대형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은 흡사 백화점을 쇼핑하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 체제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읽을 수 있는 역작이다. 좀비를 통해 점점 더 난폭해지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공포스러운 속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3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낮>(1985)은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렬하고 복잡한 휴먼 드라마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캐리커처와 욕설, 살육만이 남았지만(가장 고어씬이 강한 작품), 좀비들을 학습시키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가령, ‘정중한 행동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사실 좀비는 주요 장기들을 다 제거했는데도(위가 없는데도) 먹을 것을 갈망한다. 따라서 문제는 뇌와 원초적인 본능인 것이다. 아무튼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가 잔혹한 취향의 공포 장르였다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와 <28일 후>(2002), <월드워 Z> 등 최근 좀비 영화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되는 바이러스 재앙 영화로 진화해 버렸다.3) 

살아있는 시체들의밤 / 시체들의 새벽 / 시체들의 낮

한국의 좀비 영화라면 2010년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이웃집 좀비>(오영두 감독 등)를 뺄 수 없다.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 전역에서 발생하자 좀비 색출을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정부와 ‘감염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서민들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부산행>처럼 좀비를 폭력의 대상으로, 마동석의 ‘슈퍼파워~ㄹ!’로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4)). 따라서 기존 헐리우드의 좀비처럼 무참히 찢겨지고,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이웃집 좀비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맘몬숭배 시대에 대형정당(새누리, 더민주), 대형마트, 대형교회, 대형기업(재벌)이라는 골리앗이 존재하는 이때 좀비는 허구의 괴물이 아닌 실체를 가진 작은정당, 구멍가게, 미자립교회, 중소기업의 이름으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호모 사케르’, ‘경계로 배제된 소수자’이며 ‘감각적인 것을 나눠받지 못한 치안의 대상’들이다.  

2. 자본주의 좀비서사 하나: 호모 사케르 

헤겔과 하이데거, 데리다로 부터 언어와 존재에 관해, 그리고 벤야민과 슈미트를 통해 역사와 법, 정치 신학을 수용하고, 아렌트와 푸코를 통해 전체주의와 생명정치를 사유한 조르지오 아감벤(G. Agamben)은 유기(遺棄)된 채로 존재를 드러내는 인간, 곧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이야기 한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의 성스런 인간(sacred man)이 아닌, 벌거벗겨진 생명(bare life)으로 살해는 가능해도 희생제로는 드릴 수 없는 것, 가령 소, 양과 달리 지렁이와 벌레 등을 뜻한다. 죽여버릴 수는 있어도 희생으로 쓸 수 없는 것.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G. Agamben)

물론 아감벤은 이 용어를 무젤만(Muselmann, 무슬림)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가령 용산에서 불에 타 죽은 존재들로부터 시작하여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된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세월호에 갇혀 죽어간 아이들, 지하철 역 안의 노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재래시장 상인들, 지체 장애우 등으로 확장된다.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들이며, 예수께서 친구로 부르며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생명의 동지들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칼 슈미트의 구분처럼)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zoē)-비오스(bios)5),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따라서 서양 정치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배제함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비를 배제하듯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은 대형 골리앗들(대형정당, 대형마트, 대형교회와 대형기업)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 그들에게 좀비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좀비가 노동자 계급출신으로 묘사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버린 노동자의 형상은 좀비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제의 전략은 호모 사케르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같은 좀비가 이러한 자본의 ‘배제의 전략’에 포섭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보라!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업주보다 더 탄압하는 시대의 참상을! 해고의 위험에 몸 사리는 노동자가 동료를 배신하는 것은 ‘나도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 강사를 전임 교수가, 집주인이 세사는 이들을, 담임목회자가 부교역자를 대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의 확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의 전략을 아감벤은 ‘포용의 위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가령 호모 사케르를 포용하면, 자신도 언제든지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기에, 그런 자신을 포용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되며, 나아가 호모 사케르가 될 것 같다는 공포감에서 해방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포용의 위력은 타자의 몸짓을 기대하게끔 이끄는 동시에 연대의 발생사적 연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기적은 이러한 포용의 위력에 기초한 ‘초자연적인 부가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확장되면 폭압적 정치권력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포용을 통한 자유로움은 자유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며 이를 위해 개체들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며 연대를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남을 지배하지도 않고, 혹은 남에게 지배 받지도 않는” 진정한 힘을 회복한 주체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벌거벗은 생명, 곧 조에의 권리 주장과 해방의 잠재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아감벤과 푸코는 ‘자유로운 공동체’와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유대인인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유대 전승에 따라 ‘메시야 요청’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주님의 재림(parousia)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종말신앙의 자세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자본주의 좀비서사 둘: 경계, 소수자 배제의 정치학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는 금기의 시작이다. 이러한 금기의 시작인 경계가 세계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중동의 콘크리트 장벽으로부터 미국-멕시코 국경의 죽음의 장벽에 이르기까지, 아니 각 나라 곳곳에도 생기고 있다. 도시 내 게토와 도시 외곽의 빈민촌까지, 뉴타운과 달동네 사이에, 수도 서울과 지방 사이에,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대형교회와 미자립 교회 사이에 이러한 경계는 확장되고 있다. 국경에서부터 우리 삶 곳곳으로! 사실 2009년 하반기의 화두였던 세종시 문제는 경계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경계는 삶의 터전으로서 경계, 삶의 질로서의 경계를 뜻한다. 이것을 확장하느냐, 그대로 두느냐의 문제인 것이었다. 

경계에 대한 사유 중 특이한 사상가인 에티엔 발리바르(E. Balibar)는 ‘해방과 변혁’이라는 근대 정치의 두 가지 틀에 동일성들과 경계들의 폭력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인륜’(civility)의 정치를 추가할 것을 주장한다. civility의 사전적 의미로는 ‘정중함, 공손함, 예의바름’이다. 원래 이 말은 라틴어 civilitas에서 나온 것으로 ‘사회 질서를 존중하는 공민(公民)에 걸맞은 행동 양식’이라는 뜻이다. 발리바르가 시민인륜을 중시하는 이유는 국가가 시민의 인권과 공민권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계를 극복할 시민의 도덕성이다. 사실 모든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반민주적 조건을 내장하고 있고,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경계들’을 갖게 된다. 가령, 국가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이지만, 국민이 아닌 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민주주의를 무효로 만드는 야누스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계들의 이러한 폭발적 증식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소멸이다. 어떤 이가 피부색을 이유로 검문당하고 강제송환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곳곳에서 아파르헤이트(Apartheid)에 견줄 만한 제도적 인종주의가 출현하고, 과거 민주주의의 상대적 성과들이 소실된다. 이른바 ‘내국인들’은 초과착취되는 이주자들의 상황에 스스로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권리의 현저한 후퇴를 감내하거나, 자신의 경제적 곤궁에 대한 불만을 이주자들에 대한 증오로 투사하는 극우 포퓰리즘에 휩쓸린다(영국의 브랙시트를 보라). 영화 <부산행>처럼 좀비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주인공 석우와 일행이 정상인 사람들의 열차 칸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경계의 문제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경계들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경계 내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민해 왔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경계들의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는 경계들을 단순히 철거하고 ‘세계 공동체의 단일한 시민권’으로 나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계를 제거할 때 더 많은 폭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거가 아니라 내부적 균열을 만드는 금을 긋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은 좀비들이 모여 있는 열차 칸에 내부적 균열을 만듦으로 경계를 해체한다(휴대폰 벨소리와 터널을 활용하는 것을 보라!). 

예수와 바울의 전도여행도 그러하다. 배타적 경계에 금을 그은 것이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유목민처럼 떠돌며 경계의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위해 힘썼다. 따라서 문제는 경계들을 형성하는 반민주적인 제도들을 변혁하고, 경계들의 내부와 외부가 민주적으로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다. 상이한 정치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거주하는 바로 그곳에서 더 이상 시민과 이방인으로 또한 ‘적’이 아닌,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서로-시민들’(co-citizens)로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서로-시민들은 교회공동체의 전도 전략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 초창기 유대교에 의해 소수자로 배제된 교회공동체가 자신의 외연을 넓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서로-시민의 정신, 곧 포용의 위력을 보여 경계를 해체한 것처럼!  

4. 자본주의 좀비서사 셋: 감각적인 것의 나눔

2008년 한국에도 방문한바 있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 Ranciere)는『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에서 미학과 정치를 주제로 삼고, 민주주의와 평등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 가령 ‘치안’(la police)과 ‘정치’(la politique)를 구분하며 치안은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는 것이다.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집단 사이의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치안이며 이것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이것은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이며 여기서 주체화란 ‘지배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배제된 자신들의 목소리와 존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이다. 곧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감성의 분할’(‘감성/le sensible’보다는 ‘감각적인 것’으로, ‘분할/le partage’보다는 ‘나눔/share’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불어의 원 뜻에 더 가깝다)이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분할되어 배제되는 것을 말한다. 수도 서울의 재개발로 인한 뉴타운(및 타워 팰리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측면이다. 그것은 뉴타운(및 타워 팰리스)에 입주하지 못한 이들을 비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대형들이 누리는 정치권력, 시장의 자유, 종교 권력에 ‘분할’, 곧 양질의 삶을 나눠 갖지 못하는, 말 그대로 감성의 분할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 의하면 미학과 정치는 이러한 비존재로의 배제를 뚫고 일어서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보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배제된 자들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감각적인 것인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을 배제당한 이들에게 다가가 새 세상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고, 생명의 떡을 맛보게 하며 사랑의 연대를 느끼게 해주었다. 예수의 정치, 곧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정치가 자본주의의 치안을 넘어 제국의 평화를 넘어 시작된 것이다. 영화 <부산행>은 안타깝게도 치안을 통해 감성의 분할이 철저히 통제된 디스토피아를 보여주었다.   

5. 사라지는 매개자

이웃집 좀비

영화 <이웃집 좀비>는 2010년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로 초토화된 서울을 그리고 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좀비 감염자를 찾아가 제거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감염될 위험도 무릅쓰고, 가족이었던 좀비들을 숨겨주고, 먹여주며, 오직 함께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모은다. 가령 두 번째 에피소드 인 ‘도망가자’에서는 좀비가 되어가는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을 보여주고 있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는 여자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다. 좀비가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차라리 그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고결한 사랑을 보여준다. “Love Conquers All” 

세 번째 에피소드인 ‘뼈를 깎는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좀비가 되자 신고하지 않고 집에 가두어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여(특히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을 보라) 어머니의 생명을 부지하는 딸의 사랑을 보여준다. 피를 먹어야 하는 좀비가 되었지만, 딸에게는 그 좀비는 어머니였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국 <이웃집 좀비>에서 인간들에게 좀비는 제거 대상이기 전에 사랑을 하고, 밥을 주고, 인정도 베풀어야 할 애인이며, 엄마이고, 이웃사촌이었다. 이웃집 좀비는 그렇게 탄생된다.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것이다. 

레닌과 헤겔을 부활시키고 싶은 슬라보에 지젝(S. Zizek)은『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 헤겔의 도움을 받아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을 현실 분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뜻하는데, 지젝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때의 자코뱅이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코뱅은 구체제(Ancien Regime)를 부수어 새 체제의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석우(공유 분)와 상화(마동석 분)가 그렇지 않은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주인공 벤을 죽임으로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었다면, <부산행>은 석우와 상화의 사라지는 매개 역할을 통해 모성과 순수성이라는 한국적 감성으로 이끌며 관객 천만을 (불행하게도) 돌파한다. 예수의 죽음 역시 그의 부활을 기리는 이들에게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성령의 등장을 이끄는 매개자였다. 대형들이 판치는 세상에 교회가, 교단 총회가, 교계의 어른들이, 소금이 짠맛을 음식에 남겨주고 사라지듯, 아니 상화가 그렇게 좀비가 되어가듯, 이웃집 좀비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각주 설명>

1) 가령,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리더십이 있는 데다 잘 생기까지 한 주인공 벤(드웨인 존스 분)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안도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민병대원들에게 사살된다. 그들은 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벤을 좀비로 간주하여 사살한다. 왜냐하면 벤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아이와 임산부를 살려줌으로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순수성과 모성으로 봉합한다, 
2)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4년 작 <새벽의 저주>는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며, 같은 해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도 이 작품의 오마주 영화이다. 
3) 반면 좀비 영화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를 담아낸 영화로 1993년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리빙 데드 3>가 있다. 공포와 멜로 장르를 결합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성 좀비와 인간 남성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고어 영화의 잔혹함에 슬픈 로맨스를 결합하였다. 잔혹하고 노골적인 고어 취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 대신 컬트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웜 바디스>(2012)가 있다. 
4) <부산행>이 재미있는 3가지 이유에 관해 김세윤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첫째 마동석, 둘째 기차, 셋째 우리가 부산행 KTX를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동석은 관객의 한 줄 평, “<부산행>은 좀비가 마동석을 피해 부산으로 도망가는 영화”라는 말처럼 ‘정의로운 근육’이었다. 
5) 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생명을 뜻한다. 곧 생체활동을 통해 발현되는 생명이며 비오스는 한 사회 내에서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위치 혹은 태도를 통해 발현되는 생명을 말한다. 사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생명은 비오스로서 생명이었다. 

필자소개

 

   
▲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목사인 최병학 목사는 경성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쿠바, 인도와 동학 관련 영화 프로젝트도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는『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 (인간사랑,2002)을 시작으로 최근 『신학과 예술의 만남: 테오-아르스』(인간사랑, 2016) 등 12권의 저서가 있다.

최병학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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