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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우울함, 고단함의 미학<소소한 남자의 소소한 독서>
정주현 (예사랑교회) | 승인 2016.09.12 11:02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작가 한강의 또 다른 글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로 접한 한강의 글은 소설집 「여수의 사랑」이다. 근래의 저작을 읽고 매력을 느낀 작가의 초기 작품을 읽는 것은 당연한 수순 중 하나 일 것이다. 

처음 읽은 「소년이 온다」와 두 번째로 읽은 「여수의 사랑」 사이의 간격은 근 20년의 시간차가 있다. 20년의 시간차는 분명 무언가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같은 사람이라도 40대 때의 글과 20대의 글이 다른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강은 좀 다른 것 같았다, 20대 중반의 작가 한강의 글은 전혀 20대 중반의 젊은 작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작가가 다루고 있는 우울함, 외로움, 고단함 들은 20대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의 인간이해가 깊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나를 사로잡은 매력이 그의 첫 저작부터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담담한 어조로 개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그렇다. 양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가듯 서사 속 인물들을 생생하게 독자의 앞으로 불러온다. 감정의 과잉이나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담하고 간결한 묘사로 생동감을 불러오는 작가의 글이 주는 매력은 등장인물들의 고단함과 외로움 그리고 우울함을 슬픈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가족의 죽음이나 고통에서 기인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인공들의 모습은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삶에 곤란함을 느끼는 부적응자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이 쓰인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내가 기억하는 90년대 중반은 꽤나 풍족하고 행복했던 시기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알게 된 9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는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기였다. 때문에 ‘그런 풍요의 시기에 한강은 왜 이런 우울한 이야기들을 썼던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여수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20년 전 20대의 한강은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표현처럼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 그의 글에선 90년대라는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일탈하는 젊음에 대한 이야기나 꺼져가던 이데올로기 논쟁과 거대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강이 표현한 이야기 속 세상은 전혀 90년대 답지 않고 오히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한 없이 지쳐있고, 헤매고 있으며, ‘희망’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주인공들에게 묻어나는 삶의 고단함과 피로는 나의 이야기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그런 이야기의 모음집인 「여수의 사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닫던 이야기는 「야간열차」(149-179쪽)이다. 주인공 “영현”의 독백들은 지나보낸 나의 20대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고, “영현”과 얽혀있는 친구 “동걸”은 내가 지인들에게서 보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동걸”은 아주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모두가 풍요로워 보이는 시기에 “동걸”의 삶은 어딘가 모르게 분주했고 그의 분주함은 풍요의 시대와는 이질적이다. 그의 모습에선 풍요나 여유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영현”만이 “동걸”의 분주함에 의문을 갖는다. 나중에 “영현” 우연히 목격한 “동걸”의 분주함, 고단함, 이질적인 모습의 근원을 알기 전까지 “동걸”은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존재한다. 친구지만 부쩍 어른처럼 느껴지는 “동걸”의 비밀은 쌍둥이 동생 “동주”였다. 동생의 말 못할 사연으로 고단한 삶을 짊어졌지만 동시에 시대의 풍요에 뒤처지지 않는 삶, 그 평범함을 유지하느라 세상과 일정한 선을 긋고 살아가는 “동걸”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한다고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살펴보면 그 경중은 다르지만 분명 타인에게 드러내지 못하는 삶의 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족의 이야기, 나의 실수가 불러온 엉킨 과거 또는 거대한 세상에 속수무책으로 짓눌려 버린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우리의 모습들은 “동걸”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평범함이란 범주의 오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스스로를 억지로 평범함에 밀어 넣으려고 애쓰느라 삶과 영혼을 잠식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동걸”을 통해 반문한다.

이에 반해 “영현”의 무기력함은 “동걸”의 분주함과는 분명히 다른 슬픔이다. “영현”은 무기력에 지친 영혼의 표상을 보여준다. “영현”의 독백을 보자.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 무기력하게 지쳐버린 그의 내면이 드러나는 이 독백은 내가 가장 공감한 이야기기도 하다. 풍족한 시대 또는 최소한 넉넉하진 않지만 딱히 모자람 없는 환경을 살아가는 이 20대 영혼의 모습에서 꿈이나 혈기왕성함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고백이 지난날 나의 고백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영현”에게서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영현”의 무기력의 근원이 결핍이나 반복된 실패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빈곤의 시대를 살아냈던 기성세대에겐 이해되지 않을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치스러운 이야기의 슬픔에서 묻어나는 외로움과 고단함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영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또는 이해하기 힘든 그 삶의 무게는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경험했다. 어쩌면 이 또한 풍요의 시대가 준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 안에 담긴 슬픔에 공감할 젊은 영혼은 지금 한국의 수많은 고시원과 쪽방에서 웅크리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야간열차」의 “영현”과 “동걸”은 다른 색깔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 슬픔의 이면에는 외로움, 고단함, 우울함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소설집 「여수의 사랑」의 속 다른 이야기의 인물들도 각자의 슬픔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20년 전 20대의 한강이 파헤친 무기력함, 분주함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고단함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요의 시대 속 이질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헬조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극현실주의로 다가올 것이다. 

서두에 품었던 궁금증을 다시 생각해본다. ‘한강은 풍요의 시대에서 왜 이리도 우울한 이야기들을 했을까?’. ‘그는 왜 당시 동년배 작가들이 시도했던 재기발랄함이 아닌 ‘희망’이 상실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해 본다. ’풍요의 시대였지만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또는 ’우리가 누리던 풍요가 사상누각 위에서 누리는 아주 잠깐의 꿈임을 직감했을까?‘ 답을 내리기 어렵지만 아마도 작가는 풍요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풍요롭지 못한 우리 영혼의 민낯을 가렸던 시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년 전에 쓰였지만 오히려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여수의 사랑」, 「질주」,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진달래 능선」, 「붉은 닻」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고되고, 무기력하고,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의 신세한탄에 빠져서 우리 또한 우울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한강의 서사는 주인공들의 슬픔을 통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감정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년 전엔 이질적이었을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를 위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사치가 되어가고, 슬픔에 무감각해 져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슬픔 이야기하는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우리와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글이다. 한강의 글을 통해 위로를 얻는 사람들이 있길 바란다. 

*각주 설명 1)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2016). 194쪽.

<필자 소개>

 

정주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예사랑교회 청소년부 전도사

아쉽게도 평범한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졌지만, 제 능력 이상의 성취를 원하는 욕심이 있다. 게다가 어렴풋이 느끼는 이상향, 옳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갈증 때문에 더듬거리며 갈 길을 찾으며 살고 있다. 그런 탓에 배움의 성취도 더디고, 삶의 여정도 매끈하지 않다. 그러나 다행이도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 않아서 소박한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 지면은 카페에서 지인들과 읽은 책에 대해 수다 떠는 느낌으로 채우고자 한다.

정주현 (예사랑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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