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통일 칼럼 연재
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7)<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9.19 10:33

함석헌과 장준하 다시 만나다

장준하의 수고가 있어 미 국무성 초청으로 고국을 떠날 때의 함석헌은 미국 구라파, 아프리카, 중동을 거쳐 못내 그리워하던 인도까지를 돌아보고 65년 초 쯤 귀국하리라는 계획으로 출국했던 것인데 국내의 상황이 여의치를 않았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의 군인정치의 연장이 획책되고 있어서였다. 

함석헌으로서는 참으로 어렵게 얻어가진 세계여행의 기회였지만 도저히 국내소식이 해외여행이나 체류를 계속할 수 없게 했다. 박정희 세력이 말하는 민정(民政)이란 결코 민정이 아니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박정희의 민정이양(民政移讓)이란 역사의 절대 요구 앞에 마지못해 ‘인체’하는 거짓이었다. 박정희의 민정이양? 그것이야말로 양두구육(羊頭狗肉)이었다. 

함석헌은 아주 정확하게 박정희의 음습하기 그지없는 내심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죽기로 각오하고 칼 뽑아들고 나선 놈이 그냥 물러갈 턱이 없지. 그래서 지, 지난달 「사상계」 4월호에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에서 민정으로 가는 길은 오직하나,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거’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지난해 2월 출국, 6월에 돌아왔으니 해외여행 전(全)기간 1년 5개월, 출국할 때 계획했던 3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기간이었다. 함석헌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우선 만나고 싶은 이가 장준하였다. 장준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특히 지난 가을에 있었던 장준하의 「막 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 수상도 축하해주고 싶었다. 6월 23일 귀국한 함석헌은 바로 다음날 장준하와 더 할 수 없다 하리만큼의 기쁨의 상면을 한다. 

여행의 여정을 다 끝내지 못하고 귀국했다지만 함석헌에게 장준하는 실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누군가 함석헌의 몸가짐을 일러, ‘꿔다놓은 보릿자루’라 한 사람이 있었다. 간데없는 ‘맨사람’(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필자 주)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함석헌이 장준하가 있어 1년 반여의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같은 사담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실로 엄혹하기 그지없는 나라 안의 사정 때문이었다.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 민정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곧 그 두 사람 함석헌과 장준하에게 천부(天賦)과제로 주어져 있는 터라…. 그런데도 함석헌이 기어이 지난해 가을에 있었던 장준하의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 수상」을 화제로 꺼내놓았다. 

“참 그 소식을 듣고 기뻤었소. 그 이야기나 좀 들어 봅시다”

함석헌이 미 국무성의 초청기간 3개월 여행을 마치고, 미국 퀘이커 교도들의 수련자인 펜들힐(Pendle Hill)에 머물던 9월 초의 어느 날 한국으로부터 온 등기우편 한 통을 받게된다. 한국의 열심 있는 그의 한 제자로부터 보내온 것인데, 누런 서류봉투에 두툼한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그 내용 모두가 한결 같이 장준하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소식을 전하는 국내신문의 스크랩이었었다. 수 십 쪽의 기사들이었다. 한 쪽 빠짐없이 읽어냈기 때문에 장준하와 마주앉은 함석헌은 그 수상내용, 보도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상계」의 장준하와 「라몬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장준하

라몬 막사이사이 상은 막사이사이 대통령(1953~1957)을 추모·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막사이사이는 1907년 필리핀 중서부의 삼발레스(잠발스)주 출신으로 1931년 필리핀大, 1933년 호세리살칼리지를 졸업하고, 제2차 대전 중에는 항일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했다. 퀴리노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되었지만, 1953년 기득권층의 독점·독제체제를 거부하고 집권당을 탈당하여 야권연합(내셔널리스타탕)의 대통령후보로 출마, 퀴리노를 누르고 승리, 1953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전형적인 민주적 지도자였다. 

경호원 없이 수도 마닐라의 거리를 지나는 것을 시민들이 흔히 볼 수 있었고, 거리에서 대통령 막사이사이를 발견하는 시민들은 자기 길 갈 생각을 접고 막사이사이와 떼를 이뤄 걷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을 만큼의 민중정치가였다. 그의 최후는 비행기사고의 변사였는데, 57년 3월 17일, 재선운동을 하던 중이었다는 설도 있고, 게릴라 분쟁지역으로 직접 협상 차 비행하던 중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되었는데 개표를 해보니 개표 수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많아, 당시의 신문들은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도 막사이사에게 투표했단 말인가?”했다. 엄청난 사전투표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막사이사이가 당선되었다는 것은 필리핀 유권자들이 얼마나 막사이사이를 열렬히 지원했는가를 증언해준다. 

「라몬 막사이사이 상」이란 바로 이 사람 막사이사이를 추모기념하기위해 만든 상이다. 라몬 막사이사이상은 처음 록펠러제단에서 제공한 50만 달러의 기금으로 설립되었는데, 매년 1회씩 종교·국가·인종·계급 등의 차별 없이 아시아, 아시아인을 위하여 사회지도·정부봉사·공공봉사·국제이해·언론문화에 공헌한 사람, 혹은 기구에 수여하는 것으로, 이 5개 부문 중의 1962년 「언론·문화부문상」이 한국인 장준하에게 수여된 것이다. 

장준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수상 했다. 

“선생님, 그건 정말 ‘하늘이 보낸 원군’이었습니다”

좀처럼 개인사(個人史)를 누구에게 말하지 않는 장준하였지만 그가 받은 그 상(?)을 ‘하늘이 보낸 원군’이라고까지 표현하게 한 사정은 이런 것이었다. 1961년 7월호 사상계에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실려나간 직후부터 사상계는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압박을 받게 된다. 「사상계」는 탄생 시부터 외부로부터 그치지 않는 위협 속에 지내왔지만 대체적으로 그 위협이란 사상계에 발표되는 원고내용들 때문이었다. ‘이런 글 내지 말라’, ‘이런 글 좀 실어 달라’는.

때로는 ‘대통령’ 운운하며 절반은 강요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위협은 거기까지였다. 묶이는 것, 끌려가는 것, 옥에 갇히는 것은 사상계의 장준하, 장준하의 사상계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옳지 않은 것들은 어떤 경우도 옳지 않은 것, 그것이 장준하의 삶의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상계의 문을 닫는 게 옳지…”하는 말을 사상계사의 오래된 사원들은 다 한 두 번씩 들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함석헌의 글이 나간 후의 당국의 탄압은 그 유(類)가 달랐다. 우선은 장준하를 마치 아주 치사한 잡범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유당말기 「사상계」를 주지(主誌)로 하면서, 세계의 지성과 정보를 도입, 한국을 세계 도상에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결론 하에 미국의 유수한 주간지인 「타임」(Time)과 「라이프」(Life)지를 책임 있게 수입하여 보급하고 있었다. 

처음엔 1, 2천부 정도의 소량이었지만 「사상계」 독자들을 비롯한 두꺼운 지식층·학생층들의 성원으로 60년, 61년을 거치면서 「타임」지는 7, 8천, 「라이프」는 5, 6천부로 실로 놀랄 만큼의 수량을 수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장준하에게 형언할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  처음엔 이 두 외지의 거래가 사상계 운영에 큰 기여를 하는 듯 했고 장준하도 꽤 재미를 보아갔다. 그러나 일이 계획대로만 되어가지는 않았다. 이 「타임」과 「라이프」를 사상계의 자매지로 우선은 「사상계」 독자들에게 세계의 소식을 깊고 널리 알려 세계도상에 나아가 설 수 있게 하자는 오직 하나의 이상과 계획으로 시작했던 것인데, 이 같은 계획이 성공할 수 있겠다 할 무렵 자유당정권이 무너지고 과정(過政, 허정의과도정부)이 들어서면서 바뀐 정부의 달러정책이 장준하에게 그야말로 폭풍으로 불어 닥친 것이다. 소위 ‘환율현실화정책’이라는 것으로 어제까지(자유당말기) 600:1의 환율이 1,100:1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송금을 못한 지대(誌代)는 그 배를 충당해야 송금을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매월 수 십 만, 수 백 만원 씩 늘어가는 빚은 한 푼도 예외 없이 장준하의 빚으로 안겨졌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장준하의 빚은 과정이 끝나고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을 때 무려 3000만원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때 민주당엔 자타가 공인하는 재정교사로 「사상계」 동인인 재무장관 김영선이 있었다. 그렇듯 ‘못한다’고 뿌리치는 장준하를 ‘정권의 승부를 건 사업’이라며 「국토건설운동」을 맡아달라면서, 3000만원의 빚이 있다는 장준하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빚을 갚아주겠다던 그 김영선이다. 김영선은 실제로 우선 준비된 거라며 1000만원의 수표를 건네주었다. 

「사상계」 1961년 7월호!

이제는 600:1의 환율이 1100:1로의 환율변동사건보다 더 지독한 사건이 닥쳤다. 그것은 절대로 역사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대반역사건 이었다. 그 ‘5.16’이라는 군사반란 말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를 만들고 말 그대로 생사의 대권(生死大權)을 틀어쥐었다. 

장준하를 그냥 둘 수는 도저히 없었다. 부정축제환수관리위로 장준하를 불러들이게 했다. 국고를 도둑질한 파렴치범으로서였다. 첫 말이 반말이었다. 그리고 기가 막힐 정도의 쌍소리였다.

“이 도둑놈들, 이것들 모두 다 죽여 버려야 돼…”

장준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연말까지 1000만원을 전액 변재하기로 서명하고 조사실을 나왔다. 그는 이후 박정희의 통치하에서 네 차례에 걸친 가산차압을 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 사건이 함석헌이 박정희를 향해 내 댄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나가면서 부터였다.

장준하는 후에 자신의 ‘생명의 둥지’ 같은 「사상계」를 잃은 몇 해 후, 그의 형이자 선배요, 스승인 함석헌이 발행하는 「씨알의 소리」 의 <편집위원장>으로 그 「씨알의 소리」에 출근하게 됐는데, 그 첫해(1972) 「씨알의 소리」에 출근하게 되면서 “「思想界」의 수난史”를 연재 하게 되는데, 그 첫 회(1972, 1, p39)에 「사상계」가 숨지기 시작한 때의 그 기막힌 아픔, 설움을 이렇게 토설하고 있다. 

“6.25 이후 피난항도 부산에서 이 나라 백성이 살 길을 잃고 갈 바를 몰라 헤맬 때 감히 그 길잡이로서의 기치를 둔 이래 만천하 애독자들의 절대지지와 성원으로 천하가 공지하는 자유당치하 학정의 탄압도, 민주당 치하의 혼란과 경제 공황도 무난히 뚫고, 오히려 청정히 이 나라 잡지사상 최장지령, 최고부수를 지속하여 오던 「사상계」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 흔적마저 없어져 버리게 된 그 원인의 시발이 바로 이 7월호부터”였다고. 

그런데 그 사상계가 박정희의 군인정치 아래서 이미 수년전 숨지려하던 때, 그래도 아니 죽고 일어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그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라몬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이었다는 것이다. 

장준하 자신이 “하늘이 보낸 원군”이었다는 그 상 말이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