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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연구소] 예레미야의 현피: 예언의 진실 게임(예레미야 29:1,4-7)<말씀의 잔치>
김창주 목사(한신대 신학과 교수) | 승인 2016.10.06 14:11

1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냈는데
2그 때는 여고니야 왕과 왕후와 궁중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능공과 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3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로 말하되)
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본문 해설

예레미야 29장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에게 보낸 편지다. 앞의 27장에는 느부갓네살을 ‘종’으로 부르며 유다를 그에게 넘겨주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있고, 28장에는 거짓 예언자 하나냐가 나타나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겠다면서 귀환의 꿈을 갖게 한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적국의 땅에서 집을 짓고 정착하라고 선포하자 백성들의 충격과 혼동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속히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던 유다 백성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두 예언자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적 양심이 예민하게 고조된다. 예레미야는 거짓 예언자를 극복하면서 백성들을 설득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단호한 어조에는 현실을 부정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점쟁이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청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즉 성전에서 희생제의 통해 예배하던 예루살렘과 달리 디아스포라에서도 야웨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을 전하고 있다.

바벨론에 정착하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래저래 이스라엘에게는 불편한 메시지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냐가 희망 섞인 말씀을 전할 때 예레미야는 그와 반대로 현실을 수용하라고 당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로잡혀 간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기도하라니?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4절)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이고 바벨론은 반대로 ‘혼란스런 공간’을 가리킨다(창 11:9).

예언자는 당시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 바벨론에 굴복하고 순응하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당장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귀환을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디아스포라에서 집을 짓고, 결혼하며, 바벨론의 평안을 기도하라고 충고한다.하지만 강경론자 하나냐는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 년 안에 꺾겠다며 호기를 부리고(28:10),

거짓 예언자 스마야는 자신을 제사장으로 세워 예레미야의 목에 쇠고랑을 차게 하였다고 큰소리치는(29:31)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예레미야는 다수의 목소리와 상반된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으니 유다 백성들은 혼란 가운데 평화의 도성을 그리워하면서도 듣기 좋은 예언이라고 섣불리 동조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한편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족속이 소개된다. 예언자는 레갑 사람의 집에 들러 그들이 포도주를 금하고, 집을 짓지 않으며, 파종하지 않고,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으며, 장막에 거하는 모습을 보며(렘 35:7) 조상의 교훈에 순종적인 레갑족을 본받으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레갑 족속이 선조 요나답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데 비하면 유다는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불순종한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예레미야의 어조는 이중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레갑 족속의 순종을 보고 배우라고 다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착하지 않는 레갑족과 달리 포로로 잡혀온 디아스포라에 뿌리를 내리고 살라고 충고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유다의 평안을 구하라고 선포한다.

예레미야의 파격 

거짓 예언자 하나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고 예루살렘을 곧 회복시키겠다며 유다 백성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렘 28:1-5). 예레미야의 청중들 또한 곧 예루살렘에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대로 이뤄질 것을 간절히 소원하면서도(렘 28:6) 그와는 정반대 메시지를 선포한다.

즉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 야웨께 기도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예언자의 선포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근원적이며(radical) 파격적(exceptional)이다. 하나는 하루 속히 바벨론을 벗어나야한다는 목표에 있지 않고 현지에 정착하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성전과제의 중심의 신앙에서 디아스포라의 삶과 공동체 중심의 종교로 재편하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의 파격적인 선언이 유다의 반란이나 저항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유다의 삶과 신앙은 성전의 희생제사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니 바벨론에서 하루는 예루살렘의 일 년보다 길고 힘들었고 그만큼 간절하게 귀환을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도 예언자는 예루살렘 귀환이 아니라 성전과 사제 위주의 신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을 제시하며 디아스포라에 정착하라고 충고한다.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포로는 유다의 수감생활이 아니라 불편한 자유와 충분하지 못한 신앙을 누리면서 새로운 믿음을 조성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3 동사로 요약할 수 있고, 그 과정은 다음의 3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세 동사

① 지으라(5절)
5절의 맨 앞에 언급된 ‘지으라’(짓고)는 명령은 ‘거주하라’(살며), ‘심으라’(만들며), ‘먹으라,’ 6절의 ‘취하라’(맞이하여x3), ‘낳으라’(낳으며x2), ‘번성하라’(번성하고), ‘줄지 말라’(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동사를 대표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는 현지에서 터전을 마련하고 정착하여 살기 위한 처음 행위로서 그곳에 집을 ‘지으라’고 운을 뗀 것이다. 자신의 거처를 짓는다면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연쇄적인 행위다. 마지막 귀결은 자손의 번성이다. ‘번성하라’는 명령은 창조 이래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덕목으로 유배의 기간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② 힘쓰라( 7절)
두 번째 동사는 훨씬 적극적인 행위와 근본적인 노력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제시한 일련의 동사가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백성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 요건을 제시한다면 ‘힘쓰라’(구하고)로 이어지는 내용과 행위는 적국 바벨론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평안을 구하라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신앙 전통으로 볼 때 좀처럼 내키지 않는 일이며 쉽게 수긍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그 성읍’의 평안을 애써 간구할 것을 당부한다. 그것은 단순한 권유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실행해야할 엄중한 명령으로 선언한다.

③ 기도하라(7절)
세 번째 요구 사항은 정신적 신앙적 측면이다. 즉 적국의 성읍을 위하여 야웨께 기도하라는 것은 마음에서 울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임무다. 더구나 ‘기도’에 해당하는 동사는 본래 팔랄(llP)에서 비롯되어 ‘기도하다/ 중재하다’를 뜻하지만 아람어 뿌리는 ‘자신의 살갗을 베어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다. 그러니 기도하라는 요구는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는 행위다. 디아스포라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평안을 비는 기도는 마치 자신의 신체를 도려내는 고통과 신앙적 고민이 수반되는 행위다. 그 만큼 예레미야의 예언은 당시 포로민들이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파격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세 단계

예언자의 메시지는 일회성으로 소멸되는 말씀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는 영구적인 가치를 함축한다.

① 짓고, 힘쓰고, 기도하라
위 세 가지는 이스라엘 종교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설파되고 그로인하여 지속케 하는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은 단순한 명령 이상이었다.
즉 하나냐의 거짓 예언과 달리 포로 기간이 오래 지속될 것이니 현지에 정주하여 살면서 바벨론의 평강과 백성들의 평안을 힘써 간구하라는 것이다.

②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
예나 지금이나 거짓 예언자들의 말은 달콤하여 속아 넘어가기 쉽다. 금방 실현될 것 같은 말에 현혹되어 사특한 사상에 물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반대 목소리를 내는 데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③ 유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라
디아스포라에서 견딜 수 있는 인내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고 그들의 망상을 증발시킬 수 있는 믿음의 역량을 키워라. 예레미야는 현명하게 미래와 희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암시적이며 포괄적으로 선포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절).

예레미야의 ‘현피’

최근에 ‘현피’라는 낯선 용어가 가끔 오르내린다. 즉 현실(現實)의 ‘현’자와 인터넷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죽인다’(Player Killing)는 영어의 ‘P’를 차용하여 만든 최신 용어이다. 온라인 게임 중 말다툼을 벌이다 상대를 실세계에서 직접 대면하여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일부에서는 익명을 악용하여 부추기는 경향도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오늘날 ‘현피’와 매우 유사하다.

당시 예언자의 현실은 이렇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잡혀간 디아스포라에서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유혹에 기웃거린다. 반대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복귀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함으로 바벨론 현지에서 적응하여 생활을 하되 디아스포라의 평안을 힘써 구하며 야웨께 간구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니 예언자와 반대 의사를 밝힌 거짓예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게임의 대상인 예레미야를 ‘현피’하려고 한것은 당연한 결과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였고(렘 26:8), 또 다른 예언자 ‘우리야’는 이집트로 도망하였다가 잡혀와 살해되기도 했다(26:23). 거짓 예언자들과 예레미야의 대결은 ‘예언’이라는 일종의 가상공간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그의 생명이 위태롭기도 하다. 비단 ‘현피’가 현대 사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주의: 요즈음 ‘현피’는 가상세계의 상대나 캐릭터를 물리치거나 죽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잔인해지고 폭력성이 두드러진다. 그런대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기보다는 일종의 게임의 연속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창주 목사(한신대 신학과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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