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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6년 10월 9일 성령강림절 후 21번째 주일 누가복음 17장 11-19<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6.10.06 15:01

신학적 관점

“주되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할지어다.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영원하신 하나님,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고 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참으로 바른 일이다.”1)

누가의 열 명의 한센인에 관한 설명을 다시 읽을 때, 우리는 장로교회 (다른 교단 대부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겠지만) 예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성만찬 기도로 이끌려진다. 이 기도는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 깊이 묵상하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거나, 그 내용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나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도록 기도할 때,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 이 대감사의 대기도(Great Thanksgiving)는 축제적이거나 근엄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거룩한 주일 아침 예배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부분, 즉 세속적이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모든 삶을 규정하기 위해 드려진 기도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진정 옳고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고 여기며 기도하고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신한다.

결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질문86)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우리의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나 오늘과 같이 사람들이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의무로 여길 뿐 아니라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겠는가? 누가 자신의 삶에서 가치 있고 좋은 것들, 더 나아가 삶 자체가 다른 사람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자신이 스스로 만든 인생이 아니고 그 반대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겠는가? 누가 감사하는 삶 (eucharistic life = a life of thanksgiving)이 개인과 공동체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이유이고 근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였고, 선민에 끼지 못했고, 이단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거룩한 삶과 태도의 모범으로 소개된다. 그는 하나님을 붙잡는 믿음을, 하나님이 그에게 해 주신 일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 믿음을, 그리고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공적으로 돌려 드린 믿음을 보여주었다. 감사가 예수의 치유 조건은 아니다. 모든 한센인은 제사장들 앞에 나아가 그들 자신을 보여줄 때 그들 자신이 치유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방향을 바꾸고,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사역을 보고 믿는 자의 반응을 “방향을 바꾸다”(turning around)로 표현할 때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에 의해 시작된 한 인간 전존재의 움직임, 즉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언급한 예수의 말씀은 사마리아인이 경험한 의학적인 치유만이 아니라 인간 전존재의 치유를 의미한다. 

치유와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누가의 이야기를 몇몇 주석가가 제안하듯이 치유의 이야기와 구원의 이야기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원과 치유가 밀접하게 연관된 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 두 용어는 인간을 온전하고, 건강하고, 평안하게 하고,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를 표현하는 말이다. 누가는 사마리아인의 치유가 심각한 질병으로부터의 의학적인 치유 그리고 그의 사회적 지위 회복뿐 아니라 그의 삶과 믿음의 방향전환(redirection)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린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형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16절의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헬라어로 eucharistō이다.)

감사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나의 완전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 사마리아인은 의무감에 젖어 감사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그의 믿음과 경험 때문에, 그의 주인인 예수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사는 치유와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의 결과이다. 이 순간에 그 사마리아인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coram Deo)” 서게 된다. 이 순간 그는 치유자요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전존재를 통해 이해한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의 실현이 그의 태도를 한탄에서 감사로 바꾼 것이다. 그의 반응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 즉 사람의 제일 된 목적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과도 같았다. 최근 George Stroup는 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감사와 찬양인데, 그것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달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광스런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반응은 경배와 찬양일 수밖에 없다.”2)

우리의 과제는 <감사라는 인간의 반응은 적절할 뿐 아니라 가장 기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한 성만찬의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더욱 그러하다. 감사의 대기도는 우리로 성례전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열 명의 한센인의 치유에 관한 누가의 이야기는 감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성례전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심하게 만든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거룩과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3)
 
Margit Ernst-Habib, Reformed theologian, Ubstadtweiber, Germany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쳤는데 그 중에 한 명만 돌아와 감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일어났다. 누가복음에서 이 예루살렘으로 여행은 9:51에서 시작되어 19:27까지 이어지는데, 아주 정교한 이야기 구조로 되어있다. 누가는 이 여행 중에 다른 복음서가 말하지 않은 수많은 비유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고(예, 선한사마리아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이야기, 탕자의 비유 등), 마태와 마가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자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예, 서기관의 질문, 주기도문, 요나의 표적, 하늘의 보화 등). 누가가 이 본문에서 말하려는 주제는 제자도이다. 

- 본문 첫째 부분(11-14절)은 대부분의 치유 이야기의 구조와 같다. 병자가 예수께 그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고쳐주고 그들을 보내며 어떤 종류의 충고를 한다. 이 이야기와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예는 막1:40-45(마8:1-4, 눅5:12-16)인데, 여기서는 단 한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와 발 앞에 엎드려 고쳐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만지고 말하기를 “깨끗하게 되라”고 했고 금방 나병이 나았다. 그러자 예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린다. 아무에게도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규정한 대로(레13:9-17;14:1-32) 정결례를 드리라고 했다. 오늘의 이야기도 이것과 대단히 비슷하고, 용어도 누가의 것이 분명하기에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15-19절의 이야기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누가의 창작으로 본다. 다른 학자들은 그것은 누가가 그의 특별한 자료(누가가 의존하는 비유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문서나 세심하게 보존된 구전 전통)에서 발견한 이야기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야기의 구성에 대해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 간에, 이야기는 분명히 누가의 관심 특별히 11절과 15-19절의 관심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 11절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라는 말을 제외하면 동네 자체는 어딘지 잘 알 수 없다. 주변적 위치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이 사마리아사람(16절)과 이방 사람(18절)이란 묘사가 장소 설정에 충분하다. 사마리아는 왕상12장에서 다윗왕국에서 분리되고, 왕상16장에서 오마리왕의 북왕국 수도가 되면서 부터 이방 땅이 되었다. 앗시리아제국이 주전 721년에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몰아내고 다른 지역의 점령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느헤미야4장에는 사마리아사람들과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성을 세우려는 유대인 사이에 대립과 긴장을 보여준다. 나중에, 헬라제국의 지배 기간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전 지역에 일어난 끊임없는 여러 가지 갈등에 있어 다른 입장을 취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사마리아를 선교의 첫 번째 대상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데(행1:8), 눅17:11-19과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에서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 돌아온 나병환자가 사마리아인이요 이방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누가는 예수의 메시지가 문자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유대국경을 넘어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것은 누가의 주요한 주제인데, 그것은 첨가자료에서나(2:32;4:16-30;7:1-9) 제외한 자료(12제자를 보낸 본문의 마태버전9:35-10:6에서 예수가 이방인과 사마리아에로 가는 것에 대한 제한한 것 cf. 눅9:1-5;10:1-12), 그리고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막7:24-30;마15:21-28)에서 발전된 주제이다. 이방인 선교는 물론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데, 특히 10-15장의 핵심 이야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 예수께 만난 열 명의 나병환자는 “멀찍이 멈추어 서서”(12절) 말했다. 유대성경(구약)과 신약에서, 나병이란 것은 피부병群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구약의 제사문서, 특히 레위기 13-14장에서 다양한 피부병에 대해 말하며 치료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는데, 의학적이라기 보다는 예전적 차원이다.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렸다고 확인되면, 반드시 격리되어야 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사가 아니라)이 병이 치료되었다고 확인해 주고 규정된 제사가 행해지고 난 이후이다. 피부병의 예식적 중요성은 왜 여러 가지 용어들이 그것의 치유라는 것에 사용되는 가를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오늘 이야기에서도 “몸이 깨끗해 졌다”(14,17), “병이 나았다”(15), “낫게 했다made well”(19)라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 마지막 문장이 이야기의 긴장을 가져온다. 19절에서 예수가 나병환자였던 사람에게 한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NRSV는 “너의 믿음이 낫게 했다”로 되어 있지만 “너의 믿음이 구원했다”(새번역)로 해석할 수 있다. 두 가지 번역 다 가능하지만, 두 번째 것은 신학적 함축을 가진다. 누가는 돌아 온 나병환자에게 낫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가? 다른 아홉은 “낫기만”하고 돌아온 그만 구원받았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병한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깨끗해진다(14). 그러기에 돌아온 나병환자는 그가 치유 받았기에 그랬던 것이지 받을 것이기에 한 것은 아니다(15). 그는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특히 누가의 눈으로 보기에는 작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감사하고/축복하고/영광돌리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들의 목자(2:20)에서부터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시몬과 안나(2:28,38), 예수의 기적의 증언자들(5:25;7:16;18:43 등), 십자가 아래의 백부장(23:47),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성장을 지켜 본 유대인과 이방인들(4:21;11:18;13:48 등)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주제이다. 그러기에 누가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나병환자를 다른 나병환자와 구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은혜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Oliver Larry Yarbrough, Tillinghast Professor of Religion, Middlebury College, Middlebury,  Vermont

목회적 관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구절은 유익한 만큼 해로운 말씀이다. 이번 주일에 강단에 올라가면, 회중은 복합적이다. 한쪽에는 질병이나 사고로부터 회복되어 하나님께 기쁘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자주 기도했지만 회복되지 못했다. 그들의 기도에 문제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문제는 신앙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주 믿음을 원인과 결과에 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면 그것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와 교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한센병 환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예수는 믿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지적한다. 이 이야기에서 실제적인 치유는 거의 부수적인 사건이다. 예수는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이 일을 한다. 우리는 아홉 명 혹은 열 명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한 사람-이방인이며 그 지역에서 멸시당하는 사람인-이 예수의 발 앞에 절하고, 경배하고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은 안다. 예수가 나머지 열 사람은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어떤 어조로 말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슬펐을까? 화가 났을까? 깜짝 놀랐을까? 예수가 확인한 것은 가장 올 것 같지 않았던 사람, 이중으로 소외된 사람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일어나서 가거라,” 예수는 말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는 감사하는 한센병 환자에게 육체를 넘어서 작용하는 건강을 제공한다. 열 명 모두 육체적으로 한센병이 끝났다. 나머지 아홉 명이 그들의 길을 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제사장을 향해 갔을 것이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회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믿음의 양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듣는다-마치 믿음이 원인과 결과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질’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예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가르쳤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감사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이것이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을 진실로 그리고 아주 좋게 만든 감사하는 믿음이다.

실제로 우리는 “믿음”과 “감사”라는 두 단어를 거의 같은 뜻으로 말한다: 감사를 실천하는 것은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믿음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전부 다 표현한다. 하나님이 모든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고, 섭리의 손으로 모든 삶을 붙잡아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는 누르고 넘칠 만큼 풍성하게 믿음을 얻을 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절들은 누가복음 17:1로 시작된 말씀들을 완성한다.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많고, 때로는 우리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예수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하나님의 방법을 존중하고, 서로를 존경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믿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예배당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병을 고친 사람과 여전히 아픈 사람이 있고, 해방된 사람과 여전히 얽매인 사람이 있고, 성공한 사람과 실직한 사람이 있다. 만약 감사의 기도가 영혼의 치유와 해방과 번영의 일부라면, 기도하는 사람의 물질적 환경은 덜 중요하게 될 것이다. 감사하는 한센병 환자를 구원한 것은 그가 감사한 것이고, 이런 감사는 모든 환경에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한 즐거운 경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고난을 겪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심에 감사한다. 우리는 정결해지지 않은 한센병 환자가(길가에 한센병 환자가 열명은 넘게 있지 않았을까?) 그가 병에 걸렸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심을 감사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의도적으로 감사를 실천하는 것은 확실히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성격도 변화시킨다. 기독교인이 감사를 실천할 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예배에 나온다. 청지기직은 모금 활동에서 즐겁게 기부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감사로 변화된다. 교회의 선교는 윤리적인 의무에서 감사하는 손과 가슴으로 하는 일로 바뀐다. 기도는 우리의 중보와 간구뿐만 아니라 식탁에서의 우리의 감사를 포함한다.

예배-이런 감사의 실천-이 인간이 되기 위한 거의 우선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요한 부르크하르트는 한때 “사람이 예배하지 않고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궁금해 했다.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축하를 피하고, 감사를 억제하는 것은 사람의 호흡을 유지하는데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증명한다.”4) 예배는 분명 기독교인의 삶의 핵심이고,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삶에서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일어나서 가거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물리적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더 이상 문제가 되는 말이 아니다. 그 대신 그것은 교회를 위한 축복의 삶에 대한 처방이다: 일어나서 가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모든 것에 감사하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심을 발견하게 된다.

Kimberly Bracken Long,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Coordinator of Worship Resources for Congregation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Decatur, Georgia

설교적 관점

-Karl Barth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응답은 감사라고 즉 두려움이나 떨림 혹은 죄의식이나 무서움이 아닌 그냥 감사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5) C.S. Lewis도 그가 새롭게 발견한 신앙을 말하면서 성서 안에서 특히 시편에서 우리가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감사와 개인적인 안정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였다. “나는 가장 겸손하고 동시에 가장 안정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찬양하고 반면에 비뚤어진 마음을 지닌 자, 사회부적응자, 불평하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것을 거의 보지못했다. 찬양은 내적 건강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6)

설교자에게 있어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이자 선물인가! 오직 누가 만이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소외된 자, 멸시당하는 소수자인 사마리아 사람을 묘사하고 있고 그런 사람을 만져주는 예수가 누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와 무리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 (11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마리아” (Samaria)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주홍글씨처럼 꼬리표가 붙어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나 사마리아 사람 근처 곳으로도 가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은 멸시당하는 집단이었고 문화적으로 열등하며 신학적이나 예전적으로는 이단이었다. 주석작업에서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이런 일이 시작되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어떻게 서로 적대적이 되었는 지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우리는 이 관계를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카톨릭간의 적대적 관계 (비록 감사하게도 줄어들고 있지만) 혹은 이슬람 세계 안의 수니-시아파간 폭력적 갈등 또는 주류 교단 내에서 보수-진보세력 간의 심한 대립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근처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난다. 이 열 명이 지닌 사회적 소외와 격리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나병환자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는데 나병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피부 상처나 발진등을 묘사하는 광범위한 용어였다. 소위 한센병이라고 불리우는 이 병은 오늘날 치료가능하지만 예수당시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염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피부발진은 예전적으로 정결치 못함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나병환자들은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았고 가정으로부터 사랑하는 배우자, 아이들, 부모님들 그리고 신앙공동체로부터 떠나야했다. 그들은 공동체로부터 떠나 홀로 살았다. 때로 이들은 함께 무리를 이루기도 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3절)라고 그들은 요청하고 예수는 그렇게 한다. 누가는 몸의 치유과정에 관한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는다. 예수가 말한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제사장은 나병이 치유되고 그 사람이 다시 일상적인 인간관계로 돌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증명받기위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이들은 깨끗하게 된다. 9명은 제사장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계속 걷거나 뛰고 또 앞지르곤 한다.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그 걸음을 멈추고 예수를 찾아 거꾸로 뛰어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고 있다.  

예수는 나머지 9명에 대해 묻는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17절) 그런 다음 예수는 발 앞에 있는 감사하는 이 사람에게 아주 재미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사람에게는 다른 아홉 명보다 더 좋고 더 건강한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의 감사는 그의 믿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이 사람의 종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보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신학,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가 낙태를 찬성하는지 혹은 반대하는지, 안식일에 투표를 하러가는지 그냥 쉬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 진짜로 알고있는 것은 그가 무언가를 보고 경험했을 때 선물을 받았음을 깨닫고 돌아와 “고맙습니다” (Thank you)라고 말했고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의 정의에 따르면 믿음과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감사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감사에는 생명을 살리는 그 무엇이 있다.

-설교자는 이 사람의 구원이 그의 무서운 병을 제거한 것 그 이상이라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성서가 건강해 짐(wellness), 총제적 건강(wholeness), 구원 (salvation)을 거의 구분없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너의 믿음이 너를 건강하게 했고 총체적으로 회복시켰고 구원하였다.” 감사한 상황에 처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이고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바램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느 의료팀이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웹페이지에 “감사로 당신의 건강을 증진시키세요” 라는 글이 있었다.7)이 글은 감사를 강조하는 수 천년간의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을 소개했고 그런 다음 감사하는 사람들 곧 감사가 일상인 사람들이 건강하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감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더 잘 돌보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보다 희망을 가지고 있고 또 감사와 면역체계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우리에게 할머니에게 전화하고 생일축하 카드를 써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도록 한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할머니를 건강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응답은 감사이다: 생명을 선물로 주심에 대한 감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신 좋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관계없이 희망을 선물로 주시고 그에 따르는 건강함과 총체적 회복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다. 작가 Anne Lamott는 그녀가 즐겨하는 두 가지 기도에 대해 말한다. 아침에는 “나를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Help me. Help me. Help me,”) 이고 잠자리에 들 때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Thank you. Thank you. Thank you.”)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며 매 주일 예배 때 서서 노래하는 것이 나의 고백이다. 

John M. Buchanan, Pastor, Fourth Presbyterian Church, and Editor/Publisher of The Christian Century, Chicago, Illinois

1) “The Great Thanksgiving: B,” in Book of Common Worship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3), 123.
2) George Stroup, Before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4), 24.
3) A Brief Statement of Faith, in The Book of Confessions (Louisville, KY:Office of the General Assembly, 1999), 268.
4) John E. Burkhart, Worship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2); quoted in A Sourcebook about Liturgy, ed. Gabe Huck (Chicago: Archdiocese of Chicago, Liturgy Training Publications, 1994), 148.
5)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3 (Edinburgh: T. & T. Clark, 1960), 564.
6) C. S. Lewis, Reflections on the Psalms (London: G. Bles, 1958), 78–81.
7) http://women.webmd.com/features/gratitute-health-boost.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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