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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월남의 기억, 우리도 학살자였다.기장 생명선교연대 베트남 평화기행 후기
고수봉 사무국장 (기장생명선교연대) | 승인 2016.10.07 17:08

9월 4일(일) 늦은 저녁, 전남과 서울 등지에서 모인 목사님들과 두 분의 사모님까지 일행 8명은 인천 공항에 모였다. 낯선 곳을 가야하는 해외여행에 어리둥절한 나도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면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를 나가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허둥지둥하며 공항에 온 탓에 자꾸 다른 사람의 짐과 비교하게 된다.

이번 여행은 생명선교연대 국제위원회가 기획했다. 월남파병 50주년을 기념해 베트남 여행과 함께 한국군에 의해 학살이 벌어진 곳을 방문하자는 취지였다. 베트남은 누구나 아는 기본적인 상식을 제외하면 우리 현대사의 아픈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 물론 그마저도 불과 몇 년 전 알게 된 사실이다. 그만큼 나는 베트남에 대해 무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베트남에 대한 나의 인상은 빼곡한 밀림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총질을 해대는 게릴라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거대한 밀림칼을 휘두르던 베트콩들이 할리우드 영화 주인공의 총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베트남은 겨우 그 정도 수준이었다. 베트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아마도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한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한국 사람으로 당연한 인식을 가지고 살던 중 어느 소설에서 짤막하게 표현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로 다가왔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짧은 그 이야기가 매우 불편했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피해자로만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야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제국주의 점령군과 같은 폭력적인 모습은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한국군의 학살에 대한 소식을 듣는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반응이지 않을까? ‘설마’하는 생각이 들면서 깊이 이해되지 못하거나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죽은 베트남 양민은 9천여 명(베트남 평화운동가 구수정 박사의 조사)에 달한다. 이는 한국군이 사살한 베트남 사람의 25%가량이 일반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다. 더불어 국가적 차원의 사과나 보상도 이뤄진 바 없다. 그저 시민단체가 돈을 모아 몇 개의 비석을 세웠을 뿐이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는 것처럼 우리가 저지른 부끄러운 역사, 베트남 학살에 대해서도 명백히 인정했으면 한다.

4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우리나라 대전에 해당하는 도시 다낭이었다. 도로에는 오토바이가 가득했고, 관광지답게 리조트나 호텔 같은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었다. 활기가 넘치는 도시 다낭은 베트남 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대전이 아니라 연천이나 철원에 가까운 도시일 듯하다.

ⓒ생선연

다낭에서 전투를 벌인 부대의 승리를 알리는 5사단 승전기념관에 들렀다. 베트남으로 오는 비행기와 거리에서 종종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을 만났지만 기념관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참파족의 문화유산을 전시한 참박물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관람을 시작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처럼 외부에는 요란스러워 보이는 장갑차, 대포, 비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달고 있는 이름표는 미군에게 언제 빼앗았고, 언제까지 전쟁에 이용되었는지 말해준다. 우리가 전시물을 통해 전쟁 자체를 말한다면 베트남은 승전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이번 여행의 가이드를 맡은 전성표 목사가 “베트남은 자신들이 승전국이라며, 미국의 사과를 거절했다.”고 귀띔해 줬다.

추모관으로 들어서자 호국 영령을 위로하는 향로와 사진, 전사자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기본적으로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기독교식 기도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생경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늙은 노파의 사진들이다. 자식과 남편을 전쟁에 보내고, 혼자가 된 늙은 여인까지 함께 추모하고 있는 듯했다.

전쟁은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승리의 공도 남자들의 것이며, 전사자로 추모되는 것도 대부분 남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 속에서 노인과 여자, 아이들은 피해자들로 통칭된다. 하지만 그들은 승전의 기쁨 속에서 자식과 남편을 바친 여인들의 고통도, 그 아픈 세월도 함께 기억한다. 물론 전투에 참가한 여성 전사들도 많다고 한다. 기념관 내부에 걸려있는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일행들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미라이 학살은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공포에 떨고 있는 한 노파 뒤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들이 있는 사진은 베트남 학살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결국 그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생선연
ⓒ생선연

미라이 학살은 미군에 의해 5백여 명이 죽은 참혹한 학살 사건이었다. 학살은 한국군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우리가 찾아가기로 한 학살지는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이었다. 퐁니·퐁넛 마을에서는 7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으며, 하미 마을은 140여명의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모두 비무장이었으며, 먹을 것을 나눠주는 줄 알고 모인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한국군은 없다. 그 동안 국방부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다낭에서 일정을 마친 우리는 호이안이라는 작은 소도시로 이동했다. 대도시 다낭과는 조금 다른 정취를 풍기는 호이안은 동서양을 잇는 국제 무역항이 있던 곳으로 네덜란드인 등 서구 상인, 인도인, 화교와 일본인이 자리 잡기도 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호이안의 ‘옛 마을’에는 중국식 고택이나 관우 사당, 일본 다리 등이 명소로 인정받는다.

또한 미선(My Son)은 호이안 지역에 번성했던 참파 왕국의 유적지로 독특한 힌두 문화를 보여준다. 미선을 한자로 바꾸면 미산이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산이란 이름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게릴라들이 활동했던 지역이기도 하며, 천 년 전에는 힌두교 사원이 자리 잡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미선 유적지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상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선 유적지는 베트남의 앙코르와트로 불리는 관광지로 주로 시바신을 모시는 사원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미선 유적지를 발견하자 시바신의 머리를 잘라갔으며, 사원은 미군의 폭격에 의해 다수가 파괴된 상태였다. 곳곳에서 폭격의 흔적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으며, 복원된 건축물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건축물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벽돌을 그대로 쌓아서 만든 건축의 비밀을 풀 수 없어 복원하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호이안에서 이틀 간 여행을 마친 우리는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억울한 영혼들을 찾아 가기로 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 위령비였다. 위령비는 현지에서 고용한 운전수도 찾기 힘들어 했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주민들에게 물어보길 반복했다. 50년의 세월이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희미하게 만들었나보다.

갑자기 해방 70년 동안 하나 둘씩 작별해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이 생각났다. 잊혀져가는 기억 속에 역사도 희미해지는 것이라면 억울한 영혼들의 한은 누구에게서 풀 수 있을까. 우리가 억울한 사람들의 잊지 않아야하는 이유이며, 베트남을 기억해야하는 이유이다.

위령비를 찾아가는 내내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아마도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아직도 민간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내 나라의 못된 처사가 더욱 부끄럽고, 미안하게 만든다. 한 인터넷 매체에 의하면 퐁니·퐁넛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2015년 4월 한국 방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 가면 베트남 참전군인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들을 용서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베트남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요.”

위령비를 방문해서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더욱 커졌다. 하미 마을 위령비는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부로 착공되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복지회는 제막식을 앞두고 비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지워줄 것을 요구했다. 비문의 내용은 당시 학살의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위령비 뒤편에 쓰여 있었다.

30가구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생존자들이 시신을 가매장한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한국군은 시신들은 파헤쳐 한꺼번에 매장했다. 위령비의 내용처럼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뻔뻔하게 비문의 내용이 ‘불편하다’는 투정을 했던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비문의 내용을 지우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위령비의 뒤편은 연꽃 모양의 대리석으로 가려진 채 제막되었다. 향을 피우고 희생자들에 대한 넋을 위로했다. 위령비의 뒤편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애써 피워놓은 향이 송구스러웠고, 찰나와 같겠지만 억울한 원혼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생선연
ⓒ생선연

퐁니·퐁넛 위령비에는 희생자 74명의 이름과 출생연도, 고향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비문 가장 위 응우옌티몯(78)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희생자들이 이어졌고, 가장 아래쪽에는 학살이 일어난 1968년생 무명이가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축복 속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이름도 얻지 못하고 엄마 품에서 죽어간 아이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집에 두고온 딸들을 생각하니 지옥같았을 것 같던 학살의 현장이 좀더 아프게 다가왔다.

위령비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차에서도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넌지시 한 목사님에게 심경을 물었다. 삼촌이 월남에 참전한 해병이었다. 크게 한 숨을 내쉰 목사님은 “죄송하기만 하지.”라는 짧은 대답 후, “돌아가신 삼촌 생각도 많이 난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월남 이후, 참전했던 삼촌은 술로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죄책감을 씻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모든 원한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베트남 학살은 아직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듯 보였다. 만약 그 삼촌이 베트남을 찾아와 위령비에 분향이라도 했다면 아픔이 조금이라도 위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결국 학살의 진실을 찾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부끄러운 역사의 원한을 씻는 길이라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와 한달 여가 지났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주저하는 동안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아직도 위령비 앞에서의 먹먹했던 기억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오히려 기억을 더듬고, 자료를 찾는 중에 더욱 선명해 지기도 했지만 부끄러움과 미안함,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말의 부족함을 느낀다.

다른 말보다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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