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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제는(여호수아 24:14~18)2016년 10월 16일 창조절 일곱번째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10.17 11:52

*영상설교: youtu.be/myCyUCnXSik

 

■ 단상 : 가을 체육대회

지난주일 오후 우리는 가을 체육대회를 열었다. 한 주 한 주 보내기가 정말 아까운 계절에 주민신협 옥상 달빛 공원에 모였다.

우리 놀이의 특성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참여한다는 점이다. 합리적으로 말하면 어린이는 어린이, 남자는 남자 이렇게 종목을 구분하여 게임을 하는 것이 더 박진감 넘칠 수도 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뒤섞여 하면 잘하는 사람들은 좀 싱겁게 보인다.

축구 잘하는 사람이 초등학교 아이들과 같이 축구하면 실력발휘하기가 어려워 답답하고 재미 없어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경기를 구분하지 않고 다 참여하여 했다.

축구, 피구, 공 던지기, 공 전달하기, 다트 등…
좀 어설프기도 하고, 박진감이 덜 할 것 같은데, 해보면 더 재미있다. 이 질서정연하지 않음이 주는 매력이 있다. 서양 음식은 메뉴마다 구분이 되어 있다. 전채요리, 본 음식, 후식 등 나뉘어 있고 잘 섞어 먹지 않는다. 우리는 수련회나 행사 후에는 남은 것 다 큰 양푼에 넣고 썩썩 비벼서 한꺼번에 다같이 먹는다. 이러한 무질서, 혼돈이 주는 색다른 맛이 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어우러진 비빔밥 같은 활동을 통해서 가을이 주는 계절의 맛과 함께 주민공동체의 신명도 같이 나누었다.

1. 카이로스 : 결단의 시간

1) 카이로스(KAIROS)

어제 황계수 전도사가 결혼식을 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가정이라 우리 모두가 축하하면서도 행복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정한 순간은 제 3자에게는 그냥 그랬구나 하는 정도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두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결정하는 진중한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다.
개인의 삶이나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는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그것을 그냥 양으로서의 시간인 크로노스와 구별하여 카이로스라고 한다.

우리는 내 인생의 카이로스를 곰곰이 따지고 되새겨보아야 한다.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누구나 몇 번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있다. 그 순간과 정황을 곱씹어야 한다. 무엇에 감사하고 무엇을 반성적으로 성찰해야하는지를 되새겨야 삶이 성숙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공동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있다. 그 부분을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가치 기준에 따라서 분석하고 정리하고 평가할 수 있을 때 교회는 한걸음 전진한다.

2)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나안 정착은 과거와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요건이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를 잇는 요단강 왼편(서편)과 오른편(동편)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지 않았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집트 노예 생활과 그로부터 극적인 탈출, 그리고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정리하고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몇 가지 카이로스 중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부분이 가나안 정착이다.

2. 신앙의 새로운 결단

1) 갱신의 필요성

사람은 환경에 적응한다. 모든 생명체는 그렇다. 생물학이나 사회학이나 진화론의 핵심 중 하나는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이다.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명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이다. 물론 우리나라 정치권의 적자생존은 수첩에 잘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말로 희화화되었지만, 그것도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환경은 광야였다. 광야는 메마르고 결핍된 곳이다. 가난하고 힘들고 여유가 없다. 광야는 고통스러운 환경이지만 여유가 없기에 죄도 덜 짓게 된다. 죄는 어디에 만연하는가? 돈, 시간, 건강, 지식, 도구가 많은 곳에 죄가 더 번성한다. 죄를 짓고 싶어도 여유가 없으면 죄를 덜 짓게 된다.

제임스 티솟, '가나안의 포도'(수채화, 1902년/ 출처 : 위키피디아)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도 물론 죄를 지었지만 초보적인 단계의 죄였다면 이제 이스라엘이 적응해야 할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풍요의 상징 같은 땅, 그래서 죄의 수준이 다른 땅이다. 안일한 자세를 지니고 가나안에 정착했다가는 가나안의 환경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매몰될 가능성이 아주 많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죽기 전, 마지막 자신의 과업을 정리하면서 신앙의 재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2) 계약을 갱신하는 여호수아 (1907년)

모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 억압받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모세를 통해 시작되었다면 그 꿈은 여호수아를 통해 성취되었다. 이제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던 광야를 뒤로하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땅 없이 이리저리 떠밀리던 인생들이 평안하게 대를 이어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은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에 버금가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이전부터 내려오던 숙원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으로 가슴 벅찰 때, 지도자 여호수아는 정작 이제부터 문제임을 직감한다. 차라리 탄압받았을 때, 차라리 모두가 고생하며 가난했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탐욕과 교만이 정착한 이스라엘의 미래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름을 여호수아는 이미 느끼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교한 존재인가!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생을 마감하기 전, 여호수아는 마지막 결단을 촉구한다. 누구를 신으로 섬길 것인가? 내 인생 결정의 순간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을 누구로 삼을 것인가? 그것이 신(神)이다. 여호수아는 목청껏 소리쳤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자 너희도 선택하라)!
여호수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외치는 소리에 심장이 흔들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수아는 마지막 자신의 사명이 가나안의 풍요에 휩쓸려 쉽게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다잡고 결단하는 신앙의 카이로스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가나안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실력과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백히 재확인한다. 우리 조상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고 거기서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다. 광야 40년 동안 보호하시다가 이제 드디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누구를 신으로 섬길 것인지를!
내가 누구를 신으로 섬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생과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권력, 돈, 쾌락, 명예를 추구하며 그것을 행동 결단의 첫 번째 조건으로 삼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동기와 목적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둔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것은 그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을 넘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분을 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로 고백한다는 뜻이다. 이 고백을 날마다 순간마다 되새기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세상에 소중한 것이 너무나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는 가장 소중하다는 고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 자신의 삶과 이 왜곡된 역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고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내일도 아니고, 은퇴한 뒤도 아니고, 건강만 회복하면도 아니고, 취업만 되면도 아니고, 이번 문제만 해결되고 나면도 아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셨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바로 지금이다.

3.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결과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라는 뜻이다.
여호수아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굳게 신앙을 확인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후 시내산에서 맺었던 계약의 갱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18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믿음과 계약에 충실했던 시대는 흥했고 이 계약을 파기한 시대는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왕이나 평민이나 행복한 은총을 받았고 이 믿음에 신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심판과 실패의 운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기독교 신앙의 역사는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단순한 선언이다.

요즘 우리는 수요기도회에서 사무엘상을 거의 다 읽었다.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다윗이다. 사무엘상은 목동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발탁되어 사울의 위협 속에서 여러 가지 위험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삶을 관통하는 자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물론 그도 인간이라 왕이 되고 권력이 생기니 강제로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죄를 지었을 때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고 참회함으로써 무너지지 않고 새롭게 설 수 있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윗에게 위임하셨다. 메시아도 그의 혈통에서 탄생하시게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윗은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심으로 그를 섬기는 사람에게는 다윗에게 내렸던 은총을 똑같이 베풀어주신다는 것이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정리하기 전 여호수아는 딱 부러지게 단언한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다! 너희는 스스로 선택하라!

신앙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 같으면 안 믿으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되묻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지 않다면 그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살았는데도 아무런 효과나 변화가 없다면 그 때 깔끔하게 정리하면 된다, 하나님은 나의 신이 아니라고! 한번 내 인생을 하나님께 걸고 그 뜻대로 살아보자. 모험을 해보자. 구원의 문은 믿음의 용기를 지닌 자에게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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