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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9)<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10.18 14:37

장준하가 이끄는 「咸錫憲氏 歸國報告 강연회」

함석헌 선생의 귀국 강연회 모습 (출처 : 함석헌기념사업회)

귀국하자마자 함석헌을 만나 대민주장정을 논의하고 돌아온 장준하는 조용히 두 무릎,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그것은 간데없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김준엽은 어디에선가 그를 일러 “순교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한 것이...

장준하의 가슴속에 비장감이 서려온다. “이번에는 또 무슨 선물 받을까?‘했던 함석헌의 그 말이 자신의 말처럼 외워진다. 함석헌은 1958년 「사상계」8월호에 발표했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문제가 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20여일 동안 옥고를 겪은바 있었는데, 그 자유당정권이 학생혁명에 의해 퇴진하고, 그 천추의 한이었던 ’민주정부‘를 수립했던 것인데, 그 민주정부가 군사반란에 의해 수립 1년에도 못 미쳐 어이 없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장준하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하여 그 군사 쿠데타를 수용하기로 한다. 첫째는 박정희를 비롯한 이 쿠테타 세력이 적어도 공산당은 아니라는 것, 둘째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대로, ’백척간두에 처한 국난을 극복한 후 지체 없이 군 본연의 자리로 복귀할 것‘이라는 성명을 믿어서 였다.

그런데 「사상계」의 편집요원들, 취재부의 기자들, 사선(私線)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종합한 바 군부세력은 결코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국은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형태는 민정체제를 갖춘다고 해도 실제는 군부통치, 군인정치를 지속할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5.16’에 대한 비판적인 함석헌의 입장을 구했던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되는 ‘5.16을 어떻게 볼까?’의 끝 부분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입은 바 있던 그 필화(筆禍)를 회상하며 “3년전 이 밤엔 내가 ‘나라없는 백성’이라고 한 생각 말했더니 이 나라가 나를 20일 동안 참선을 시켰지. 이번에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라고 끝을 맺는데, 함석헌과 함께 벌릴 「민주대장정」을 확정하면서 장준하 역시 바로 그 말을 되뇌어 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함석헌도 장준하도 의(義)를 구하는데서 오는 수난을 역사로부터의 선물로 믿는 이들이었다. 묶이고 갇히면서도 의젓이, 떳떳이, 당당히 수행해 갈 과제가 있었다. 참 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현존계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면서도 추호도 굴하지 않는. 아니, 빼앗길수록, 빼앗기는 것만큼 더욱 부요해 지는.....

장정(長程)의 시작

장준하는 이후 함석헌과 함께 할 장정계획표를 함석헌 앞에 내놓았다. 우선 서울에서 개최할 세 곳의 강연회였다. 어떤 신문은 「사상계」사가 개최하는 이 행사를 「咸錫憲氏 歸國報告 강연회」라 보도했다. 「사상계」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씨(氏)를 ‘선생’으로 바꿔 「함석헌 선생 귀국 보고 강연회」라 했다. 강연회는 우선 3차 진행으로 계획 했다.

제 1차 시민회관 (7월 22일 오전 9시 30분 )
제 2차 대광중고등학교교정 (8월 3일 오후 4시 )
제 3차 오산중고등학교교정 (8월 20일 오후3시)

오산학교를 강연 장소로 결정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으나 시민회관과 대광교정은 쉽지 않았다. 이미 함석헌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더구나 생사의 결정권을 거머쥐고 있는 군부정치의 실권자와 어떤 관계인가를 훤히 알고 있는 기관의 책임자들이 함석헌의 강연회에 결코 쉬 협조할 수가 없었다. 후환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이럴 때 장준하는 그야말로 ‘일꾼’이었다. 그는 일을 만들고 이루어내는데 가히 천부적인 기질을 가진 이었다. 일에 미쳐 사는 장준하와 ‘뜻’외에는 거의 ‘바보’에 가까운 함석헌과의 만남은 두 사람들에게는 물론 한국 현대사의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장준하는 강연회를 위해 관계기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 일이라면 그곳이라면 제가(내가)해 볼 수 있소. 내가 밑기시오.” 하는 동우, 동인들이 그야말로 줄을 서 있었다. 첫 행사로 내일이면 시민회관 강연회가 시작된다. 청중들이 얼마나 모일 것인가? 행사를 처음부터 구상하고 이끌어온 책임자로서 자신이 이루어놓은 그 행사에 얼마나한 청중들이 모일 것인가? 가 전혀 걱정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장준하는 적어도 장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강연회가 끝난 후에 유사이래 개인이 하는 강연에 유례가 없을 만큼 정말 구름처럼 모여든 그 엄청난 청중에 놀라 함석헌의 한 제자가 정말 장한 일을 하셨다는 듯 장준하에게, 

“장사장님. 정말 큰 수고 하셨습니다. 아, 정말 그 엄청나게 몰려든 청중들, 모두가 놀랐습니다.” 한 후, 이렇게 물었다.
“장사장님. 강연회를 앞에 놓고는 걱정 좀 하셨겠지요? 청중문제로...”
너무 큰 장소를 결정해 놓고 청중이 없으면 어쩔 뻔 했겠는가? 해서 하는 물음이었는데, 그 물음에 장준하의 대답이 이랬다.

“그랬다면 (청중 수에 연연했다면...필자주) 내게 주신 역사적 과제의 거룩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거겠지요.” 장준하는 현상으론 쉬 계산할 수 없는 인물 이었다. 

1971 10.1 한일문제에 대해 강연-서울대 (출처 : 함석헌기념사업회)

1963년 7월 22일 상오 9시 30분

“안에서는 열광, 밖에서는 아우성” 제 1회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사상계」사 주최 「함석헌 선생 귀국강연회」의 신문보도의 머릿기사들이었다. 강연회 시작은 오전 9시 30분이었는데 놀랍게도 청중들은 7시 30분부터 몰려들고 있었다. 먼저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강연회 개최 9시 30분에는 이미 실내의 3500석은 물론, 더 이상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밖에 역시 회관을 둘러선 입장 못한 수 천명의 청중들이 ‘함선생의 얼굴이라도 보여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선생의 얼굴이라도 보여 달라는 청중들의 요구가 드디어 한결같은 함성이 되어 나왔다.

‘함석헌 선생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
드디어 50여명의 기마경찰이 출동했으나 입장하지 못한 청중들을 해산시킬 수가 없었다. 스피커라도 내 달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꿈쩍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기마대장이 한 대원의 경호를 받으며 강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장준하를 만나 밖에서 아우성인 청중의 실황을 전하며 대책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때가 열시가 조금 넘을 때였다. 대책을 곧 마련하겠다는 장준하의 확답을 받은 기마대장은 고마워하며 강연장을 나와 장외의 분위기를 주시하면서 안으로부터의 어떤 행동 있는 소식을 기다렸다.

10시 30분경, 장준하의 안내를 받으며 정문 2층 베란다에 함석헌이 나타났다. 그 장외의 무수한 청중들, 야단법석을 이루는 아우성, 함성이 뒤범벅이 되어 광장(狂場)을 방불케 하던 장외의 청중들이 베란다에 장준하와 함석헌, 함석헌과 장준하가 나타나자 거기에 곧 신비스러움이 흐르기 시작한다. 흡사, 대제사(大祭祀)를 채비하는 듯 하는...

그랬다! 그때 그 장외의 민중들은 「새 역사의 열림」을 우러르는 ‘맨 사람’들인 듯했다. 장준하가 말했다.
“시민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이 곳을 찾아주신 시민 여러분. 여러분께 대한 고마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안에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수많은 청중들이 있기 때문에 여기 길게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사상계」가 그 명운을 걸고라도 앞으로 일주일 안에 선생님을 모시고 다시 강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10일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는 강연회는 야외 강연회로 준비하겠습니다. 어서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함석헌과 장준하는 다시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감격스러운 광경은 그 후에 드러났다. 함석헌과 장준하가 장내로 돌아들어갔는데 글쎄, 그 많은 장외의 청중들이 돌아가지를 않은 것이었다. 말없이, 소리 없이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산제사였다.

기마대장의 요청이 있어 “잠시 선생님을 모시고 베란다에 나아가 장외의 청중을 뵙고 들어 오겠습니다”며 강단을 떠났던 장준하가 다시 돌아오자 이번에는 장외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 벌어졌다. 박수, 함성, 도하 신문들이 전한대로 그야말로 열광이었다. 밖은 고요가, 안은 열광, 안팎이 신비였다!

함석헌의 말, “여기는 민중에게 맡기고 너희는 군대로 돌아가라!”
군부정치꾼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9시 3분에 시작된 함석헌의 말은 정오 12시가 되어서 끝났다. 함석헌의 강연이 장장 두 시간 30분 동안 계속 된 것이다.
“쿠데타 한 사람들이 더러 내게 찾아와, ‘선생님, 저희들 큰 맘 먹고 혁명했는데 너무 하십니다. 왜 그렇게 반대만 하십니까? 저희들 좀 도와주십시오.’하는데, 나 그러지요. 너희들 혁명 일으킬 때 나 하고 의논 했냐?고” 하는 우스게 소리가 있기도 했지만 함석헌이 그 긴 시간동안 한 말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민(民)이 주(主)다. 여기 (정치, 필자 주)는 민중에게 맡기고”
“너희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일단, 필자 주)는 군대로 돌아가라”로. 

함석헌은 박정희의 군부를 통렬히 질타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도 다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건방진 소리하지 마라. 칼 뽑아 들었을 때 너는 이미 민중이 아니지. 칼 뽑아드는 순간 하늘이 널 버린 거야. 살고 싶거든 돌아가라.
정말 나라살림, 나라 살리는 일은 민중이, 민중이 내세우는 자에 의해서 된다. 
큰 숲에서만 기둥감(참 지도자)을 얻을 수 있다. 
큰 숲이 어디 있는지, 큰 숲이 무엇인지 너 아느냐? 민중(民衆)이다.“
1963년 7월 22일은 그렇게 흘렀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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