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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계 21:1~7)2016년 11월 20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6.11.19 11:59

*영상설교: youtu.be/HzlNaa8r-QA

 

1. 청교도들의 이상은 신정국가

1)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의미

플리머스에서 드린 첫 번째 추수 감사.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의 축제였다. 첫해에는 추위와 질병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1621년 첫 수확을 하여 주변의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옥수수와 야생 칠면조를 먹으면서 감사와 교제를 나누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Turkey Day(칠면조 날)라고도 한다.

미국은 11월 넷째 주 목요일부터 국경일이면서 명절로 지내고 우리나라는 11월 셋째 주일,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우리 고유 명절인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도 한다. 4백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처음 본래의 취지가 변색된 부분도 있지만 우리는 늘 이러한 절기의 동기와 기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취지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 교회의 원조들인 청교도의 신앙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그들이 드린 감사의 고백을 오늘 우리 삶에서 재현하는 데 있다.

2) 청교도들의 이상과 미국의 현실

청교도(淸敎徒)는 깨끗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한문으로는 맑을 청자를 쓰고 영어로도 순수(pure)를 뜻하는 Puritan이라고 한다. 이것은 영국 헨리 8세가 앤 블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로마 교황청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영국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는데, 캘빈의 교리를 따르는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영국의 어설픈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성공회를 인정하지 않고 보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주장하며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황폐하고 무서운 신대륙으로 떠난 것이다.

청교도 신앙은 너무 율법적이고 가혹해서 지금 보면 기독교 근본주의에 가깝고 그래서 미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향락을 제한하고 엄격한 도덕적 삶과 철저한 주일 성수 등 신앙적 삶이었다. 나아가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관여하시는 신정국가를 꿈꾸었다.

그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미국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이 취임할 때는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받는 전통을 지속하고 있다.

청교도에 대한 한 서술을 보자. (딴지일보 [역사] ‘신의 나라를 원했던 청교도들’에서 인용)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앞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원시림이고 뒤는 천신만고 끝에 건너온 바다다. 숲에서는 언제 ‘야만인’들이나 야생짐승들이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어디로 눈길을 돌리든 위안이나 만족을 거의 얻을 수 없었다. 여름이 끝났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날씨에 찌든 모습으로 그들 위에 솟아 있었으며 사방은 숲과 덤불로 가득 찬 채 거칠고 야만적인 색깔을 띠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건너왔으며 이제는 그들을 문명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주된 장벽과 심연이 되고만 거대한 바다뿐이었다.’

그들은 거기에 온 걸 후회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네덜란드와 영국, 그곳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지만 이제 돌아가지도 못한다. 어떻게든 거기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결국 살아남았다.”

현재 미국은 점점 그들의 선조인 청교도의 이상과는 멀어져가고 있지만, 추수감사절을 시작한 청교도들의 신앙, 하나님이 온전히 우리의 인생과 국가를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신앙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 

1) 요한계시록은 난해한 책이다.

상징으로 가득 차 난해한 요한계시록.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과 상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해석하는 방식과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또 미래 종말에 관한 계시로 채워져 있어서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해석하기 어렵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종말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어서 예로부터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각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큰 틀에서 요한계시록은 현재의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믿음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등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

2) 뒤러, 무저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천사, 39.8*28.6cm, 목판화, 1498년, 칼스루에

500년 전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요한계시록의 여러 장면들을 목판화로 제작하였다.

하나님의 전령인 천사가 커다란 열쇠와 쇠사슬을 손에 쥐고 지상에 내려왔다. 천사는 이 땅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고 세상을 파멸시키는 사탄을 잡아다가 땅 속 끝이 없는 지하 감옥(무저갱)에 가두고 있다. 이제 곧 천사가 무거운 철 뚜껑을 닫고 저 큰 열쇠로 잠가버리면 악은 심판받고 갇혀버릴 것이다.

언덕에서는 또 다른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새로운 도시를 가리키며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천사가 문을 지키는 새 예루살렘은 이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과 역사를 제공할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인생과 세상의 모든 아픔, 상처, 눈물, 모순, 억울함, 분노 등이 극복된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전망을 믿고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 증언의 삶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마지막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새로운 기회는 믿음을 요구한다.

1) 고난과 혼란은 새로운 기회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나라, 모든 아픔을 넘어선 새 예루살렘을 꿈꾸고 기도하는 사람의 상황은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점이다. 온전한 신앙의 자유와 신앙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고향, 친척을 떠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 미지의 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강력히 희망하는 요한계시록 저자(속칭 요한이라고 하자)는 지금 평안하게 앉아서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매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심한 박해와 불안의 시대, 아무리 희망을 갖고 의미를 찾으려 해도 가능성의 빛을 발견하기 어려운 상황 안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에 절망하고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하거나 스스로 좌절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를 본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보이는 세상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인생과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남들이 다 힘과 쾌락을 쫓는다 해도 용감하게 다른 쪽을 향해나갈 수 있다.

2) 우리는 지금 유사 이래 최대의 혼란을 겪고 있다.

지옥 같은 나라라고 해서 헬 조선이라는 말이 상식이 되었고, 이게 나라냐 라는 탄식이 끊이지 않고, 자고 일어나면 또 어떤 어이없는 일이 밝혀졌는지 불안한 세상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의 지지율이 5%밖에 안 된다. 90% 이상이 믿을 수 없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 불행한 일이다. 매일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리고, 토요일엔 대한민국 수도에 100만 명이 집결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인 구성원들이 열렬한 데모꾼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부터 여인, 직장인, 주부,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연령층이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현재 우리 국민 전체가 상대적 박탈감을 체감하고 있고 국민의 자부심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정치가 뒤엉켜있고 사회가 어지럽다. 이 복잡한 와중에 정부는 사드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드 배치를 강행하며 민족의 안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에 가 서명을 한 상태다. 대단한 혼란이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주제를 정하고 교회 외벽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런데 바로 이 혼란의 시기가 새로운 기회다. 억눌려 있던 민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 숨죽이고 있던 국민이 일어나는 것, 더 이상 그릇된 권력에 고분고분 순응하지 않는 것, 그래서 겉으로 볼 때 권력에 아무 말 못하고 조용히 있는 것이 질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거짓 질서이며, 반대로 날마다 주말마다 스스로 모여서 소리치는 것이 혼란스럽지만 그것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기회, 모든 악을 묶어놓고 새 예루살렘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것이 감사하다.

3) 하나님은 새 역사, 새로운 사회, 새 정치 환경 등 거대 담론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도 똑같이 새로운 기회를 내려 주신다.

개인에게도 원리는 똑같다.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기 전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의 통과제의를 거쳐야 한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집안에 우환이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몰락할 수도 있고, 너무 아픈 상처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을 당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의심과 원망을 품게 되지만, 믿음의 백성은 이 속에 담아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 기회의 은총을 바라본다.

여기서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는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기 전 고통의 기간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고통과 그에 따른 혼란은 진정 악을 징계하고 새 예루살렘을 내려주시기 위한 전조(前兆)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21:6~7)

믿고 이기는 자에게는 새 예루살렘의 은총이 임하신다.

그 때에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이겨야 한다. 육체적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과 전능하심을 신뢰함으로 이겨야 한다.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때로 우리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만다. 그럴 때일수록 지금의 고통과 혼란이 새 인생을 주시기 위한 기회임을 확인하면서 끝까지 이겨야 한다. 그에게 주님은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주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기회에 감사드리자. 그것은 새 예루살렘을 주시기 위한 전 단계다.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며 믿음으로 견디며 나아가면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역사를 허락하실 것이다. 그 때까지 굳건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나아가자.

이훈삼 목사(성남 주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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