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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소소한 남자의 소소한 독서>
정주현 | 승인 2016.11.24 14:08
페터 한트케 지음/윤용호 옮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서울, 2015)

요즘 한국은 불안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다. 이제는 너무 많이 언급해서 신선하지 않은 단어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불안은 이미 개개인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 불안의 원인에 대해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말을 하고 대안을 쏟아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시국에 전국가적인 분노를 유발하고 국정을 마비상태에 이르게 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국가적 불안과 개인적 불안 모두 극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여유롭게 책이나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실제로 페이스북 친구로 등록된 출판업계 종사자들의 글을 보면 책 판매량이 급속도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활자에 눈을 붙이고 있을 여유가 사라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떠다니는 마음을 어렵게 붙잡고 필자에게 허락된 지면을 채우고자 한다.

축구 경기 중 골키퍼가 겪을 수 있는 불안한 상황 중 가장 최악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페널티킥을 막아야 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 상황에 놓인 골키퍼라면 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메시’나 ‘호날두’가 키커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축구선수가 키커로 나선다 하더라도 골키퍼의 불안감은 이미 최고조에 이른 상황일 것이다.

이런 골키퍼의 불안한 심리상황을 단번에 느끼도록 하는 제목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은 엄연히 세계문학전집을 발행하는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속해 있다.

(왼쪽) 다음 웹툰 '에이스하이'(글: 이창현/ 그림: 유희), (오른쪽) 다음 웹툰 '빅토리아처럼 감아차라' (글: 이창현/ 그림: 유희)의 한 장면

이 책을 접하게 된 동기는 평소 즐겨보는 웹툰을 통해서이다. 이 웹툰은 「빅토리아처럼 감아차라」2라는 웹툰이다. 이 웹툰 작가들의 이전 작품들3을 즐겨왔기에 지금 연재중인 작품도 즐기고 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즐기게 된 계기는 상상이상의 내용전개와 더불어 그것을 엮어내는 철학 인용문들 때문이었다.

분명 웹툰이라고 부르기엔 서사가 평범하지는 않은 것은 물론 ‘비트켄슈타인’이라 던지, ‘칸트’와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와 작가 그리고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하는 웹툰은 처음 봤으며, 그 인용구와 웹툰의 조화와 미학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기에 즐겨보게 되었다.

아무튼 이런 계기로 즐겨보던 웹툰에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란 책이 등장한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지만 그 웹툰을 본지 얼마 되지 않은 날에 서점을 방문했다가 동일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고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첫 문장은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다. 이 책의 모든 것이 함축된 이 문장의 뜻을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필자는 이 문장에 담긴 의미를 책을 덮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미 무수히 보았던 장면을 한 문장으로 만났을 때 그 생생함을 살려내지 못한 것은 책장을 열기 전 상상도 하지 못한 책의 제목이 주는 충격에서 깨지 못한 상태 때문이라고 변명해 본다.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한때 유명한 골키퍼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침에 일하러 가서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이야기에서 블로흐가 해고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마주친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게 된다. 그는 그 길로 공사장을 떠나게 되고, 이야기는 그의 불안을 향한 발걸음으로 쉼 없이 이어진다.

한트케의 글은 이후 쉴 틈 없이 서술된다. 시작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하나의 몸통으로 덩어리져 있다. 그 덕분에 독자는 책을 열자마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의 향연에 발이 묶이게 되고, 이야기의 흐름과 함께 끝까지 가게 된다. 어찌 보면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의 향연은 이어지는 모든 순간들을 빈틈없이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음 웹툰 '빅토리아처럼 감아차라' (글: 이창현/ 그림: 유희)의 한 장면.

마치 롱테이크 롱테이크(long take)4 영화 촬영 기법처럼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상황은 장면 전환 없이 이어진다. 이런 특징은 그가 언어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트케의 이런 글쓰기는 마치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글은 문학작품이란 숙련된 작가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체로 서술하고, 이에 독자가 감동을 느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다.

이에 대해 번역자 윤용호씨는 한트케의 글쓰기를 내용보다 서술이 우선인 문학 작품이라고 평한다. 때문에 이 책이 문고본 판형의 100쪽 분량의 아주 짧은 분량인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트케의 촘촘한 묘사는 분명 흡입력이 있지만,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그의 서술(내용을 찾기 힘든 전개)은 독자의 인내심을 쉽게 바닥나게 만들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작품 이전에는 더욱 그런 현상이 심했으며 1970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기점으로 전통적 서술 기법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 블로흐는 그 누구도 그에게 해고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해고한다. 그가 스스로를 해고하고 공사장을 나오자,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장면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되도록 많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10쪽) 또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다.(10쪽) 잠깐 통화한 사람은 전처였지만 딱히 할 말은 없다.(18쪽) 길가의 경찰에게 인사를 하지만 경찰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고,(10쪽) 커피숍에 들어가 맥주를 주문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맥주는 나오지 않는다.(18쪽) 이런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블로흐가 스스로를 해고한 것과 맞물려 생각하게 한다. 그는 이미 많은 것으로부터 단절된 존재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주변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며 그의 삶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야할 일은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극장, 시장, 뒷골목을 배회한다. 그리고 그의 배회는 극장 여자 매표원과의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그녀와 대화를 하던 중 그녀를 목 졸라 죽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동기는 불투명하다. 그는 그녀가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는 물음을 듣고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일 뿐이다. 블로흐의 살인은 그가 겪고 있는 공포가 가져오는 그의 숨 막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제 도망자가 된 블로흐는 국경 마을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도 불안의 답답함을 벗지 못한다. 그의 심리상태는 갈수록 왜곡된다. 게다가 신문을 통해 본 그의 살인 사건은 하나 둘씩 자신을 조여 온다. 한트케는 바로 이 상황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골키퍼 블로흐의 불안이 여기서는 살인자 블로흐의 불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5 블로흐의 살인과 그의 쫓기는 모습에서 독자는 측은함이나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 그저 메마른 시선으로 그의 행보를 바라보게 된다.

페터 한트케.

한트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그가 시대의 불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블로흐가 일하는 곳에서 늦게 출근한 그날 스스로 해고되는 배경에 시대의 불안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가 단순히 정신이상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시대에 만연한 정서로 인해서 스스로를 해고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야기엔 드러나진 않지만 이미 블로흐 이전에 블로흐가 겪은 일이 선재했고, 그런 경험의 반복이 블로흐로 하여금 해고를 받아들이게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장감독의 눈짓 한 번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어떤 항변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군상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필자가 느끼듯 한트케가 말하는 것이 항변이나 영웅적 투쟁은커녕 지각에 대해 이유를 말하는 단순한 대화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의 불안이라면, 이 땅을 살아가는 독자들도 한트케의 서술 방법의 어색함과 상관없이 블로흐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시대의 불안이 극대화 되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 겪는 불안은 블로흐가 겪었던 불안과 매우 흡사하다. 잦아지는 묻지마 범죄와 우발적 범죄행위 그리고 각종 혐오범죄 등으로 표출되는 이 시대에 만연한 개인의 불안은 블로흐의 불안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렇게 표출되는 불안은 개인만의 불안이 아니다. 이미 사회에 만연한 불안이 개인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불안한 사회는 극심한 경쟁에 기반 하는 일자리 부족과 복지의 사각지대 그리고 부의 편중 등을 텃밭 삼아 점차 커지고 있다. 그래서 ‘헬조선’이 이미 식상해져 버린 불안의 사회를 살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세먼지로 이미 입안이 텁텁한 상황에서 팍팍한 고구마를 먹는 마냥 우리를 더욱 답답하게까지 한다. 

우리는 숨 막히게 답답한 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무엇을 보는가? 이 사회의 기득권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블로흐가 현장감독의 눈짓 한 번에 공사장을 떠나게 되었듯이 우리들도 기득권의 눈짓에 기침에 그림자에 놀라서 지레짐작 불안에 떨었음도 확인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기득권이 벌여놓은 잘못된 구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우리 시대에 만연한 불안함 앞에 각자도생(各自圖生)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매주말 광장과 거리에서 변화를 요구하며 응집하고 있다. 블로흐의 불안을 담담한 눈으로 보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내 문제로서의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바꾸고 싶은 열망에 차올라 있다. 다만 그 계기가 우리 역사에 수치스러울 이번 사건이라는 것은 아쉽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민들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모두 포함해서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키커가 공을 찬 뒤 골키퍼가 자신의 뒤에 놓인 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패배의 전조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을 보자. 우리가 마주한 상황은 속속들이 밝혀지는 죄악의 고리들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은 여전히 우리를 조롱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들은 저 넓은 공간에 공이 안 들어가겠냐는 생각으로 페널티킥 앞에서 불안한 모습의 골키퍼로 서있는 우리를 바라볼 지도 모른다. 이제 점점 페널티킥의 순간은 다가 올 것이다.

필자가 이 시기를 지나며 그저 바라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블로흐의 독자가 아니라 함께 골문 앞에서는 골키퍼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불안 앞에서 함께 골대를 지킴으로서 공이 우리 뒤에 있지 않도록 함께 막아내고 함께 시대의 불안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래본다.

<각주 설명>  

1) 1. 페터 한트케 지음/윤용호 옮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서울, 2015), (원제:Die Ange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1970년 초판 발행).
    2.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는 희곡 「관객모독」과 1987년 빔 벤더스 감독의 독일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헐리우드 영화 “시티 오브 엔젤”로 리메이크되기도 함)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독일문단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2) 다음 웹툰 연재 중.

3) 다음 웹툰, 「에이스 하이」 1,2,3기.

4) 롱테이크(long take) : 긴 숏. 한 숏의 길이를 매우 길게 하여 촬영하는 방법. 일명 시퀀스 숏(sequence shot)이라고도 한다. 롱테이크는 이야기 진행과 인물의 액션을 연출자 의도에 따라 재구성하기 위해 한 시퀀스를 여러 개의 짧은 숏으로 나누는 것과는 반대로 한 시퀀스 전체를 등장인물에게 위임하는 방식이면서 사건의 해석에 대한 관객의 동참을 유도하는 기법이기도 하다.(다음 백과사전 검색)

5) 페터 한트케 지음/윤용호 옮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서울, 2015), 128쪽(옮긴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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