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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리”<이한수의 공감팩션>
이한수 | 승인 2016.12.05 10:26

갑신정변의 교훈 <갑신년의 세 친구>

병신년이 다 저물어 갑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해를 매듭지어야 할 때인데 올 연말은 만사 새로 시작해야 할 듯 마음이 바쁩니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인지라 세모(歲暮)의 고즈넉함을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습니다. 나라 밖 일이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민주(民主) 시대의 대의정부가 어쩌면 이럴 수 있는지, 첩첩이 난장판임이 드러나면서 국민은 노도처럼 일어나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판국입니다. “을미적 을미적 하다가 병신 된” 100년 전 판국과 어쩌면 이리도 유사한지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무당을 구중궁궐로 불러들여 만날 난장이나 치고 사치가 극에 달해 국고를 들어먹질 않나 족벌 권세를 위해 나라까지 팔아먹은, 국모인지 왕비인지 어쩌면 그리도 추악한지 고개가 절로 돌아가지만, 나야말로 민(民)의 노릇에 게으르지 않았는지 자책도 하게 됩니다.

나라를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말아먹었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동안 나는 무얼 했나 반성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한 세기 전 난국에 나라 걱정하는 이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이 시대고가 회한(悔恨)으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구한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온몸을 던진 젊은이들이 이 시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 헌신에 고개 숙이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제아무리 숭고한 뜻일지라도 민중 속에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혁명이라는 게 그렇게 녹녹한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섣부르게 덤볐다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젊은이들의 열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낸 소설 [갑신년의 세 친구]가 반면교사 좋은 교과서가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은 고옥(古屋)에 들어앉아 음풍농월하던 선비들 나라여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깜깜한 청맹과니였다고 자조적인 넋두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정조 집권기 때부터 조선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열정으로 뭉친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 근대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북학파입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 북벌론(청나라 정벌)을 밀어붙이고 있었으니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배워 와야 한다는 ‘북학’은 꽤나 위험한 생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집권당 노론 벽파 가문의 박지원이 북학파를 이끈 행적은 개인의 영달을 스스로 거부한 헌신적인 충정에서 나온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정조가 죽고 북학파의 뜻은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역사 발전의 씨앗이 됩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사적 흐름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세우고 혈맹을 맺어 거사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바로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역사 발전의 맥은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왔지만 개화(開化) 혁신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열정만은 충만했지만 난세를 조망하기에는 혈기가 너무 앞섰던지 그들 젊은 충정은 조선의 안마당을 외세의 각축장으로 내놓은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신사상으로 개명(開明)한 젊은이들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위정척사 명분론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선비들은 개화파들이 국기를 문란하게 하며 나라를 오랑캐들에게 내주려고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젊은 개화파들은 이들 유학자들의 명분과 의리라는 것은 중국을 받들어 섬기는 사대주의에 불과하며 조선이 자주 독립 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하루 바삐 조선이 청국으로부터 자립하고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섭니다. 

개화파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구미(유럽과 미국)로 나가 세계의 변화 동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의 서울과 동경 거리 풍경만 봐도 조선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일본을 둘러본 조선 젊은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을지 쉽게 짐작이 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둘러보고 놀란 가슴을 열하일기 담아 조선에 전하려고 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아편전쟁으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벌여 적극적으로 개화에 나서고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개혁에 나선 것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들은 조선 또한 하루 빨리 바깥 세상에 눈을 떠야 한다고 확신을 갖게 되고 그 열정과 결기로 급진 개화 쿠데타 갑신정변에 뛰어들었습니다.

헌법재판소 정원의 백송나무

소설 [갑신년의 세 친구]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가 박규수 대감의 사랑에 모여 공부하면서 세상에 눈 뜨고 결사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좌절하는 과정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이 친구들이 박규수 대감의 집에 모여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박규수 대감의 집에는 백송 나무가 있어 그를 백송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난세에 조국을 위해 큰 뜻을 품었던 젊은이들이 이 백송나무 아래에서 결의했다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지금은 근대적 정체(政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헌법재판소 앞뜰에 서 있다고 하니 그것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백송파로 불렸던 이들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명문대가 출신이었지만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김옥균은 장원급제를 해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귀재였으며 홍영식은 영의정 대감 집 자재였고 박영효는 임금의 사위였습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자재들이었지만 신분을 초월하여 중인 출신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고 서구 문물을 직접 배우기 위해 멀고먼 유학길에 나서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자 조선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고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역모로 몰려 도륙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에 나섰던 것입니다. 

갑신년(1884년) 조선의 현실이 어떠했기에 이 젊은이들을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을까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거듭나고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어 조선의 개항을 압박합니다. 1875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개화정국이 형성되고 일본의 간섭이 날로 커지자 이에 반발하는 불만 세력도 점차 비등(沸騰)하게 됩니다. 급기야 개화 정책에 의해 홀대받던 구식군이 임오군란(1882년)을 일으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외척 집안을 공격합니다. 멸문의 화를 두려워한 민씨 집안은 청군에 빌붙게 되고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청나라에서 보낸 위안스카이(원세개)와 묄렌도르프가 조선 국정을 좌지우지 했고 국왕은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개화파는 조선이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일이 이렇게 되자 청국에 빌붙은 민씨 외척 세력을 타도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고 같이 공부했던 민영익을 변절자로 성토합니다. 개화파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분열되고 맙니다. 조선이 청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집권당이 그기에 빌붙어 개화파를 압박해 들어오는 암담한 국면이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안남(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사 상당수가 안남으로 이동하면서 일본은 조선 간섭의 국면 전환을 꾀하고 급진 개화파의 쿠데타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던 갑신년(1884년) 12월 3일부터 사흘간의 긴박했던 현장을 들여다보려면  영화 [삼일천하]를 보면 됩니다. 일본군이 한양 성안에서 야간 포사격 훈련을 하는 등, 청을 압박하고 민영익은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청군 증파를 요청하게 됩니다. 김옥균은 고종을 알현하여 수구 사대당 축출과 개화 부국강병을 진언하고 고종은 김옥균에게 밀칙을 내려 신임을 표합니다. 김옥균은 일본 공사 ‘다케소에’와 조선 개혁에 대해 협의하나 그의 애매한 언행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계획대로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일로 정하고 추진합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군이 즉각 군대를 보내어 궁궐을 장악하고 일본군은 지원 약속을 어기니 거사는 3일천하로 무산되고 쿠데타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도피합니다.  

[도라지] 원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 김옥균 암살 장면

일본으로 도피해 간 김옥균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갇혀 지내는 등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암살당하는, 갑신정변 이후를 그린 작품으로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추천합니다. 김옥균 암살 밀명을 받고 자객 홍종우가 일본으로 넘어가 김옥균에게 청나라 이홍장의 밀서를 전해주며 유혹합니다. 겉으로는 서구와 맞설 조,청,일 연대를 위해 청나라 최고 권력자 이홍장과 만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김옥균을 속이려는 술책에 불과했는데 결국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속아서 중국 상해로 건너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유지하게 된 민비 외척 세력은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결국 정변 십 년 만에 김옥균을 죽이게 됩니다. 김옥균이 죽은 그해가 “갑오세 가보세” 갑오년(1894년)이고 그 다음 해가 바로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된, “을미적 을미적” 을미년(1895년)입니다. 위정자들이 서로 아귀다툼 하는 동안 백성들은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흔히 변란(쿠데타)로 불립니다. 이 일을 일으킨 젊은이들이 반역자로 평가되고 있는 겁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조선의 근대화와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 이들의 거사를 진압하고 외세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자들이 이 나라 주권을 지키는 데 기여한 게 있나요. 갑신정변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이 일에 대한 평가가 그리 단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젊음을 바친 젊은 그들의 충정에 감동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민중과 함께 하지 않고 들떠버린 환상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고민하게 됩니다. 난제(難題)이긴 하지만 그만큼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 주제가 아닐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조국의 장래와 역사 발전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갖기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디쯤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이한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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