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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꽃을 달고 진리에 反하라!<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12.13 11:25

빨간 불이 들어오면 멈춰야 하지만, 영국에서는 차가 오지 않는다면 어느 때고 건너도 무방하다. 지금이야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드물지만, 초반에는 법을 어기는 기분이 들어 혹은 비도덕적인 아시아인으로 보일까 하여 심장이 쫄밋거렸던 기억이 있다. ‘법을 어기는’ 혹은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새삼스러워 했었다. 의식의 일반이 ‘반규범적’이거나 ‘비도덕적’ 삶을 향해 열려 있는 여자인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새삼스러울 수밖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마따나,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집회에는 참석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영국살이 첫 해에 경험한 메이데이는 많은 물음을 던져 주었다. 극단적으로(?) 평화로웠던 집회보다는 함께 참석했던 한 지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비교적’ 규범적인 남성이었는데, 그 날이 집회 참여의 첫 날이었다.

그는 인도가 아닌, 차도 위를 걸을 때 묘한 희열을 느꼈다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그 날의 첫 경험, 그러니까 ‘규범적이지 않을 수 있어 좋았던 그 날’을 오래 기억할 것이듯, 나 역시 나의 첫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2004년 어느 여름 날,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은 종각역에서 단체로 지하철을 탑승하였는데, 나를 비롯 많은 친구들은 개표구를 폴짝폴짝 넘어 들어갔다. 그 수가 몇 백이다 보니 역무원도 어찌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끝까지 표를 찔러 넣는 애들이 있었다. 그런 애들을 향해 선배들은 “돈 내지마! 이런 날엔 모범적일 필요도 없고, 너희들의 이동 경로를 남겨서도 안 되는 거야!”라며 채근했지만 모범 인사는 늘 있었다. 떠올려 보면, 그 날이 나의 첫 집회는 아니었지만 첫 ‘무임 승차’는 그 전에 경험한 폴리스라인을 넘는 것과는 또 다른 희열이었다. 

오늘은 그 희열에 관한 이야기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이야기라면 좋을 테지만, 그와는 결이 약간 다른 ‘진리(라 일컬어지는)’것들에 관한, 그러니까 규범적이고도 도덕적인 것들에 대해 반기를 휘둘러 보자는 데 방점이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국이 난리통이다. 쏟아지는 뉴스를 종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이럴 거면 한국에 있지 뭣 하러 영국에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 중 ‘평화 시위’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나는 일명 닭장차에 ‘잘 떨어지는 꽃 스티커’를 부착하고, 집회 후 쓰레기를 치우는 ‘시민’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엇을 주적主敵으로 여기는지에 따라서 집회 참여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가만하며, 그네들의 참여 방식을 애써 존중하였다. 다만, 꽤 많은 한국인들이 ‘도덕적 인간’ 혹은 ‘규범적 인간’이라는 당위성에 (무)의식적으로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는 좀처럼 떠날 수가 없었다. 

광우병 논란이 일었던 2008년 당시가 백만 촛불을 염원하던 것의 시작일 터인데, 당시에도 ‘닭장차’를 좀 흔들라 치면 오히려 ‘시민’들이 만류하였고, 폴리스 라인을 좀 넘어설라 하면 예비군복장을 하고 나온 ‘시민군’이 막아 섰다. 물론, 집회가 평화로웠기에 ‘유모차 부대’를 비롯 몇 십만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지만, 전에 일던 그 ‘희열’은 다시 없었다.

내가 맛 보았던 그 ‘희열’은 ‘착한 사람’, 그러니까 도덕적이거나 규범적인 인간으로서는 마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획득되는, 말하자면 ‘저항으로서의 희열’이었다. 이는 ‘옳다’라고 여겨졌던 것들 혹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불신을 나의 몸뚱이로 드러냄으로써 느끼는 것이요, 법과 질서, 규범과 규율 아래 작동되는 갖가지 요소들에 반하는 ‘불복종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거둬들이는 것이다. 이는 ‘빠이 (몽둥이)’를 휘두르냐 마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도덕과 규범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가만히 물어보자는 이야기이다.

행위의 보편을 재촉하는 도덕성은 ‘보편’이라는 언사가 이미 드러내고 있듯 특수성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보편적인 도덕성 안에서도 개인이 존중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들이 인정하는 개인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도덕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개인이다(연효숙). 니체가 밝힌 <도덕의 계보>를 살펴 보면 이러한 도덕의 실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근대의 규범적 사회는 기독교와 맥을 같이 한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선악의 구별이 희미했지만, 기독교의 성직자들의 ‘권선징악’적 지향으로 인해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해 진다.

특히, 기독교가 정한 그 신 말고는 다른 신이 없기에, 다른 신 아래의 사람들은 죄다 악이 되고 만다. 이로써, 선한 인간은 악한 인간을 계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이러한 인식과 지식의 체계는 근대를 거치며 더욱 강화된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되어 법, 권력 체계로 우리네의 일상에서 재현된다. 오싹한 것은 규율과 규범은 진리로 둔갑할 때가 많다는 데 있다. 서구 사회의 유일신 사상이 그렇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 사회의 기독교적 가치가 그렇고, 법과 권력 체계가 그렇다.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우상화가 아주 그렇다.

이는 민주화되었다고 믿어지는 유럽 국가들의 특정한 제도나 관행을 모방 또는 수입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사회과학의 기여로 서구의 근/현대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교환 구조의 발전이 자유민주주의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즉, 부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과 관련된 개개인의 모든 의사 내용이 자유민주주의적 공공의사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이다(양승태). 이러한 사실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외칠 때면, 가슴 한 켠엔 씁쓸함이 남게 된다. 또한, ‘개개인의 의사들의 단순한 합으로서의 다수 의사가 진정 존재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다수의 통치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맞물려 가는 것이 맞는가?’등의 물음은 나라가 이판사판 하는 이 시국에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의사 = 민주주의라는 아이러니로 인해 한국의 지금은 그대로 탄식 속에 있다. 아, 51프로여.

그러므로 이러한 근대적 사회, 규범적 사회와 그것 안에서 만들어진 진리(라 일컬어지는 것)들의‘밖’을 열망하는 것에서부터가 투쟁의 시작일 수 있겠다. 물론 투쟁의 동기는 언제나 서로에게 다르게 열려 있음을 가만하면서 말이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붉은 칸나, 1924 / 오키프는 20세기 초 성/고정관념의 굴레를 허물어뜨린 작가를 대표한다. 그녀의 작품을 시대적 틀 ‘안에서’만 해석했던 비평가들의 말에 분개한 오키프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내가 꽃을 그리면서 본 것들을 당신들도 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지만, 당신들은 내 꽃 그림을 보며 당신들만의 연상 작용 속에서 당신이 보고 느낀 것을 마치 내가 보고 느낀 것처럼 썼어요. 하지만 난 그렇게 보거나 느끼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경우 위험을 동반한다. 당면할 위험은 물리적일 수도, 실존적일 수도 있다. 먼저는 국가폭력일 수 있고, 가깝게는 빈번한 토론과 설득, 언쟁으로 인한 소외와 극심한 피곤함일 수도 있다. 가끔은 각성된 자로서의 필연적인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단단하기 짝이 없어 작은 두 손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저 체제를, 저 고정된 인식을, 저 믿음을’ 상대하기란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벅차다고 가만 있기에는 좀 억울한 데가 있다. 가끔은 규범과 규율이 강요되는 그 곳에서, “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 한다. 일반화 할 수 없는 것들까지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에 도덕이 항상 기괴한 모습을 띠는 것(니체)”이라며 한 번은 비꼬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위험한 삶’을 밥 먹듯이 요청하는 한 남자가 말한다.

믿어보자, 존재에게 가장 위대한 풍요로움과 가장 큰 즐거움을 끌어내기 위한 비밀은 위험하게 살기다. 당신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 위에 걸설하라! 당신의 배를 탐험되지 않은 바다로 출항시켜라! 당신의 닮은 꼴, 그리고 당신 자신과 투쟁하라.” – 니체, <즐거운 학문> 中)

by Lee Jeffries, London, 2011

가만 그의 말을 들여다 보면, 이는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 ‘안’에서 자기 ‘밖’으로 나가기. 이는 다시 자기에로 돌아가는 경로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삶을 산 한 여성이 있다. 니체보다는 실존적으로 나와 더욱 친밀할 수 밖에 없는 여성, 일명 ‘혈루병 걸린 여인(막 5:25-34)’이다. 

아래로 피가 멈추지 않는 그녀는 부정하다. 그녀를 만지는 이도 부정하고, 그녀가 앉은 자리에 다시 앉은 것 마저도 부정하다. 그녀는 정결법(레 15:25-26) ‘안’에서 꽁꽁 묶여 있으며, 그 ‘안’에서 버려져 있고, 그 ‘안’에서 가난하다. 그런 그녀가 예수를 둘러싼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포대기를 둘러 썼을지언정, 무리들 사이로 들어가 예수의 옷을 만진다. 위험하고도 불온한 그녀의 도발로 인해 그녀의 ‘안’은 전복된다.

그녀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정결법 규정에 저항함으로써, 구원은 그녀의 것이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한 것이다. 구원과 해방의 이니셔티브가 예수에 있지 않고, 위험하고도 불온한 그녀에게 있다. 이로써 진리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관에 불과하며, ‘진실되어야 한다’는 관습적 비유의 책무 속에서 확고한 규약에 따라 결정된 것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다시 살아온다. 즉, 진리는 규범과 규율을 대변하고, 객관과 보편으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그녀의 위험하고도 불온한 정신이 진리 ‘안’에 있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이 이야기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 한 후배가 ‘위험한 줄로만 알았던 언니가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껴져요’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딴에는 친밀함을 나타냈으나, 뒤쳐진 듯 하여 영 석연치가 않다(웃음). 날로 달로 더욱 위험하고도 불온한 여자가 돼야 한다고 스스로를 부추겨 본다. 머리에 꽃 하나 달려 있다면 화룡점정이겠다. 해방과 구원은 도덕 교사들 ‘안’에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굳건하게 믿어지고 있는 진리 ‘안’에도 없다. 작은 두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 스스로를 건져와야 한다. 위험하고도 불온해짐으로써 그 구원은 성취된다. 

<필자 소개>

김정원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 석사 졸업.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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