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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14)<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12.29 10:54

박정희의 「언론윤리위원회 법」과 장준하의 「자유언론수호연맹」 (2)

박정희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가 신이 되려 했다는 데서 그렇다. 물론 그가 ‘나는 신이 되겠다’ 했는지 어쨌는지는 필자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유소년 시절부터, ‘나는 힘이 되겠다’라는 욕심을 품고 자랐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확언할 수 있다. 결국 박정희는 ‘신이 되려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는 신이다’라고 자신을 크게 오해한 것인지에 대해서 역시 필자로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절대’라고 확신(?)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내 말은 저 아래까지 ‘절대의 말’로 전달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딴소리는 반역이고, 그래서 딴 소리하는 놈 살려둬서는 안된다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신이 되려 하는 자였고, 더 나아가 자신을 신으로 오해하는 자 였다. 더 할 수 없는 비극이요 불행이었지만 그것을 ‘힘’에 미쳐 버린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정말 절대 힘은 ‘섬기는데’있다는 진리를 힘에 미쳐버린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역사란 실로 희안한 것이라, 그때 함석헌과 장준하, 장준하와 함석헌이 있었다. 역사는 어떤 경우에도 역사 자신 외에 절대(絶對)를 불허한다. 힘을 홀로 가진 양 오만을 떠는 것 앞에 역사는 전혀 다른 색상의 힘(?)을 보낸다. 기존의 힘을 꺾는 새 힘의 출현으로만 역사 스스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그의 유일한 무기인 ‘긴 칼’을 갈 때, 함석헌은 그의 붓을 갈았다. 박정희가 정치권력이라는 숫돌에 그의 칼을 갈아 날을 낼 때, 함석헌 역시 그의 붓을 갈았다. 함석헌에게도 그의 붓의 날을 가는 숫돌이 있었다. 그 숫돌이 바로 <사상계>였다. 함석헌과 장준하가 박정희와의 일전(一戰)을 치루어 내기로 서원한다. 

언론자유의 수호, 쟁취라는 것이었다. 언론 자유 없이 민주주의 없다. 민주주의란 언론이라는 영양소의 공급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통치자(?)의 말소리가 높을 때 통치자의 말만 들려질 때 민주주의는 실종된다. 

1964년의 장준하

지난해 함석헌의 귀국강연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하면서 장준하는 실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게 된다. 벌써부터 경험한 일이지만, 1964년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의 <사상계>에 대한 경영상의 탄압이 버티기 어렵다 하리만큼 가중 되어 오는 것이었다. <사상계>사(社)의 경영상에 대한 이야기, 함석헌에게 만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는 편이고, 또 않으려 조심하는 편인 장준하가 1964년에 접어들면서 왠지 이상스럽다 하리만큼 속사정을 내 놓아져간다.

참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때문이었을까? 게다가 함석헌 편에서의 생각도 “저 사람이 아예 잡지를 그만두기로 내심 작정했나?”싶게 정치의 일선을 비집고 드는 것이었다. 이제는 사상계의 독자는 물론 약간의 역사의식, 저항의식을 가진 지식인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의 <사상계>의 반품공작에 사(社)의 경영이 한계에 부딪힌데 대한 반동으로 빚어지는 정치 운동이 아닌가 싶게 장준하는 정치의 일선을 달리면서, 마치 정면충돌의 열차를 연상케 하는 박정희와의 대격돌을 자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해, 장준하로서는 정말 힘을 쏟아 부어 지원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권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마치 열병으로 치닫는 듯했다. 잡지 <사상계>도 열병을 앓고 있었다. 

1월호(통권 130호)는 정말 어렵디 어렵게 출판을 했지만 5월호는 휴간을 해야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돈이 없었고, 둘째는 장준하가 없었다. 월간 잡지 휴간이라니...장준하를 사상계보다도 더 강하게, 뜨겁게 잡아 댕기는 손이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외상 오히라와 비밀회담을 갖고,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이후 1년이 넘기 까지 줄기차게 대일굴욕외교의 저지를 위해 계속되는 투쟁이 1964년 3월,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그가 전국 순회 강연회의 특별 연사로 초청된 것이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그리고 그 역할! 그때, 거기 장준하가 있었다. 역사를 순종할 때, 역사는 그 순종하는 자에게 시대의 관을 씌운다. 그것이 시대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때 거기, 장준하보다 말 잘하는 정치인도 많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도 많았다. 그러나 그 말 잘하는 정치가,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들이 줄지어 섰다 해도 그때의 증인일 수는 없었다. 그때, 그 역사를 살아낸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역사, 그 철권의 탄압을 살아낸 사람만 시대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70여 곳에서 초청강연을 했다.

장충단 공원에는 70만으로 헤아려지는 대중이 모였다. 그야말로 운집(雲集)이었다. 이때 역시 전국을 뛰는 또 다른 ‘증인’이 있었다. 함석헌이었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기이하다 하리만큼 동류(同類)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친구라! 어찌 친구가 그리 쉽게 될 수 있다든가? 한 역사를 살아서였다.
대일굴욕반대투쟁과 함께 장준하에겐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언론 자유 신장을 위해서였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이 깊이 한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언론투쟁은 ‘사람으로서의 삶’이라는 종교적 구경을 지향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함석헌의 종교”이기도 했다. “네 속에 있는 말을 하라. 말이 너를 너로 자라게 한다. 말을 하라!”

함석헌의 종교 ‘말’

이미 일려진 바와 같이 함석헌은 민주주의를 종교라 했다. 

“민주주의야 말로 종교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는 사람의 말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들에게, 사람 노릇하려면 말을,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한다. 따라서 함석헌에게 있어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함석헌의 국가 권력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예나 이제나 통치자 (?)들이 바라는 것이 곧 백성이라는 것들이 잔말 말고 조용히 따라오는, 따라가는 것이다. 반대로 예나 이제나 통치자라는 것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백성들이라는 것들의 잔소리(?)이다. 웬 말이 많냐? 조용히 따라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에 이 같은 집권자들의 청종논리(聽從論理)에 “아니!”하고 내민 사람이었다. 역사는 진화한다. 진화해야한다. 그 역사의 진화는 의인의 피를 요구한다. 의인이란 절대라 주장하고 신봉하는 현상에 “아니”하는 이, “아니”하므로 묶이고 갇히고, 처형되는 자들을 말한다. 역사는 이런 이들의 희생을 그 절대 양식으로 삼아 진화한다. 말을 하라. 할 말을 반드시 하라. 할 말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집권자들, 민중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수호자들을 향해서는 “왜 말을 못하게 하나? 왜 말을 못듣 게 하나? 말하라. 답이 나올 때까지 물을 것이다”라고 부르짖는다. 

박정희 정권의 중첩되는 죄

총칼을 가지고 민주정권을 찬탈한 것이 첫 번째 죄였다. 생명은 저항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것이 생명인지라, 처음엔 무서워 떨던 것들이 몸, 맘을 가다듬고 저항을 시작한다. 이 생명인지라, 처음엔 무서워 떨든 것들이 몸, 맘을 가다듬고 저항을 시작한다. 그런데 기왕에 총을 가지고 칼을 가지고 정권을 찬탈했던 자들 인지라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자화상으로 오해하게 된다. 자신들이 죽기로 그 국가권력을 빼앗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저항해오는 무리들 역시 자신들을 진멸하려는 자들로 인식한다. 계엄령, 위수령, 비상령, 비상조치 법하는 것들이 그래서 그치지 않는다. 

장준하는 1964년 6월 중순쯤, 함석헌에게 이상한 정보 하나를 제공한다. 박정희 정권의 친위라인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이라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구체화된 것은 아닌데, 그 진행은 거의 확실한 것이라 했다. 놀란 것은 함석헌이었다. “이것만은 안된다”했다. 아직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해도 「윤리위원회법」이라면 그 핵심은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것이 분명한데, 언론을 종교로 이해하는 함석헌으로서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로부터 그 내용을 전해들은 며칠쯤 후 함석헌은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함석헌은 장준하를 찾았다. 

“장 사장, 일전에 내게 말했던 그 「언론규제법」이라는 거 말이요, 더 다른 정보는 없나?” 장준하는 빙긋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좋았다.
“선생님 걱정되세요?” 그리고 다시 웃는다. 
“걱정 안 될 수 없지. 아니 지금의 「신문윤리위원회법」만으로도 자기들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있는 판에 무슨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또 만든다는 거야? 이건 어떻게든지 막아야해. 국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다루어지고, 채택되기 전에 강고한 대책이 있어야지.”

장준하는 은밀히 정말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헌장사상초유의 규제입법이 이루어질 것인지라 박정희 일단만 제외한 거국적인 규제입법에의 저항조직을 위해서였다. 아직 「언론윤리위원회법안」 (言論倫理委員會法案)이라는 게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밀한 정보라인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아주 비밀리에 공화당의 인사들까지도 상당수는 예외로 이 법안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역사의, 시대의, 현정(賢政)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요즘 장준하의 주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윤보선, 백낙준, 김상협을 만났고, 장이욱, 모윤숙, 이인, 양일동, 유옥우, 조한백을 만났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났다. 정계, 학계, 문화재를 훑었다. 장준하의 순심(純心)이 그 어려운 일을 가능케 했다. 

그의 주머니에 300여 인사들의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저지를 위한 서명지가 담겼다. 어느 날 장준하는 조심스럽게 그 서명지를 내보였다. 소위 「자유언론수호연맹」의 준비위원이 될 사람들이었다. 함석헌은 장준하의 일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아, 저 그저 일하는사람....
함석헌은 장준하가 더 할 수 없이 좋았다.
이제 박정희와의 피할 수 없는 대전이 시작된다. 그것은 가히 혈전(血戰)이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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