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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 인카네이션<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예함의집) | 승인 2016.12.29 12:0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 새번역)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We saw his true glory, the glory of the only Son of the Father. From him all the kindness and all the truth of God have come down to us.(John1:14; CEV)

크리스마스 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신성(神性)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 천상(天上)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신 날로 기억하지요. 예수가 바로 그 분인데요. 예수 신성 신앙에 매달리게 되면, 예수의 모든 지상의 활동은 일종의 신화(神話)로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 신성 신앙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예수가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vere deus, vere homo)’이라는 교리를  확정했는데요. 예수가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이라는 교리는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머물렀다”는 본문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카네이션이라고 부르는데요. 우리말로는 화육(化肉) 또는 성육신(成肉身) 사건이라고 부르지요. 

모든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뿌리는 인카네이션 사상으로 수렴됩니다. 신앙과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identity)을 기독교는 인카네이션 사상에서 찾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하느님은 절대 타자였습니다. 초월자였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가 강조되었어요.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을 뿐입니다. 둘 사이의 소통(communication)사상은 히브리 사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헌데, 요한교회는 말씀(logos)이 육(sarks)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는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호크마(chokma)’의 번역인데요, 때로는 소피아(sophia)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호크마는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었고,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kosmos)을 창조하신 분으로 소개되지요. 호크마의 의지에 따라 세상만물은 생성되고 운화(運化)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애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을 도와 세계 창조에 관여했던 호크마가 육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는 선언이 요한교회 신학의 핵심이지요. 이는  히브리 신앙에 정면 위배됩니다. 인카네이션은 물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 대신에 하느님의 인간되심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요.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요? 인간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다른 아닌‘거룩한 장소’라는 선언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나요? 모든  인간은 본래 신성(神性)을 지닌 거룩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한 존재요, 인간들이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세간(世間)은 본래 신성한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인카네이션 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취지에요. 

인카네이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하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신성을 지니고 있기에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타성을 강조한은 것이 아니고요. 무한(無限)하신 하느님이 스스로를 제약하여 유한(有限)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어 인간이 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소통과 합일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중세 철학자 토마스아퀴나스의‘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대해 말했어요.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 수 있고, 감응(感應)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개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나요? 없지요. 사람이 사람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모하고 찾는 것은 무언가 같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요. 이에 근거하여 토마스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의 유사성(類似性)이 있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고 해요.(창1:27)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혼이 깃들어있다는 것이 창세기의 인간관이지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카네이션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결정적 사건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같아져야 합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았다는 인카네이션 사상은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에,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어요.  한쪽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몹시 슬퍼하는 아내에게, 왕이 물었어요.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아내가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 것은 한 눈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당신이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워요.” 그러자 왕은 어느 날 자기의 한 쪽 눈을 빼어내고 아내를 찾아왔습니다. "자 이제 나도 당신처럼 외눈이 되었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눈을 뽑고 아내와 동등하게 된 왕의 사랑의 행동에서, 인간이 되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인정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어요.(요1:13)

크리스마스는 예수만이 하느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딸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해 주는 사건이지요.  

19세기말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펼쳤어요. 수운은 사람됨의 특성을 ‘하느님을 모심’에서 찾았던 것이지요. 

사람다움이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하느님을 모신 존재로서 사는 데서 이지요.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모든 인간은 빈부귀천을 떠나, 존귀하며, 평등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하면서 수운은 자기 부인과 맞절을 했어요. 자기 집에 있던 몸종을 하나는 며느리로, 다른 하나는 수양딸로 삼았습니다. 시천주(侍天主)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을 모신 삶’을 수운은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요. 첫째는, 내유신령(內有神靈)인데요.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고 계시다는 것인데요.  하느님 마음과 사람 마음이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지요.(吾心卽汝心) 나라는 존재의 존귀성과 주체성을 자각하고 사는 것이 하느님을 모신 삶이지요. 
  
둘째는, 외유기화(外有氣化)이지요. 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others)와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살아감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타자와 소통과 공감,   협동과 연대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공공(公共)의 삶이 하느님을 모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각지불이(各知不移)입니다. 이는 인간의 주체성 실현과 공공성 실현을 위한 운동을 말합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결국 타자도 이롭게 하는 것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을 모신 삶이라는 것이지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 따르면, 하느님을 모신 시천주의 삶은 사람 섬기기를 하느님처럼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에서 완성된다고 보았어요. 사람은 섬김의 대상이지 결코 부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에 낯선 손님이 오면, 오늘 우리 집에 하느님이 강림하셨구나 생각하라고 했어요. 

하루는 해월이 청주를 지나다가, 한 동학교도 집에 하루 묵어가게 되었습니다. 헌데 밤늦은 시각에 어디선가 베 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어요. 해월이 묻지요. “도대체 이 밤중에 누가 베를 짜고 계신가?”  “제 며느리입니다.” 헌데 해월은 재차 묻는 것이었어요. 다음 날 길을 떠날 때, 집주인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제 밤에 누가 베를 짜느냐고 재차 묻지 않았습니까?” “그리했네.” “어찌해서 그리하셨는지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실은 그 시각에 하느님이 베를 짜고 계신 것이었네.” 밤이 늦도록 쉬지 못하고 노동하고 있는 아낙네에게서 최시형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계심을 인식하는 것,  나를 둘러싼 우주만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 이러한 주체성과 연대성을 떠나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깨닫고 사는 것이 시천주(侍天主)의 삶인 것입니다.

동학은 경물(敬物)사상을 말했는데요. 인간만이 아니라 물질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지요. 물질을 공손한 자세로 대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학의 물오동포(物吾同胞) 사상은 인간을 넘어 동식물과 우주만물을 또 다른 내 모습이며, 한 천지 부모에서 나온 형제자매로 본 것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예수만이 아니지요. 금년 성탄절에 예수를 믿고 따르는 여러분과 저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써 거듭 태어나는 계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 예함의집)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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