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에 참석한 청년들 (사진출처 : KBS)

믿음이 피어나는 자리는 늘 아슬아슬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죽은 나침반처럼 흔들리지 않고 북쪽만을 가리키는 교조주의자들의 신념이나, 슬픔도 고통도 없는 정신의 종교적 습관이 아니다. 너무 이른 죽음을 억울하게 맞았기에 결코 죽을 수 없는 자식을 품에 안고 비난과 조롱을 뚫고 걷고 있는 사람들의 쳐진 어깨 위에서 피어난 그 무엇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다.

긴 시간 동안 글을 쓰기 힘들었다. 대담해진 탐욕에 맞서기에는 포화상태에 이른 생각들이 무책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속물적인 이해관계 속으로 녹아버리는 세계 속에서 잘 팔리는 상품처럼 거래되는 정신을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절망감은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깊어만 가는 시대의 어둠에 절망했다. 그런 때에 촛불의 파도가 메시아적 사건처럼 도래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광장의 촛불은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우며 다시 시대의 믿음을 세워가고 있다. 우울한 과거를 구원하고 있는 이 촛불혁명의 원점에는 비참한 시대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과 그들의 곁을 지키려는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믿음을 잃어버렸다지만, 이 시대 속의 사람들은 여전히 지속될 수 있는 어떤 믿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은 다행스럽게도 그런 희망과 기대 속에서 열렸다.

 

그 동안 우리는 믿음을 잃은 시대에 시달리며 지쳤다. 탐욕의 노예가 된 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대다수가 짐승처럼 살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상식이 된 이 세계의 주인공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따라 세계를 분열시켰고,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솎아내면서 불의를 일상화시켰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언어가 삼켜지는 동안 악이 점점 시대의 얼굴이 되어갔다.

이런 시대에 번민은 혁명가만의 것이 아니다. 욕망대로 믿음을 팔아치우는 시대에 느끼는 외로움은 모두의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믿음이 팔려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믿음을 탐욕의 제단에 바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팔려갈 것을 믿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감사를 바친다.
예언자가 등장하기까지 예언이란 관념에 불과하다. 사람이 있기 전에 시대가 있을 수 없으니,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믿음의 사람의 등장에 달려있다. 성경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언자는 미래를 발표하는 예지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시대가 버림받은 무신(無神/無信)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들은 시대의 믿음을 세워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비루한 시대라 할지라도 버림받은 시대란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욕망에 팔려나가지 않는 믿음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아직 믿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믿음을 얘기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쌍용차 투쟁을 다룬 소설 [내 안의 보루]에서 투쟁을 이끌었던 노조지부장은 이렇게 고백한다.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다들 늙어가기만 한다.” ([내 안의 보루], 292) 그의 고백이 쓸쓸한가? 그렇다면, 자신의 투쟁을 쓸쓸히 고백하는 것만이 어쩌면 결코 팔아 치울 수 없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얘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Betray ⓒgloster.com

‘세상이 변했다’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배반의 경험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배반이 인류 역사를 채우고 있다. 세상이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다들 늙어가기만’ 하는 것에 있다. 그것 역시 또 다른 배반의 경험이다. 외부적 경험을 자기 안에 내면화한 것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반이다.

왜 우리는 외부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배반에는 일정한 도식이 있는 듯하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공동체가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탄식을 가리켜, ‘현대 세계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비통한 증언’이자, 그로 인해 모두가 ‘스스로 받아들이게 된 증언’이라고 말한다. 이 이중적인 증언은 앞서 말한 두 가지 배반의 경험과 연관된다. 공동체가 붕괴되었다는 비통한 증언은 사회적 차원의 배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요, 그렇게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늙어가기만 하는 개인적인 배반의 경험이 뒤따른다.

 

하지만 낭시가 말하고자 한 의도는 공동체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비극에 관한 리포트에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공동체가 자리 잡았던 적이 있었는지’를 되물으면서, 공동체가 와해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적 올가미에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 의해서 ‘상실된 공동체라는 환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무위의 공동체󰡕, 40-41) 그는 공동체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상실되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공동체를 상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사회를 채우고 있는 폭력과 경쟁, 그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중적인 배반의 경험은 비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견뎌내야 할 무엇이자 극복해야 할 무엇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낫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아마 그것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의한 체제가 생산하는 이중적 배반에 휩쓸리지 않는 영성이요, 공동체라는 이름의 질서가 서로를 향한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배타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광장에서 해방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과학적 진실에 대한 믿음은 답을 얻은 후에 생기지만, 역사의 진실과 신앙의 진실에 대한 믿음은 답을 얻기 전에 미리 존재한다. 그 믿음은 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 자체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기약 없는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게 만드는 신의 선물에 가깝다. 그것은 도래하고 있는 것에 관한 믿음으로서, 새로운 나라에 관한 복음은 이 믿음을 반드시 요구한다 (마가복음 1:15). 그 믿음은 설교자의 입술을 떠도는 관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 실상이 증명되는 것이다.

 

점프하는 사람 ⓒkingofwallpapers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하지만, 눈을 뜨고 보면 믿음의 시대를 위해 보루가 된 사람들이 있다. 빼앗기고, 밀려나고, 진압되고, 배제되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믿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아픔과 분노 속에서 태어난 믿음을 보루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믿음의 보루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시대 속으로 그리스도가 부활한다.